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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도기가 바꾼 두 남자의 인생

골동품 딜러 로버트 헤치와 유프로니오스 크레이터

고고학자 르 코시 페일스와 프랑소아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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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로니오스 항아리(왼쪽)/ 프랑소아 항아리


하이테크 시대 우리들은 시간에 쫓기며 산다. 얼마 전 오랜만에 새 앨범 ‘올드 아이디어즈(Old Ideas)’로 컴백한 레오나드 코헨은 이스트빌리지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에겐 마감(deadline)이 있지? 나도 있어, 죽음이라구.”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숙명의 파이널 라인을 향해 가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부고면(Obituary)은 기억할만한 이들의 삶을 요약한다. 스티브 잡스와 휘트니 휴스턴처럼 유명인사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커버스토리에서 뒷면 풀페이지에 이어진다. 수년 전 사망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의 크기는 너무도 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공적이 실리고, 다른 이는 범죄로도 이름을 남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지난 2월 9일자에 나온 한 남자의 사망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한 남자와 그리스 항아리 사진이 함께 실리며, 한 골동품 거래상의 죽음을 알렸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헤치(Robert Hecht, 92). 그는 그리스 항아리 밀반출 혐의로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됐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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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그 도기가 오래 전에 본 부고란을 상기시켰다. 돌아간 이의 얼굴 사진 없이 달랑 그리스 도자 사진과 함께 한 고고학 박사의 죽음이었다. 드 코시 페일스(De Coursey Fales) 박사는 사진 속의 도자 연구에 평생을 바치다가 2000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도자와 두 남자의 인생이 오버랩됐다.  


 

로버트 헤치와 유프로니오스


#로버트 헤치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골동품 거래상이 된 헤치는 1960년대부터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됐던 인물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굴 유물을 거래하고, 터키의 화폐를 밀수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1972년 헤치는 고대 그리스 항아리 한 점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12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유프로니오스 항아리(Euphronios krater)’라 불리우는 이항아리는 이탈리아의 보물급 유물이다.

 


이탈리아 당국은 이 도기가 1971년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체르베테리의 에트루리아 고분에서 도굴되어 밀반출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파리 아파트에서 헤치를 체포했다. 헤치는 이 항아리가 레바논의 화폐 딜러의 가족이 1920년대에 구입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헤치가 감옥까지 가진 않았지만, 메트뮤지엄은 이 항아리를 2008년 이탈리아에 반환하기에 이른다. 현재 이 항아리는 로마의 국립에트루리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헤치는 1919년 볼티모어의 헤치백화점 체인을 소유한 재벌가에서 태어났다. 헤이버포드대학 졸업 후 제 2차 세계대전 때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독일어에 능통해 미군에서 민간인 통역사로도 일했다. 이어 쥐리히대학에서 고전학을, 로마의 아메리칸아카데미에서 연구원으로 수학했다. 이후 골동품 딜러가 됐지만, 최근까지 헤치는 LA의 J. 폴 게티뮤지엄에도 도굴 유물을 유통해온 혐의를 받으며 얼룩진 인생을 밟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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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메트뮤지엄이 120만불에 샀다가 이탈리아에 돌려준 유프로니오스 항아리. 검은 바탕에 붉은 색 그림인 적회식 그리스 도기의 걸작이다. 

 

#유프로니오스 크레이터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을 원액으로 마시지 않고, 물에 타서 마시길 즐겼다. 유프로니오스 크레이터는 와인과 물을 섞을 때 썼던 것으로 당대의 최고 도기 화가 유프로니오스가 BC 515년에 그렸다고 사인한 작품이다. 옆에는 도공 유시테오스(Euxitheos)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유프로니오스의 작품은 현재 27점이 남아있다.  


18인치 높이에 22인치 지름의 이 항아리는 검은 바탕에 붉은 색으로 그리는 적회식(red-figure)으로 그려졌다. 표면엔 전령사 헤르메스가 수면(히프노스)과 죽음(타나토스)의 신으로 하여금 트로이 전쟁에서 부상당한 제우스의 아들 사르페돈의 시체를 고향 땅에 묻으라고 지시하는 신화의 한 장면이 담겨있다. 뒷면엔 그 시대 아테네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흑회식에서 적회식으로 전환한 선구자였던 유프로니오스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사르페돈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포즈와 정확한 분해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신화와 당시 그리스 젊은이의 삶을 한 항아리 속에 대치함으로써 인간적인 신화와 신화적인 젊은이들의 느낌이 나도록 배려했다. 


  

드 코시 페일스와 프랑소아 베이스


#드 코시 페일스 에머슨대 고고학자 겸 역사학교수였던 드 코시 페일스 박사는 단 한 점의 그리스 도자와 고대의 신화 연구에 바친 후 심장마비로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BC 6세기 아테네에서 제작된 흑회식(black-figured) 도자 전문가였던 페일스 박사가 열정을 바친 것은 ‘프랑소아 베이스(Francois vase)’였다. 1844년 로마 북부의 에트루리아 벌치의 고분에서 발굴한 알렉산드로 프랑소아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피렌체의 고고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뉴욕에서 태어난 페일스 박사는 하버드대학교와 동 대학원 졸업 후 고전고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 2차세계대전 때 중미에서 육군에 복무했으며, 오버린대와 에머슨대에서 가르쳐왔다. 페일스 박사는 1948년 펜실베니아대학교뮤지엄의 키프러스 해변의 고대 도시 쿠리온(Kourion) 발굴조사팀에 참가, 이전에 궁전으로 알려졌던 건물이 목욕탕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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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일스 박사가 평생 연구한 흑회식 프랑소아 항아리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159명이 등장한다.    
 프랑소아 항아리유프로니오스 크레이터와 달리 흑회식 도시인 프랑소아 베이스는 B.C. 570-5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자 표면엔 “에르고티모스(Ergotimos)가 나를 만들었고, 클레이티아스(Kleitias)가 그렸다”고 써 있다. 

이 항아리의 운명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1900년 박물관의 수위가 의자를 프랑소아 베이스를 보관한 케이스에 던져 그만 산산조각이 났다. 총 638개로 부서진 항아리는 1902년과 1973년 두 차례 복원작업을 거치게 된다.

 

프랑소아 베이스엔 그리스 신화를 독파하지 않았다면, 난해한 인물들까지 총 159명이 등장한다. 멜리거, 펠레우스, 아틀란타가 칼리도니아에서 멧돼지 사냥하는 장면,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와 간화원 반대편에서 lyre를 연주하며 아테네의 청년들을 이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트로이전쟁의 막바지에서 아킬레스의 친구 파트로클러스가 장례게임의 하나로 전차 경주를 하는 장면, 아킬레스는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참가한 게임 상품인 청동 삼각대 앞에 서있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에트루리아
 BC 8세기경에서 BC 2세기까지 지중해와 이탈리아 대부분을 지배한 민족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에트루리아 분묘에서 그리스 도자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메트뮤지엄 그리스 도기 하이라이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1만 4500여점의 고대 그리스 도기를 소장하고 있다. 유프로니오스를 이탈리아에 돌려주는 상황에 몰린 아픈 기억도 있지만, 여전히 소장품 수로서는 톱 클래스다. 로비(그레이트홀)의 서쪽 데스크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고, 그리스 갤러리로 향한다. 하이라이트 도기엔 번호가 있으며, 이 번호를 누르면 필립 드 몬테벨로 전 메트뮤지엄 관장의 해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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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로니오스 반환 후 메트 소장 최고의 항아리가 된 '베를린 화가'의 도기. 베를린에서 걸작이 발굴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악사의 표정을 정교하게 포착했다.  메트의 #5841 오디오 가이드엔 여전히 유프로니오스 설명이 나온다.  목소리는 전 메트 관장 필립 드 몬테벨로.

        


주의할 것은 #5841의 ‘베를린 화가’ 도기는 유프로니오스 항아리를 대치하면서, 설명도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메트의 홍보부에 알렸으니, 곧 베를린 화가 도기의 설명으로 업데이트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대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그리스 도기(陶器)는 2500여년 이상을 인내해왔다. 회화는 시간과 함께 사라졌어도 도기의 그림은 남아있어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만들어냈고, 도기 화가들은 신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를 항아리 표면에 그렸다. 화가들의 붓은 자연과 서민들의 일상생활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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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항아리는 식기와 운반용 외에도 묘비처럼 쓰였다. 돌아간 자의 영생을 기원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오른쪽 위에 죽은 이가 누워있고, 그의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이 서있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장품. SP

 

도기의 종류는 기능에 따라 다양했다. 음식을 저장하고, 운반할 때, 또는 음식을 섞을 때 사용했다. 주전자나 컵으로, 기름이나 향수, 화장품을 보관하는 변으로도 이용했다. 대형 항아리는 묘비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형태도 기원전 1000년경엔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처럼 기하학적인 무늬가 나오다가 동물과 인물이 등장했다. 

 

기원전 6세기에 번성했던 아테네의 도기는 지중해의 여러 나라로 수출된다. BC 4세기 경엔 장식기법이 퇴폐예술로 전락했고, 100여년 후엔 아테네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도기는 지금 가난한 국가로 전락한 그리스의 기념품 숍에서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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