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시인의 노래: 김정기 시인의 '빗소리를 듣는 나무' 읽기
'뉴욕 한인 문단의 대모' 김정기 시인
"떨림과 황홀함으로 시를 지켜서 행복하였네라"
뉴욕 문단의 대모 김정기 시인이 6월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문학동네)를 냈다.
'당신의 군복'(1975) '구름에 부치는 시’(1984) ‘사랑의 눈빛으로’(1989) ‘꽃들은 말한다’(2004)에 이은 다섯번째 시집. 지난 10년간 시인의 컴퓨터와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86편이다.
시인은 말한다.
"시는 나의 온갖 남루함을 덮어주고 숨결을 조정해주는 수줍음이다. 고국을 떠난 지 삼십오 년, 황무지에서 우리말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시선의 떨림과 황홀함으로 서툴고 약한 시를 지키면서 자랑스럽고, 그래서 행복하였다. 여린 꽃잎 같은 시 한 구절에 입김을 불어넣었던 나의 평생이 부끄럽지만 따뜻하다."
조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지 35년째. 이 땅의 이방인으로서 모국어로 글쓰기는 무엇이었을까?
"시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으로 세상과의 불화를 녹였다. 상처와 방황의 기록인 시는 기진맥진한 내 삶을 이길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내 곁을 지켜주었다."
시는 그를 향해 빗장을 걸어잠근 조국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주는 위안처였고, 시인은 글쓰기를 갈구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등대가 됐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1972년 시문학지에 '오물'이 신석조 시인의 추천되며 등단했다.
1975년 대한민국 군인과 아내들을 감동시킨 시 '당신의 군복'을 타이틀로 한 시집을 냈다. 1979년 봄 남편이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으로 발령되면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해 10. 26이 터지면서 대한민국은 가족이 '돌아갈 수 없는 나라'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 살해범으로 체포된 김재규의 측근으로 남편이 지목됐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김 시인은 명예로운 외교관의 아내에서 비자발적인 망명자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시는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달래주고, 휘청거리는 그의 이민생활에 부둥켜 안을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었다. '빗소리를 듣는 나무'는 비탈길에서도 시인을 굳건히 지켜준 글쓰기의 기록이다.
'빗소리를 듣는 나무'에 기대어 보니
따끈한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를 열어보았다.
어떤 페이지는 촉촉한 안개가 끼어 있고, 어떤 페이지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또, 어떤 날 시인은 폭풍우 속에 몸을 적시고 있는 듯하다. 그 시에서 빗방울과 눈물 방울이 함께 소리를 내어 울고 있다. 고목은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망명자의 조국
김 시인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그대여! 잊었겠지만 다시 잊어다오/이역만리에서 버림받은 그의 현역을!/사라진 이름들도 동료였다/우리는 함께 총을 쏜 사람의 부하였고 친구였다/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졌다/당신이 임금이 되기 위하여/뉴욕에서 추위에 떨던 한 가족이 있었고,/흑인에게 커피잔을 내밀며/스패니시 등을 두들기던 대한민국의 시인이/어떻게 눈을 부릅떴는가를 알리고 말 것이다/역사는 결코 거짓말을 안 한다. 할 때도 있지만."
-‘제 5공화국’ 중에서-
시인은 10.26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당신의 군복'으로 군인들의 아내를 울렸던 서정 시인이 역사의 피해자로서 목도한 시대를 언젠가는 증언하리라는 다짐이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한 떼의 구름을 가지고 와/부드럽게 덮어주면’흉터가 아무는 흙은/붉은 피가 도는 나의 수족이다/시간의 빈 곳을 지탱해주는/살의 한 쪽이다/고국이다"
-‘흙이여 미안하다’ 중에서-
"한글로 조국이라고 쓰면/잉크 자국이 종이 위에 번져나간다/입 속으로 조국을 발음하면/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치밀어 오른다…/당신의 군복에서/해가 뜨고 달이 지고/산맥이 뻗어가고 바다가 넘치던/당신의 군복에서/조국을 보고 나를 보던/당신이 나를 버려도/나는 조국을 버리지 못한다"
-‘조국’ 중에서-
"충청북도 버들강아지 눈뜨는 계곡으로/봅눈이 되는 우리 가족의 땅으로/백번 죽어도 내 나라, 그 흙으로"
-‘망명가족’ 중에서-
어느 날 시인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멍이 든 자신을 발견한다. 어떤 날엔 그 아픔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조국이 그와 가족을 버렸을지언정, 시인에게 조국은 언젠가 돌아가야할 곳이다. 충성스러운 군인의 아내였지만, 한반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역자의 그물에 던져졌던 망명가족의 비애가 느껴진다.
김정기 시인과 화가 김원숙씨
꽃과 시인
비가 내리는 날 꽃은 기쁠까, 슬퍼질까?
시인의 마을, 꽃밭에서 꽃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왠일인지 무섭기까지 하다.
"올봄 꽃들은 눈을 흘긴다/눈을 부릅뜬 꽃들이/유순한 꽃을 먹는다/작은 꽃이 큰 꽃대궁을 물어뜯고/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꽃이 지고 있다고.../그래도 꽃이 무섭다/2007년 봄꽃이 무섭다/2107년이면 흔적도 없을 것들이."
-‘꽃이 무섭다’ 중에서-
"세상의 꽃들이 울고 있다/피는 꽃마다 맺혀지는 눈물방울이/지구 위에 물이 된다/빌딩 사이에 흰 꽃 터널을 이룬/배꽃 그늘에서 그는 혼자 서있다./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진다는 놀라움이/난해한 직선을 그린다./꽃에서 살냄새가 난다..../시간이 걷어간 색채를 돌려받으려/여자는 날마다 새로운 무지개를 그린다./계속 세상은 채색된다. 칠해도 칠해도 꽃은 아직 회색"
-‘지구의 꽃’ 중에서-
"내 몸에 꽃이 피다니/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구나./시간에 앉은 흠집이 언제부터/싹터서 꽃이 되었고/소리칠 때마다 자라고 있었구나./꽃잎, 한 겹씩 벗겨내서 말 걸어보자./이제 다시 보니 너는 꽃이 아니었구나./타관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나에게 안겨와/언제나 비로 다가와 눈물이 되었지./반짝이는 것들을 향해 들어설 때/새벽잠 깨어 뒤척일 때/찔러대던 가시가 꽃이 되다니…"
-‘꽃과 인터뷰’ 중에서-
"꽃송이 하나하나에 말 걸어보면/답장 없는 연서에 달콤한 말들을/내 이마에 쏟아붓는다./가는 봄날 한 자락을 붙잡고./배꽃도 지는/봄날/그대는 봄이네./떠날 수 없는 나의/봄날이네."
-‘봄날은 간다’ 중에서-
"민족 광야에서 피어나던 꽃송이들은/태양도 떠오르지 않는/벼랑에서 시들었더니/어둠을 짖어대던 개떼들은/피 흘리며 져버린/겨레의 꽃을 짓밟아."
-‘민족의 꽃’ 중에서-
"11월이 떠나는 들녘에 서서/꽃을 피우는 친구여.../늦가을 억새꽃으로 피어/바람을 타고 가는 길을 막는 손/물기 빠진 몸이/발 붙인 우물에서 물거울을 꺼내본다./가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는/그림자도 연기도/꽃이 되는 나이."
-‘억새꽃’ 중에서-
"바람에 시든 여린 꽃잎 하나/입김 불어넣는/나는 평생 꽃 수리공"
-‘꽃 수리공’ 중에서-
시인은 꽃에서 향기가 아니라 살냄새를 맡고 있다. 꽃들간의 전쟁을 보고 있다.
가시가 꽃이 되며, 울고 있다. 그의 꽃들은 천연색이 아니라 무채색이다. 때로는 가을날 들녘의 외로운 억새꽃이 되어 있는 자신을 성찰한다. 망명 시인에게 꽃은 희망이 아니라 슬픔이며, 향기가 아니라 고단한 육체의 시름일 따름이다.
김정기 시인과 시인/정신과 의사 서량씨
시인의 4계: 외침과 속삭임
한국의 서정 시인은 어느덧 저항 시인으로 진화해간듯 하다.
봄은 대부분의 시인에게 희망의 단어다. 그러나, 시인에게 봄은 봄이 아니로소이다. 절망이로소이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서울에 봄이 왔건만, 머나먼 나라의 시인에게는 아직도 겨울이다. 시인은 속삭이다가 외치다가 새가 되어 울고 있다.
"지하에 준비된 봄의 언어를/목청껏 뱉어보는 새벽/품에서 자란 새들이 날개를 달고/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물고/반드시 약속은 지키겠노라는/입춘의 말을 듣고 있다"
-‘입춘의 말’ 중에서-
"더 이상 내일 수 없는 어둠의 겹겹에서/창백한 겨울이 떠나고 있다/봄이 오기 전 2월은 제 5의 계절이다/창호지 물에 젖은 껍질들/탄력 없는 살갗이 매운 바람에 흐느적거린다"
-‘제 5계절’ 중에서-
"5월이 지나간다./잔인한 달이었던가./그해 서울의 봄은 모든 결박을 풀었건만/유리창이 깨졌다.’철통 같은 중앙정보부 유리벽/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졌다./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빛나던 총구에 녹이 슬어 있다./그 어깨에 별이 떨어졌다./그래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그 명령의 쇳소리는 이제/다시 우는 새가 되었다./플러싱 어느 모퉁이에서 우리는/모여서 쓸쓸히 촛불을 밝히고/다시 우는 새가 되었다./이번 5월에도..."
-‘그해, 서울의 봄’ 중에서-
"강에도 길이 있고/바람길도 있다는데/아직도 길을 못 찾고 여름 한가운데 서 있던 당신이/작년 여름 보았던 그/흰꽃들이 피고 지고 있네요."
-‘마지막 여름이었네요’ 중에서-
여름을 지나 봄을 기다리고 있던 시인은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9월이 오면, 가고 싶은 고향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 땅에서 생일 잔치를 벌여보면 어떨까? 시인은 조국이 보내는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다.
"9월이 오면/완행열차 타고/한반도, 전선으로 달려가/그 들녘에 가을꽃으로 피겠어요./당신의 결정을 더 이상 묻지않고/우리에게 부어주셨던 신성함을/다시 눈부시게/선물로 받겠어요./엎드려 승복하겠어요./9월이 오면 새 하늘을 열고/굵은 붓에 물감을 묻혀/어두움에서 색깔을 만들겠어요./뼈를 녹이는 눈물을 거두고/곡식으로 여물겠어요/그리고 옷깃 여미고/당신의 목소리를 기다리겠어요./9월이 오면."
--9월이 오면’ 중에서-
"손바닥 굵은 금에서 강이 흘러요/이 강은 소리없는 곳으로 흘러가/가을 억새밭에 당도한대요/천만 가지 빛깔이 어우러진/보기만 하여도 통곡할 것 같은/이 가을날이 조금 아주 조금 눈에 보여요/아주 조..."
-‘두번째 가을’ 중에서-
겨울에 시인의 에너지는 반대로 치솟는다.
땅을 열고 나와 담으로 올라올라 허공까지 오르는 담쟁이는 눈발에도 지치지 않고 있다. 부질없는 약속과 맹세가 깨지고, 겨울날 시인은 품 안에 따싸로움을 키우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땅을 박차고/시퍼렇게 얼어서 허공을 기어오른다/잎 위에 눈이 쌓여도/녹을 때까지 답이 없다…"
-‘겨울 담쟁이’ 중에서-
"엄동설한에도/칼칼한 바람 맞으며 난초 잎같이/솟는 젊은 시인들, 팽팽하게 조인 흙 딛고/무섭게 일어서고 있다./그래도 내 품속엔 얼지않은 것이/둥글게 커가고 있음을/당신이 아시면 된다.
-‘엄동설한’ 중에서-
그리운 missKOREA BBQ 레스토랑에서 김정기 시인
젊은 날의 초상
시인은 자신의 젊은 날을 돌이켜 본다.
꽃다운 청춘이 바람에 실려 뉴욕까지 날아왔다. 그런데, 새의 깃털은 무겁고, 아프다. 이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망명 시인의 존재는 참을 수 없게 무겁고, 애처롭다.
"우리 응접실에/사진 두 장 액자에 갇혀 있다/시어머님, 남편, 조연현 선생님 곁에/분홍 드레스 떨쳐입고/육영수 여사 모윤숙 선생님 앞에서 시 낭송하는/스물아홉살 꽃다운 청춘이었던 내 모습/바람이 몇 차례 불어닥쳐 여기까지 밀려와/애틋했던 것 삭고 삭아 먼지로 남아 있어/둘러보니 나 혼자만 남아 있구나"
-‘사진 두 장’ 중에서-
"남들이 다 달고 나는 깃털이/물에 젖지도 않았는데 무겁고 아프다./다시는 잠들지 못할 것같이 날밤을 새우면서/싸이도 아니고 소녀시대도 아닌 걸맞지 않은 노래/ 음정폭포에 맞아 주검이 된 영시의 햇살이 황홀하다."
-‘무거운 깃털’ 중에서-
김정기 시인은 2006년 6월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마종기 시인과 동포 문학인들의 밤을 기획했다.
시인의 마을, 유토피아
그러나, 시인은 이 땅에서 35년간 마을을 가꾸어왔다.
시는 그를 위로해주었고, 자유를 주었다. 그 '시인의 마을'이라는 유토피아에서 늘 황홀경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여기는 마음대로 색을 낼 수 있는/물감으로 가득 채워져/언제나 황홀을 만들어낼 수 있다./빛깔친구들은 서로 어우러져/신비한 궁전을 세우고/우리는 시인나라를 만들고 있다./여기는 와도 없고 신하도 없이/모두가 최고 권력자로 번쩍이면서도/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그림도시’ 중에서-
"시인은 영웅을 닮아 운명과 대결하며/끝없이 싸우다가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고/그럴 때 빛나고 아름답다고/이처럼 매혹적이고 엄청난 것/혼을 떨리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나."
-‘시인 유효기간’ 중에서-
*'빗소리를 듣는 나무'는 고려서적, 한양서적, 반디BooksNY 플러싱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Poetry Window 김정기: 빗소리를 듣는 나무
*Poetry Window 김정기, 강물의 사서함/Kim Jeongki, Postbox of a River
*Poetry Window 김정기, 입춘의 말/Kim Jeongki, Whispers of Early Sp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