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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Apple People
2012.03.17 00:31

키스 헤어링: 서브웨이 아트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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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서브웨이 아트의 아이콘  키스 헤어링 Keith 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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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링은 지하철 광고 판넬의 검은 벽에 분필로, 종이 위엔 먹(sumi ink)으로 그렸다. 1983년 작 '매트릭스(Matrix)' .  

 

브루클린뮤지엄(The Brooklyn Museum)은 서른한살에 요절한 팝 아티스트 키스 헤어링의 특별전 'Keith Haring: 1978-82’을 3월 16일부터 7월 8일까지 연다.

 

이 전시는 피츠버그에서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한 헤어링이 지하철 광고 판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1982년 소호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 무명시절에서 인기작가로 떠오르는 4년간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헤어링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것은 삶과 죽음, 사랑과 전쟁이었지만,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천진무구한 만화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20세기의 아이콘이 됐다. 이번 전시엔 155점의 그림, 실험 비디오 7편, 그리고 지하철 드로잉, 스케치, 포스터, 일기와 폴라로이드 사진 등 150점의 자료가 소개된다. 


 1958년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성장한 헤어링은 한 살 때 만화를 잘 그리는 아버지 무릎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츠버그에서 미술 공부한 후 1978년, 열아홉살에 뉴욕에 왔을 때 뉴욕은 랩뮤직, 브레이크댄스로 대표되는 힙합문화가 꽃피우던 시절이었다. 거리 빌딩엔 화가들이 컬러풀한 벽화를 그리며 ‘낙서 미술(graffiti art)’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즈음 아웃사이더 청년 헤어링은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무명의 마돈나,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퀴아 등과 어울렸다. 그리고 지하철의 광고 벽면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는 게릴라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세계를 돌며 대중을 위한 벽화 작업을 하던 헤어링은 1990년 AIDS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미술관(Kunsthalle Wien)의 라파엘라 플라토우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30년 전, 갤러리 대신 지하철과 거리에서 대중과 소통을 꿈꾸던 화가 키스 헤어링의 유니크한 삶과 작품세계를 회고한다.

 

 전시는 7월 8일까지 계속된다. 200 Eastern Parkway, Brooklyn. 718-638-5000. www.brooklyn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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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초기시절 1978년부터 82년까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는 브루클린 뮤지엄 특별전의 입구. SP

 

 

키스 헤어링(1958. 5.4.-1990.2.16)의 삶과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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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사진 위): 펜실베이니아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자랐다. 1남 3녀 중 장남으로 네 자녀의 이름이 모두 K자 돌림이었다. Keith, Kay, Karen, Kristen. 해병대 출신 형제가 많았던 아버지는 알렌타운의 통신회사 감독이었는데, 취미로 만화를 잘 그렸다. 키스는 한 살 때 아버지의 무릎에서 크레용으로 동그라미 그리는 법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풍선에도 아이스크림에도 그릴 정도가 됐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선(line)이었다. 선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은 이후 그의 시그내쳐가 된다. 닥터 수스, 월트 디즈니, 찰리 브라운을 좋아했던 헤어링은 고등학생이 된 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년 시대: 10살 때 로버트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됐다. 10대 초반 헤어링은 기독교에 심취했다. 이후엔 히피차림으로 전국을 히치하이킹으로 여행 다녔다.

 

▶앤디 워홀을 보다: 10대의 어느 날 교회에서 워싱턴 D.C.의 허쉬혼뮤지엄을 구경갔다. 이곳에서 헤어링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히피의 영향을 받아 머리를 길렀고, 마약에도 빠졌다. 쿠츠타운은 그에게 너무 작은 마을이었다. 어디론가 떠나야했다. 헤어링은 펜주의 대도시 피츠버그의 아비이스쿨오브프로세셔널아트에서 상업미술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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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선을 좋아했던 소년은 노트북에 선으로 미로와 같은 이미지를 그리곤 했다.  SP   

 

▶피츠버그 첫 직업: 피츠버그아트센터에 취직해 벽에 페인트칠하고, 지붕과 시설 등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한 전시가 취소되어 갤러리 공간이 비었다. 센터 측에서 전시를 제안했고, 열아홉살의 헤어링은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동성애: 피츠버그 시절 여자친구와 살고 있었던 헤어링은 남자와 데이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결혼해서 아버지가 되어 영영 피츠버그 화가로 남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헤어링은 뉴욕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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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라로이드로 촬영한 키스 헤어링(1980년 경)  © Keith Haring Foundation  

 

▶뉴욕 미술학교: 스쿨오브비주얼아트(School of Visual Art)에서 등록한 후 드로잉, 페인팅, 조각, 미술사 등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아트를 배우며 비로소 다양한 미술 장르에 눈을 뜨게 된다. 

 

▶낙서미술 매료: “낙서(graffiti)는 내가 세상에서 봤던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 헤어링이 그리니치빌리지에 살면서 그가 반한 것은 낙서 미술(graffiti art)였다. 


▶바스퀴아와 교제: 헤어링은 뉴욕의 장 미셸 바스퀴아(Jean Michelle Basquia, 1960-1988)의 낙서그림을 보고, 낙서라기보다 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스퀴아는 헤어링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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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2살 어린 장 미셸 바스퀴아(왼쪽)와 휘트니 뮤지엄에서. 바스퀴아는 이듬해 사망한다.   

 

▶지하철 그림: 지하철 벽에서 광고용 판넬이 비어있는 것을 본 헤어링은 그 검은 판넬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가게에서 흰 분필 한 상자를 사갖고 온 헤어링은 그곳에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종이 위에 분필로 그리기는 누워 떡 먹기였다. 이후로 검은 공간을 볼 때마다 그렸다. 그런데, 그 그림들은 무척이나 연약해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우거나 가져가지도 않았다. 헤어링은 바로 그 연약성이 파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의 파워, 긴장과 폭력 사이에서 헤어링의 그림은 묘한 매력을 풍기기 시작한다. 뉴욕 경찰을 제외하고는.

 

▶체포 작가: 그는 뉴욕 경찰에 번번이 체포됐지만, 경찰조차 그의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할 지 몰랐다. 분필은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그림은 하나의 퍼포먼스였으니 말이다. 하루에 40점씩 그리기도 했다. 이후 헤어링의 그림은 TV와 잡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그는 낙서, 랩뮤직과 브레이크댄스 등 뉴욕의 힙합 문화의 중심 인물로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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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링은 지하철에서 하루에 40점을 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엔 30점이 소개된다.  SP   

 

▶Baby & Dog 심볼: 당시 홍콩 출신 사진작가 쳉 쾅 치(Tseng Kwong Chi)가 헤어링의 지하철 작업을 비디오로 찍기 시작했다. 헤어링은 굵은 선과 선명한 색상, 그리고 행동하는 인물의 이미지에 삶과 단일성의 메시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낙서 미술가들은 자신들만의 서명이 필요했다, 헤어링의 서명은 동물이었는데, 차츰 개의 모양을 닮아갔다. 그리고, 네 발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계속 그리다 보니 아기(baby)가 됐다. ‘번쩍이는 아기(The Radiant Baby)’가 그의 심볼이 된다. 그의 그림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이외에도 피라미드, UFO, 사람, 날개 달린 인물, TV, 동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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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개, 피라미드, 라디오 등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심볼 들.  SP 


▶큐레이터: 헤어링은 1980년부터 이스트빌리지의 폴란드 교회 지하에 있던 ‘클럽 57’에서 전시를 기획했으며, 타임스퀘어 그룹전에 참가해 동물과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1981년엔 지하철 광고 벽의 검은색 종이에 분필 드로잉을 시작했고, 플라스틱, 금속, 파운드 오브제도 등장한다.

 

▶직업 전전하다: 무명시절 헤어링도 갖은 직업을 거쳤다. 클럽 ‘댄스테리아’에서 식탁의 빈 그릇을 치우는 버스보이로 일했고, 머드클럽에서 전시 큐레이터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소호의 토니 샤프라지(Tony Shafrazi) 갤러리에서 조수로 일하다 발탁되어 전시를 하게 된다.

 

▶뉴욕 데뷔 개인전: 1982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뉴욕 데뷔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엔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솔 르위트가 보러 왔다.

 

▶안티-갤러리 화가: 헤어링이 대중과 소통하는데 역점을 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뉴욕의 아트딜러들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SVA 재학 시절 헤어링은 언더그라운드 미술계에서 소호나 첼시 등 갤러리의 아트딜러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헤어링의 작품을 사서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딜러들과 콜렉터들은 헤어링의 스튜디오로 찾아와서 수백 달러에 불과했던 그의 작품들을 본 후엔 깎으려고도 하지 않고, 물론 한 점도 사지 않았다. 이후로 딜러들을 만나지 않기로 작심했다. 식당과 꽃집에서 일하고 있던 헤어링은 그림을 팔아서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그도 화랑의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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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링은 무명시절 식당에서 그릇 치우는 버스보이를 하면서 다운타운에서 언더그라운드 전시회를 기획했다. 

 

▶헤어링의 친구들: 화가 장 미셸 바스퀴아, 앤디 워홀, 가수 마돈나와 사귀기 시작하다. 팝그룹 듀란듀란의 키보드주자 닉 로즈도 친구였다. 앤디 워홀은 헤어링의 그림 ‘Andy Mouse’ 등의 주제가 됐다. 


▶내 친구 마돈나: 마돈나와는 무명시절 이스트빌리지에서 만나 친해졌다. 마돈나가 TV 쇼 ‘솔리드 골드(Solid Gold)’에서 히트곡 ‘Like a Virgin’을 부를 때 입었던 핑크색 재킷은 헤어링이 디자인해준 것이다. 마돈나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린 둘다 같은 배경에서 온 괴짜 새들이었다. 둘 다 거리에서 왔고, 잔인한 세상 속에서 순수성과 환희를 찾았다. 우린 둘다 아이러니했다. 그의 그림은 대담한 컬러, 유치한 인물, 수많은 아기들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파워풀하고도 무시무시해진다.”

 

▶헤어링과 뮤지션: 1958년 생인 키스 헤어링은 마돈나, 마이클 잭슨, 프린스와 동갑이다. 무명시절 이스트빌리지에 살던 마돈나를 알았고, 그를 좋아했던 앤디 워홀을 통해 마이클 잭슨을 백스테이지에서 만났고, 밥 딜런, 데이빗 보위, 이기 팝 등 당대의 유명 뮤지션들도 알게된다.

 

▶오노 요코: 앤디 워홀은 헤어링을 오노 요코가 사는 다코타아파트에도 데려가 저녁식사를 했다. 오노 요코는 헤어링이 미술세계의 아웃사이더라고 기억했다. 그녀는 “헤어링에게 미술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기 떄문이다. 그는 팝뮤직의 프로듀서들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원했다. 60년대 존 레논이, 비틀즈가 그랬다. 키스는 그런 똑 같은 일을 한 것이며, 때문에 커다란 레벨로 소통한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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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 선(line)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던 헤어링은 알파벳을 연구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글도 미술의 모티프가 될듯.
  라파엘라 플라토우 큐레이터가 4일 언론 프리뷰에서 알파벳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대중을 위한 미술: 헤어링은 지하철 역뿐만 아니라 놀이터와 공공 스페이스에 대형 조각을 설치했으며, 건물 벽과 클럽, 병원에 벽화를 설치했다. 1986년 자유의 여신상 100주년에는 어린이 1000명과 건물 크기의 그림을 작업했다. 1986년엔 베를린 장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로 발돋움한다.

 

▶비엔날레: 1983년 휘트니 비엔날레와 사웅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되다.

 

▶세계의 화가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헤어링은 1984년부터 세계로 나갔다. 호주의 멜본과 시드니에서 벽화를 그렸으며, 리오 데 자네이로, 파리현대미술관, 미네아폴리스에서도 그렸다. 1986년엔 암스테르담, 파리, 피닉스, 베를린 장벽에서 벽화 작업을 했다. 또, 흑인 여가수 그레이스 존스의 뮤직비디오 “I’m Not Perfect”의 몸에도 그렸다.

 

▶캔버스 그림 시작: 1985년에 와서야 헤어링은 캔버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보르도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면서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했으며, MTV에도 출연한다. 

 

▶팝 숍: 1986년 헤어링은 소호에 자신의 작품 이미지를 사용한 T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 머천다이즈를 판매하는 ‘팝 숍(Pop Shop)’을 열었다. 이 숍은 2005년 폐업했다. 또한 앱솔루트(Absolut) 보드카와 스와치(Swatch) 시계 광고도 디자인했다. 그는 일간의 비난에 대해 “내가 그림 몇 점을 더 그리고, 그림 값을 올리면 돈을 더 벌 수도 있다. 내 숍(shop)은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하철역에 그리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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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 헤어링은 1986년 소호에 자신의 작품 머천다이징을 판매하는 팝숍을 열었다. 

 

▶사회운동: 헤어링은 팝숍 오픈 후 아파테이드, AIDS, 마약 등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반영하는 작품을 하기 시작했다. 앱솔루트 보드카, 러키 스트라이크, 코카콜라 등에서 영향받은 그림도 나왔다.1987년  ‘매우 특별한 크리스마스(A Very Special Christmas)’ 앨범 커버을 디자인했으며, 1988년엔 샤토무통 로쉴드 와인의 레이블도 그렸다.

 


.▶AIDS: 1988년 에이즈 진단이 내려진다. 이듬해 키스헤어링재단(Keith Haring Foundation)을 설립하고, AIDS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세서미스트릿: 1989년 이탈리아 피사의 산안토니오 교회 수도원에 벽화 ‘모든 세상(Tuttomondo)’를 그렸으며, 어린이 TV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릿’에 애니메이션 6점을 그렸는데, 1990년 2월 16일 헤어링 사망 후에 방영됐다.

 

▶만인을 위한 미술: 이후로 잘 나가는 작가가 된 헤어링은 미술이 많은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그림 속에서 사는 것을 즐겼다. 그의 아파트엔 앤디 워홀이 그린 ‘최후의 만찬’ 중 조그만 예수 그림을 비롯해 바스퀴아, 리히텐쉬타인, 로버트 메이픞토프의 사진, 피카소의 판화 등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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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출신 사진작가 쳉쾅치가 담은 비디오. 1979년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Painting Myself into a Corner' 작업 중이다. 오른쪽 코너에 자신이 들어갈 때까지 계속 그리는 모습이 33분간 담겨있다. 이 전시에선 비디오가 상영된다. 

 

▶에이즈 감염 후의 삶: 지금은 AIDS 약도 좋아져서 걸린다고 당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80년대는 달랐다. 1988년 AIDS 진단이 내려진 후 헤어링은 공포에 시달렸다. 1989년 음악전문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헤어링은 “가장 어려운 일은 내가 할 일이 무척 많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난 완전한 일중독자였다. 난 어느 날 깨어나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두려웠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가 나온된 지 6개월 후 인 1990년 2월 16일 키스 헤어링은 영원히 눈을 감았다.

 

▶세인트존성당 추모제: 1990년 5월 4일 세인트존더디바인 성당에서 추모제. 1000여명 참석했다.

 

▶2008. 5. 4: 헤어링이 살아있었다면, 이날 그는 50세가 됐을 것이다. 스페인의 테레사에서 헤어링의 작품 200점을 소개하는 회고전이 열렸다. 같은 해 크리스티나 클라우센이 오노 요코, 안무가 빌 T. 존스 등이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키스 헤어링의 우주(The Universe of Keith Haring)’이 개봉됐다. 

  

 

키스 헤어링이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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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에 빨간색을 항상 쓰려한다는 키스 헤어링. 그의 1982년 작 '무제(Untitled)'. 

 

 

“그림은 기본적으로 선사시대와 여전히 같다. 그림은 인간과 세상을 연결한다. 그림은 마술을 통해 산다.”

 

“나는 미술이 선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은 영혼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전진하도록 격려해준다. 미술은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찬양한다.”

 

“내가 세상에 공헌하는 것은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가능하면 오랫동안 많이 그릴 것이다.”

 

“빨간색은 가장 강한 색 중의 하나다. 그것은 피(blood)이며, 눈에 힘을 준다. 내 생각엔 교통신호등의 정지 사인이 빨간색인 것도 그 이유다. 사실, 나는 내 그림 모두에 빨간색을 쓴다.” 

 

“미술 자체의 의미는 미술가가 아니라 관람자에 의해서 체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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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장에 그린 빨간선 그림. 1977년. Collection Keith Haring Foundation. © Keith Haring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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