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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희/수다만리
2015.04.30 03:27

(95) 박숙희: 우디 알렌 영화 엑스트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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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10) '셀레브리티'가 못되면 '엑스트라'라도


우디 알렌 영화 엑스트라의 추억

-125불짜리 '유명인사(Celebrity)' 엑스트라-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것도 행운이었다. 
뉴욕에 온 지 몇개월 되지않은 어학 연수생이 당돌하게 엑스트라로 자원했으니... 1996년 한여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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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트라: 우리 반 마르첼로가 ‘타임 아웃-뉴욕’에서 우디 알렌이 제목 미정 영화의 엑스트라를 오디션한다고 떠들어댔다.
피렌체에서 어학연수 온 마르첼로는 비잔틴 미술로 석사학위를 받은 인텔리였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강사가 우디 알렌 이야기를 했고, 내가 잘난 척하면서 우디 알렌 본명이 '알렌 코니그스버그'라고 했다. 그러자 마르첼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같은 아시안이 어떻게 그의 본명을 알고 있니?라는 표정으로. 마르첼로는 나보다 두살이 어린 폴란드 유대계 이탈리안, 그리고 그 나이에 머리가 알전구같았다. 머리숱만 많았어도 그애를 참 좋아했을텐데.

사실 우디 알렌의 영화는 한국에서 비디오로 많이 본 셈이다. 월간지 '스크린'에 감독 포커스로 우디 알렌을 쓸 기회가 있었고, 때문에 비디오를 10여편 이상 구해 보면서 장면과 대사까지 분석했으니.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사랑은 시들기 마련이지."("Love fades away.")와 '비극+시간은 희극(tragedy plus time is comedy)'이라는 내용이었다. 우디 알렌 영화로 본 뉴욕은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 도시에 내가 왔다니...

누가 "진정한 뉴요커가 되려면 '사인펠드(Seinfeld)'를 보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영어 공부하러 온 주제에 뉴요커들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가 잘 들릴 리가 없었다. 시리즈가 막을 내린 후 재방송과 마라톤 재방송까지 여러번 보면서 뉴요커가 되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히트 시트콤 '사인펠드'에서도 크래이머가 우디 알렌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을 자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대사는 "이 프레첼이 갈증 나게 만드네!(These Pretzels are making me Thirsty!)"라는 것 단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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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션: 마르첼로가 우디 알렌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했다. 유대인 마르첼로에게 우디 알렌은 영웅이었고, 뉴요커를 꿈꾸었던 나에게도 우디 알렌은 영웅이었다. 미국의 촬영장은 구경하기 힘들다. 엑스트라가 되면, 촬영장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크래이머처럼 우디 알렌 영화 엑스트라 한번 하면 평생의 추억이자 자랑거리가 될 것 같았다. 어짜피 뉴욕에서 매일매일 추억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마르첼로와 둘이서 오디션하러 갔다. 이스트사이드의 퀸즈보로 브리지 근처 한 교회에서 열렸는데, 땡볕 아래 수백 명이 줄을 서있었다. 마르첼로는 자리를 맡아놓고, 건너편에 디저트 잘하는 집에서 시원한 것 먹고 나오자고 했다. 그 유명한 ‘세렌디피티3(Senrendipity3)’였다. 우리는 거기서도 기다린 끝에 ‘프로즌 핫 초콜릿’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나왔다. 그러더니 마르첼로는 “더 이상 기다리기 지쳤다!”며 떠났다. 나 홀로 다시 오랫 동안 기다린 후 교회당의 오디션장으로 들어갔다. 

우디 알렌과 2명(아마도 캐스팅 디렉터와 유명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일 것이다)이 심사위원이었나 보다. ‘아메리칸 아이돌’이 아니니 노래 부를 것은 아니고, 연기력도 필요하지 않았다.엑스트라 캐스팅이니까. 이들 앞으로 2-3초간 응모자들이 스쳐지나갔다. 난, 응모자들 중에서 우디 알렌의 아내가 된 순이 프레빈과 가장 비슷한 얼굴이다. 그래서 당돌하게 ‘Nice to Meet You’를 했다. 안경 뒤로 우디의 눈이 동그레 보였다. 
 

# 캐스팅콜: 일주일쯤 후 ‘엑스트라’ 캐스팅콜을 받았다. 틀림없이 순이와 닮아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이와의 얼굴로 우디 알렌 영화 속에 들어간다? 캐스팅됐으니, 파티에 갈 정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늙은 유학생에게 무슨 파티? 동대문 시장에서 산 DKNY 재킷과 몇 벌을 들고 55스트릿의 패션 빌딩으로 갔다. 

의상 담당은 쓱 하고 보더니 의상 룸에 데려갔다. 백화점 옷걸이처럼 수백벌의 옷들이 걸려 있었다. 나더러 옷을 골라보라면서 미니 스커트를 들어보이 길래 ‘스커트는 싫다’고 했다. 그녀는 내게 맞는 엷은 브라운 실크 재킷과 팬츠 한 벌을 추천했다. 테일러가 바지 길이와 소매 길이를 줄이는 가봉까지 해주었다. 퇴짜맞은 내 옷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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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장실: 일주일 쯤 지난 후 다시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다. 엑스트라들은 며칠 후 여름날 아침 7시 미드타운 힐튼호텔에 소집됐다. 수백명의 ‘엑스트라’ 중 대다수는 스크린 엑스트라 길드(SEG)의 회원들이었다. 분장실 7개의 전신 거울 앞에서 미용사들이 엑스트라들을 일일이 화장시켜주고, 정해진 옷 입히고, 핸드백과 액세서리도 주었다.

나의 차례가 와서 거울 앞에 앉았다. 미용사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손질하는데, 갑자기 전원이 끊겼다. 미용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젤을 듬뿍 발라 내 머리를 ‘올빽’으로 만들어 버렸다. 화려한 변신의 기회가 망쳐진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전원이 나가다니. 안경을 안썼으니, 초점이 흐려져서 사실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거울 속의 아시안 여성은 홍콩 영화에서 마피아 두목의 괴퍅한 세번째 애인쯤으로 보였다. 나름 삼삼한 엑스트라를 기대했는데....

안타깝지만, ‘익명의 섬’ 맨해튼, 엑스트라 군중 속에서 평생 한번 할까말까한 모험을 즐기기로 했다.
 
# 진짜와 가짜: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엔 엑스트라들을 위한 아침식사로 크롸상과 커피가 마련됐고, 수백명의 엑스트라들은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우아한 척하며 브렉퍼스트를 즐기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호텔 안에 오가는 ‘진짜’ 비즈니스맨들보다 가짜 엑스트라들이 진짜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할리우드는 '꿈의 공장'이다. 

기다림의 연속일 줄 알기에 책을 가져갔다.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데, 심심한듯 한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한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우아한 백인 여성. 그녀는 전문 엑스트라로 우디 알렌 영화에 몇번 나왔으며, 한번은 대사도 있었다고 자랑했다. 그녀는 아시안이 노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누가 꼬장꼬장한 그녀의 수다를 들어줄까?

계속 기다리다 보니 점심 시간이 됐다. 엑스트라 전문 아주머니는 “우리는 SEG 멤버라서 유니온(노조)가 있으니, 식사도 챙겨주어야 하고, 오버타임에도 수당을 지급해야해!”라며 콧대를 높였다.


37.jpg Miramax Films
 
기다리며 수다를 떨던 중 우리 사이에 예쁘장한 젊은 여성이 끼었다. 배우 클레어 데인스를 닮았다. 그런데, 카리스마는 아직 없다. 여기에 콧수염이 달린 한 남자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살바로드 달리를 닮은 남자. 그의 직업은 배우인가? 
점심 때가 되자 콧수염이 자기가 잘 아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뮤지컬 '맘마 미아'를 공연하는 윈터가든 시어터 옆의 한 이탈리안 식당으로 엑스트라 4인조가 우루루 몰려 들어갔다. 

그런데, 이 분들은 수프만 시켰다. 클레어 데인스는 “난 ‘제리 맥과이어’에서 기자로 출연했어!” 콧수염은 “난 며칠 후 ‘로지 오도넬쇼’ 중계방송에 간다. 방청석 티켓을 구했거든!”하며 자랑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메인디쉬를 먹을 형편이 안되는 엑스트라들이다. 애피타이저 수프들 위로 '셀레브리티/유명인사'들에 관한 대화는 이어졌다. 당시 제목 미정이었던 그 영화가 2년 후 링컨플라자 시네마에서 개봉됐을 때, 제목은 ‘유명인사’ 즉, ‘셀러브리티(Celebrity)’였다. 하필이면, 흑백영화. 우디 알렌 영화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은 영화 '유명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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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장: 사실 엑스트라 오디션을 한 이유는 영화에 나가고 싶어서라기 보다 ‘영화를 어떻게 찍나’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충무로에선 간간히 친구들이 영화 찍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뉴욕에서는 영화 촬영을 많이 하지만, 철저하게 바리케이트를 치거나, 조수들이 막아 버린다.  

아침 7시부터 분장 후에 기다리고 기다리다 5-6시 경 드디어 지그펠드 시어터로 옮기자고 했다. 지그펠드는 요즘 시대의 복합상영관이 아니라 아르데코 건축양식의 아름다운 극장이다. 우리 '잘 차려입은' 엑스트라들은 바로 지그펠드 극장에서 영화 프리미어의 초대받은 손님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엑스트라들은 레드카펫이 달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녹색 비옷을 입은 우디 알렌 감독이 카메라맨과 이야기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엑스트라들이 수군거린다. 누구? 멜라니 그리피스야! 내 옆에 꼭 붙어 앉은 우디 알렌 전문 엑스트라 아주머니는 “케빈 코스트너도 한때는 엑스트라였다구”라고 속삭였다. 가수 양희은씨가 운전을 시작했을 때 자동차 뒷 창문에 "당신도 한때는 초보였다"를 붙였다는 말이 생각났다. 물론이다. 줄리아 로버츠는 메이시백화점의 판매원이었고, 제니퍼 애니스턴도 웨이트레스였고, 잭 니콜슨은 영화사 에이전시 우편물 담당이었다니까.

연출 조수가 객석에 앉은 군중을 향해 무어라고 떠들었다. 내겐 안들렸다. 조용히 하라는 말이었는지, 촬영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기다렸다가 또 다시… 몇 번 손을 휘저으더니, 끝이란다. 아주머니는 “오버타임!”이라면서 사라져갔다. 

한달쯤 후에 영화사에서 체크가 왔다. 125달러. 가봉하러 간 교통비 $25과 엑스트라 출연료 $100. SEG 멤버 아주머니는 얼마나 받았을까? 나도 언젠가 엑스트라 조합에 가입해볼까?

 
3927c731d37e70b13d91c72f83e30de5.jpg Miramax Films


#영화 개봉: 그리고, 한참 후 영화가 개봉됐다. 케네스 브래나와 주디 데이비스가 주연을 맡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위노나 라이더, 멜라니 그리피스, 샬리즈 테론 등 스타들이 나오는 흑백영화. 16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한 작가가 타블로이드 기자로 유명인사들을 쫒아다니면서 겪는 이야기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달콤한 인생’의 미국판이라고나할까? 생의 전환기/혼란기에 있던 우디 알렌의 자화상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내가 나오는 지그펠드 극장 장면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한국의 정일성 촬영감독이 존경한다는 스벤 닉비스트의 카메라는 영화관의 어두컴컴한 객석을 한번 패닝하더니 끝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고 장면을 찍기 위해 수백명의 엑스트라들과 분장이 필요했단 말인가? 거장 우디 알렌의 완벽주의, 프로페셔널리즘인 것이다. 나는 '유명인사/셀레브리티'라는 영화에서 자막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125불짜리 엑스트라였다. 그래도, 뉴요커들이 선망하는 우디 알렌 영화의 엑스트라 노릇은 가치 있었다. 뉴욕에서나 경험할 수 있던 일이니깐. 

'셀레브리티'의 평은 좋지 않았다. 순이 스캔달로 도덕성에 금이 간 우디 알렌은 이후 뉴욕을 떠나 베니스, 런던, 바르셀로나, 파리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영화를 찍어왔다. 복합상영관 시대 뉴욕 최후의 싱글 영화관, 1천131석의 지그펠드는 운영난으로 철거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학생이었던 마르첼로와 나는 뉴욕에 남았다. 엑스트라를 포기했던 마르첼로는 첼시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엑스트라를 했던 필자는 신문기자를 거쳐 블로거가 됐다. 그 때 수다를 함께 떨었던 엑스트라들은 어떻게 됐을까? 인생유전(人生流轉).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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