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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The Woman in Gold)'


노이에 갈러리 소장 '아델 블로흐-바우어 1'과 유대인들의 황금빛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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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e Bloch-Bauer I, 1907, Oil, silver, and gold on canvas, Neue Galerie


올 4월 초 독일, 오스트리아 전문 미술관 노이에 갈러리(Neue Galerie)에서 날아온 E-뉴스레터.


"4월 2일 영화 개봉과 나란히 개막된 '구스타프 클림트와 아델 블로흐-바우어: 황금 옷을 입은 여인(Gustav Klimt and Adele Bloch-Bauer: The Woman in Gold)'전이 주말까지 나흘간 사상 최대인 6천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했습니다... 이 영화는 또한 저희의 숍에서도 수입을 증가시킬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희는 아델의 입술과 드레스의 광택에 매치되는 특별한 색깔의 립스틱 아에린(AERIN)을 선보였습니다. 이 립스틱은 뮤지엄 숍과 온라인으로 꾸준하게 팔리고 있으며, 로더(*에스테 로더) 가문의 미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헌신을 입증하듯 멋진 언론 보도를 타고 있습니다."



101-neue-galerie.jpg Photo: Neue Galerie


2001년 5애브뉴 86스트릿의 보자르 양식 맨션에 개관한 노이에 갈러리는 이름대로 뮤지엄이라 하기엔 왜소하다. 화장품 재벌이자 아트 콜렉터인 로날드 로더가 아트딜러 세르쥬 사바스키와 함께 창립한 노이에 갈러리에 체면을 세워준 것은 2006년 6월 로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 초상화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1(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를 구입해 들여오면서부터다. 


로더는 당시 크리스티(프라이빗 세일)에서 회화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에 도박을 했고, 성공을 거둔다. 유대인 로날드 로더가 유대인 여인 아델의 '황금' 초상화를 모셔오면서 '노이에 갈러리의 모나리자'로 부르게 된다. 큐비즘 콜렉터로 유명한 로더의 형 레오나드 로더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78점을 기증했고, 지난해 가을 특별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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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tail200000Gustav_Klimt_046.jpg왼쪽 녹색 여백 옆에 아델 블로흐의 이니셜 A와 B가 그려져 있다. 화가 클림트와 모델 아델이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1907년에 완성한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1'은 2006년부터 늘 2층의 메인 갤러리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황금빛 모자이크 드레스를 입은 여인, 창백한 얼굴에 진한 눈썹, 도톰한 입술과 나른한 표정의 아델 블로흐-바우어는 결코 미인은 아니다. 그러나, '아델1'은 클림트의 걸작이자 오스트리아와 나치의 항복, 그리고 유대인의 승리를 함축하는 드라마틱한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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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아델 초상화 1'은 '아델 초상화 2', 그리고 풍경화 3점(자작나무숲, 사과나무, 운터라흐 아터호수의 집들-*사진 위ㅣ왼쪽부터)과 함께 2005년까지 오스트리아국립미술관(Belvedere Palace, 벨레데러 궁전 내)에 걸려 있다가 극적으로 미국 내 들어오게 된다.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조카인 마리아 알트만씨가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서 이끌어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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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알트만 여사와 클림트 화집을 들고 있다. 랜디 숀버그 변호사.


이 소송의 담당 변호사는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아놀드 숀버그의 손자 랜돌 숀버그(Randol Schoenberg)였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숀버그의 손자와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조카, 두 유대인의 승리였고, 그 전리품을 유대인 화장품 재벌이자 아트 콜렉터 로날드 로더가 흔쾌히 매입하며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한 것이다.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의 제작자는 미라맥스를 창설했던 유대인 프로듀서 하비 와인스타인이다. 최근 이탈리안 모델 성희롱으로 화제가 된 그 인물. 똘똘 뭉치는 유대인들의 결속력과 파워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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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의 구스타프 크림트 되기. 라울 루이즈 감독의 '클림트'(2006).


이 파란만장한 클림트 회화 5편 반환 드라마는 책으로, 영화로도 여러 편이 나왔다. 

마리아 알트만의 클림트 스토리는 다큐멘터리 '유로파의 강간(The Rape of Europa, 2006)', '클림트 훔치기(Stealing Klimt, 2007)' '아델의 소망(Adel's Wish, 2008)'(테렌스 터너 감독) 등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2006년 존 말코비치가 클림트로 분했던 라울 루이즈 감독의 '클림트(Klimt)'는 데카당트한 세기말 비엔나의 분위기와 클림트의 플레이보이 기질이 더 인상적이었다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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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유대인 알트만 역의 헬렌 미렌과 새내기 변호사 숀버그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


소호의 안젤리카 필름 센터로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을 보러 갔다. 플라자 호텔 앞의 파리 시어터(Paris Theater)의 빅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올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후 4월 미국에 개봉된 사이몬 커티스 감독 '황금옷을 입은 여인(Woman in Gold)'은 홀로코스트와 미술품을 배경으로 개인의 집념,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해피 엔딩을 담은 할리우드 법정 영화다. 실화가 흥미진진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피해 고향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LA에 정착해 사는 80대의 유대인 여인(마리아 알트만)과 역시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작곡가 아놀드 숀버그의 손자 변호사(랜돌 숀버그)라는 파트너쉽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이차와 성차를 넘어선 '버디 무비'이기도 하다. 나치가 약탈해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에 걸려있는 외숙모의 초상화, 거장 클림트의 회화 5점을 반환해오기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대항해 법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얼핏 달걀로 바위 깨기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조카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해피 엔딩의 '홈런' 영화다.



thumbnail_20388.jpg 헬렌 미렌
239402.jpg-r_640_600-b_1_D6D6D6-f_jpg-q_x-xxyxx.jpg 라이언 레이놀즈
woman-in-gold-17jul14-02.jpg 케이티 홈즈와 라이언 레이놀즈

공격적이고, 꼬장꼬장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마리아 알트만 여사 역은 연기파 헬렌 미렌(테일러 핵포드 감독 부인)이 맡았다. 로날드 라우더가 '학생(school boy)'이라고 놀린 무경험 변호사 랜디 숀버그 역은 미남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전 스칼렛 요한슨 남편, 현 블레이크 라이블리 남편)가 안경을 쓰고 나름대로 열연하지만, 변호사 역으로는 역부족이다. 헬렌 미렌의 노련한 연기가 레이놀즈의 미숙함을 보완해주는 것이 천만다행인 케이스. 

케이티 홈즈(톰 크루즈의 전 부인)가 알트만 소송 건에 매달리기위해 법률회사를 포기한 남편을 지지하는 아내로 분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맥거번(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과 조나단 프라이스(브라질)가 연방 판사, 대법원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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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와 조카 마리아 알트만.

영화는 마리아 알트만의 법정 투쟁인 현재와 그녀의 과거를 오간다. 설탕사업가였던 삼촌 페르디난드 블로흐 바우어와 외숙모 아델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자였고, 브람스, 스트라우스, 말러 등 당대 예술가들과 파티를 하는 상류층이었다. 

페르디난드가 클림트에게 아내 초상화 의뢰, 3년만에 완성한 작품이 '초상화 1'(1907)이다. 그림이 공개되자 클림트와 아델의 염문설이 피어올랐다. 아델은 1925년 44세에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download.jpg  comp.jpg 클림트와 아델 블로흐-바우어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점령했을 때 아델 초상화1은 비엔나의 블로흐-바워 저택에 걸려있었다. 
나치는 클림트의 아델 초상화 두점과 풍경화 3점도 앗아갔다. 그림의 행방을 모르던 페르디난드 블로흐-바워는1945년 스위스로 망명 후 사망했다. 그리고, 블로흐-바워의 소장품은 비엔나 벨레데러 궁전 내 오스트리아국립미술관으로 들어간다. 


gold-maslany-irons.jpg 마리아와 오페라 가수 남편

나치의 광기로 인해 재산을 약탈당하고, 생존을 위해 남편과 도피한 마리아 알트만은 LA에 정착해 캐시미어 스웨터를 파는 옷가게를 운영하면서 알트만은 그동안 오스트리아 정부에 그림의 권리를 주장해왔으나, 무반응이었다. 마침내 1998년 오스트리아 정부 나치에 의해 약탈된 재산 원소유자에게 돌려둘 수 있는 반환법이 통과되면서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법률회사에 취직했던 랜디 숀버그가 클림트 케이스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둔 계기는 리서치하던 중 아델의 초상화 가치가 1억달러가 넘는다는 것, '돈'이었다. 그러나, 마리아 알트만 여사와 비엔나에 갔을 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본 후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느낀다. 할아버지 아놀드 숀버그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숀버그는 개인 대 정부의 법정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wEU4gYk.jpg 비엔나에서 기자를 만나는 알트만과 숀버그

마리아 알트만에게 고향 비엔나는 애증의 도시였다. 오스트리아국립미술관의 국보나 다름없는 클림트 회화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열정과 지능을 가진 변호사, 그것도 홀로코스트의 망령을 공감할 수 있는 유대인 청년이었다. 더 비싸고 유능한 변호사를 쓰라는 로날드 로더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청년 변호사를 믿은 알트만의 충직함과 우정도 가치있어 보인다.


Adele_Bloch-Bauer_goodbye_poster.jpg 2006년 3월 비엔나를 떠나는 아델 포스터. Photo: Gryffindor

여기서 상기해야할 것은 로날드 로더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오스트리아에 대사로 임명됐었다는 점이다. 로더가 오스트리아-노이에 갈러리 커넥션에서 클림트 반환에 보이지 않는 파워를 발휘했을 가능성이 있을 법하다. 로더는 '노이에 갈러리의 모나리자' 아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영화는 드라마틱한 실화에 비해 긴장감과 박진감이 떨어진다. 지나치게 멜란콜리한 과거 장면과 과다한 음악이 신파조라서 법정 스토리인 현재와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유대인과 나치에 대한 묘사도 선과 악으로 1차원적이다. 하지만, 헬렌 미렌의 노련한 연기가 가까스러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을 살려주고 있다. 


그리고, 클림트 반환 이후...

altmann1938.jpg 1938년의 마리아 알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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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오스트리아 법정에서 소유권을 쟁탈한 알트만 여사는 그해 6월 크리스티에 아델 초상화를 내놓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를 항복시킨 이 판결은 과연 미술품 약탈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 내 로제타 스톤과 이집트 유물, 파르테논 신전 조각(엘긴 마블)과 그리스 유물,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본국에 봔환하는데 영향을 주었을까? 영화 속 대법원 법정에서 오스트리아 측의 "외교 관계에 지장이 있다"는 변론은 약했다. Winner Takes It All!

마리아 알트만의 품에 안긴 클림트 회화 5점은 바로 LA 카운티뮤지엄에 전시되었다가 크리스티 경매로 넘어갔다. 황금옷을 입은 초상화는 아트 콜렉터 로날드 로더가 크리스트로부터 1억3500만 달러에 구입해 자신이 2001년 설립한 노이에 갈러리에 들여왔으며, 이를 기념해 반환 회화 4점과 함께 몇 주간 전시했다.


320px-Gustav_Klimt_047.jpg Gustav Klimt, Adele Bloch-Bauer II, 1912

같은 해 2006년 '아델 블로흐-바우어 2(Adele Bloch-Bauer II, 1912)'는 크리스티 뉴욕에서 8800만 달러에 팔렸다. 이로써 마리아 알트만이 환수한 클림트 회화 총 5점은 무려 3억2500만 달러에 달했다. 경매 커미션을 제외한 수입은 알트만과 유족들이 분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소장품인 '아델 초상화 2'는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장기 대여로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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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데어궁전에 자리한 오스트리아국립미술관 전경. 국보급인 클림트 걸작을 잃었지만, '키스'(1908)는 남아 있다.

1916년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마리아 빅토리아 불로흐-바우어. 오페라 가수와 결혼한 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 비버리힐즈에 부티크를 열어 캐시미어 스웨터를 팔아왔다. 마리아 알트만 여사는 승소 후에도 옷 가게를 계속 운영하다가 2011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랜디 숀버그는 프린스턴대 졸업 후 USC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알트만 소송으로 1억 2000만 달러를 변호사 수임료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를 LA 홀로코스트뮤지엄에 기부했다. 자신의 법률회사를 설립, USC에서 예술문화재산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부인 파멜라 마이어스-숀버그는 현대 사진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