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영화제 (9) 이사벨 위페르의 '엘르'와 '다가오는 것들'
2016 뉴욕 영화제(9/30-10/16)
'스크린의 카멜리온' 이사벨 위페르의 페르소나
'엘르(Elle)'와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에서 철학교수 나탈리(왼쪽), '엘르(Elle)'에서 비디오게임 회사 대표 미셸 역의 이사벨 위페르.
이사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1953- )는 프랑스의 간판 여배우다. 10살 위인 카트린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는 '연기파' 배우라기보다는 스타에 가깝다. 비교한다면, 위페르는 드뇌브같은 미모와 카리스마는 부족하지만, 스크린에서 품어내는 카리스마는 활화산같은 에너지와 열정을 품어내며 잊혀지지 않는 캐릭터로 오래 각인시킨다.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In Another Country, 2012)'까지 출연작이 100편이 넘는 이사벨 위페르는 프랑스의 오스카상인 세자르상 15회 후보에 오른 '프랑스의 메릴 스트립'이다. 1996년 '세레모니'로 세자르 트로피를 거머쥔 위페르는 사실상 국제 영화제에서 더 진가를 발휘한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2회(1978, 비올레트 노지에르/ 피아노 교사),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2회(1988, 여자 이야기/1991, 세레모니)라는 화려한 경력의 프랑스 국보급 여배우다.
10월 14일 '엘르' 언론 시사회 후 기자회견에서 이사벨 위페르와 폴 버호벤 감독.
2016 뉴욕영화제에 이사벨 위페르가 두편의 프랑스 영화와 함께 초대됐다. 폴 버호벤(Paul Verhoeven) 감독의 재기작 '엘르(Elle, 그녀)'에서는 성폭행당한 비디오게임 회사 사장으로, 미아 한센-러브(Mia Hansen-Løve) 감독의 신작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 L’Avenir)'에선 남편의 별거 선언으로 홀로 남은 철학교수 역할이다. 극중 위페르와 엄마들과의 관계, 주요 '배역'(?)고양이가 등장하는 것이 주목을 끈다. 2010년부터 칸영화제 기간 중 동물 배우들에게 주는 'Palm Dog Award'가 시상되어오기 때문인듯.
Elle 그녀 ★★★★
Elle
할리우드에서 '로보캅(RoboCop, 1987)'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과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 1992)' '쇼걸(Showgirl, 1995)'로 성과 폭력을 유려하게, 잔인하게 구사하던 감독, 폴 버호벤이 이사벨 위페르를 캐스팅한 이유는 간단했다. 할리우드에서 이런 역할을 할 배우가 없었다는 것. '엘르'는 프랑스의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출품작이다.
엘르'는 충격적인 강간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디오게임 회사의 대표이자 이혼녀인 미셸 블랑(이자벨 위페르 분)은 피해자로 주저앉지 않는다. 다음날 친구들과 만나 '성폭행 당했다'고 담담히 말하지만(이때 웨이터가 화려한 무늬의 파이퍼 하이드섹 레어(Piper-Heidsieck 'Rare') 샴페인을 터트리려 한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미셸은 복면한 강간범을 찾아나서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극을 행한다.
Elle
미셸, 그녀에겐 어두운 과거가 있다. 아버지가 연쇄살인으로 수감되어 있고, 엄마는 기둥서방과 연애 중이다. 아들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구박받으며 산다. 이런 상황에서 미셸의 성도덕은 그녀의 허망한 눈빛만큼이나 엷다. 친구 남편과의 외도, 이웃집 남자를 유혹하며...가족사와 비디오게임, 그리고 현실의 삶이 미셸 블랑이라는 별종 여인으로 만들었을까? 미셸은 이제까지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비상투적인, 유니크한 캐릭터의 여인이다. 시시각각 카멜리온으로 변신한다.
'엘르'는 예측불허하는 캐릭터와 사건들, 버호벤식의 끝까지 가는 성과 폭력에 대한 탐구가 쇼킹하고,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하며, 통쾌하다. 여성들이 피해의식을 가뿐하게 버리고, 복수극으로 승리를 예찬할 수 있는 영화. 다시 한번 이자벨 위페르가 이 시대 최고의 배우임을 입증한다. 131분. 미국 개봉 예정.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 - L’Avenir ★★★
Things to Come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은 배우 출신이다. 고작 열일곱살 때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의 '9월말, 10월 초(1998)'에 출연했고, 홍콩스타 매기 청(장만옥)과 이혼한 아싸야스 감독과 결혼했다. 철학자 부모를 둔 한센 감독의 자전적인 스토리 '다가오는 것들'은 학문에 정진해온 여교수가 겪는 중년의 위기를 참신하게 시적으로 그렸다. 주연 이사벨 위페르의 자연스런 연기 덕이다.
철학교수 하인즈(안드레 마르콘 분)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둔 철학교수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는 학문처럼 사랑 불변의 원칙을 학문처럼 믿는다. 치매상태인 엄마를 돌보며 사는 나탈리에게 남편은 "한여자를 만났다"며 청천벽력같은 말을 한다. 나탈리가 총애해온 제자 파비안(로만 콜린카 분)와의 플라토닉한 관계 덕분에 위기의 중년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Things to Come
남편이 떠난 후 송송 빈 책꽂이에 둘러싸인 나탈리의 공허한 삶, 갯벌에 서서 전화하는 위페르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외로운 존재의 무거움을 보게 된다. 그래서 파비안같은 '플랜 B'가 필요한듯. 남편이 사과조로 보내온 꽃다발을 IKEA 블루 백과 함께 쓰레기통에 넣었다가 IKEA 백을 도로 빼내는 장면이 쓴 웃음을 지게 한다.
철학 문구를 종종 사용하며, 미국 팝송을 의도적으로 쓴 것은 무색무취의 건조한 이 영화를 사카린처럼 달달하게 만든다. 올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은곰상) 수상작. 100분. 미국 개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