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숙희/수다만리
2017.07.23 01:58

(283) 박숙희: 도시의 전설 '페일 메일' 이야기

조회 수 1773 댓글 0

수다만리 (20) '도시의 전설' 센트럴파크의 빨간꼬리 매 

'페일 메일(Pale Male)'과 8마리의 여인들


269.JPG


뉴욕의 여름은 공원에 누워 하늘을 보기 좋은 계절이다. 일기예보에 햇님이 웃고 있는 날엔 가방 속에 얇은 블랑켓을 넣고 집을 나선다. 며칠 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취재 차 갔다가 센트럴파크로 들어갔다. 나이가 100년은 됐을 법한 고목 그림자 아래 블랑켓을 펴고 앉았다. 레이디 M의 밀크레이프 케이크를 입안으로 넣으니, 혀 위에서 사르르르 녹는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누워서 파아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니 마음도 두둥실이다. 잠을 청하려는데, "파다닥!" 소리가 들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다람쥐가 낼 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큰 동물임이 분명했다. 골든 리트리버가 지나갔나? 그렇게 방정맞게 뛰어갈 견공은 아니다. 옆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소녀들이 함성을 지르며 나무 옆으로 총총 걸어갔다. 무슨 일이길래?



1.jpg Pale Male


아이폰을 들고 뛰어가 보니, 부엉이를 닮은 큰 새 한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 '매부리'코, 흰털 가슴, 표피털이 보송보송해 보인다. 한 사람, 두 사람, 네다섯명이 몰려들어 '와우!'하며 사진을 찍는데도 날아가지 않고, 도도하게 앉아있다. 마치 영화제에서 스타들이 레드카펫을 밟은 후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듯이 자신의 '포토 세션'을 갖고 있었다. 스타의식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새처럼 보였다. 


그 도도한 새는 매부리코를 가진 새 '매(hawk)', 그 유명한 센트럴 파크의 빨간 꼬리 매(red-tailed hawk) '페일 메일(Pale Male)'이었다. 올해 나이 27세로 추정되는 '왕중왕' '매중매', 도시의 전설이다. 



14.jpg


페일 메일과 8명의 부인

First Love (1995-1997)

Chocolate (1992-1995)

Blue (1998-2001. 9.11)

Lola (2002-2010. 12)

Lima (2011- 2012. 2)

Paula (2011) 

Zena (2012)

Octavia (2012-현재)



5.jpg

Pale Male in Central Park



1991년부터 뉴욕에서 살고 있는 페일 메일, 그 이름은 조류학자이자 저술가인 마리 윈(Marie Winn)씨가 지어주었다. 머리털 색이 유난히 밝기 때문에 이름이 '창백한 수컷(Pale Male)'이 되었다. 뉴요커 페일 메일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공원에서 까마귀 떼에 밀려나고, 아파트 둥지는 철거되고, 첫사랑이 떠나고, 부인 7명과 사별하고... 헨리 8세와 6명의 왕비라고나 할까.


페일 메일이 처음 뉴욕에 나타난 곳은 1991년 센트럴파크. 백년 이상 뉴욕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야생의 매가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다. 


당시 한살 짜리 페일 메일은 마음에 드는 나무에 둥지를 지으려하다가 센트럴파크의 터줏대감 까마귀떼에 의해 쫓겨난다. 그는 겨우 한살배기였으니. 그러자 페일 메일은 사람들이살고 있는 안전한 빌딩을 찾아 헤매다 5애브뉴 74스트릿 고급 아파트(927 Fifth Ave.) 건물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아르데코 식의 이 아파트에는 예전 CNN의 MC 폴라 잔과 부동산 재벌 로버트 코헨 부부, 배우 메리 타일러 무어가 살고 있었다. 후에 폴라 잔은 의사와 바람난 후 이혼에 이르렀지만.



13.jpg


1992년 페일 메일은 첫 사랑을 만났다. 암컷 이름은 조류 애호가들에 의해 'First Love'로 불리게 된다. 페일 메일은 그녀를 어떻게 불렀을지 우리는 모른다. 그는 목청이 제법 크다. 그런데, 퍼스트 러브는 부상을 당해 뉴저지의 동물보호소(Raptor Trust)로 보내진다. 퍼스트 러브가 입원한 사이에 페일 메일은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니, 그 이름은 초콜릿(Chocolate). 여러번 자손을 증식하기를 실패한 끝에 1995년 귀염둥이 새끼 세마리를 얻었다. 새끼들은 커서 센트럴파크에 둥지를 만들고 살게 된다. 그러나, 1995년 아내 초콜릿은 뉴저지 턴파이크에서 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해 숨지고 만다.

 

천만다행으로 퍼스트 러브가 쾌유되어 센트럴파크로 돌아왔다. 퍼스트 러브와 감격적으로 재결합한 페일 메일은 친모를 여의고 계모를 둔 새끼들에게 부성애를 발휘했다. 조류 관찰자들에 의하면 아빠 매는 센트럴파크에 독립한 새끼들에게 매일 다섯번씩 먹이를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퍼스트 러브도 센트럴파크에서 숨을 거둔다. 사인은 독극물을 먹고 죽은 비둘기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비둘기와 쥐는 빨간 꼬리 매들이 애용하는 주식이다. 



17.jpg


이처럼 페일 메일은 겨우 일곱살에 두 아내와 사별한 팔자 사나운 매가 되었다. 외로운 페일 메일은 다시 짝을 찾아 나섰다. 1998년에 만난 세번째 여인의 이름은 블루(Blue). 이 커플은 2001년까지 동거동락하며 무려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런데, 블루는 9.11 이후 실종된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테러로 얼룩진 뉴욕이 슬퍼 훨훨 날아 먼 곳으로 갔을까?


이듬해 초 페일 메일은 네번째 부인이 될 롤라(Lola)를 만났다. 이들은 2004년까지 7마리를 부화했다. 그리고, 74스트릿 아파트(927 Fifth Ave.) 꼭대기층의 석조 장식물 위에 둥지를 짓고 알콩달콩 살았다. 그러나, 롤라는 2010년 12월 사라지고 만다. 페일 메일의 괴퍅한 성격에 못이겨 가출했을끼? 조류관계자들은 롤라가 실종이 아니라,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99b983892094b5c6d2fc3736e15da7d1.jpg

센트럴파크 레이크의 캐나다 거위들.



1개월 후 페일 메일은 다섯번째 여인을 찾아냈다. 이름은 리마(혹은 '진저'로 불리우기도 한다), 겨우 두살짜리 영매였다. 페일 메일은 11살이니 9년 차이다. 리마는 그해 봄 두마리의 새끼를 출산했다. 페일 메일이 7년만에 본 새끼들이었다. 리마와의 관계는 본처라기 보다는 만났다가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불안한 관계였다고 한다. 페일 메일은 리마와 살면서도 폴라(Paula)를 만나며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어린 엄마새 리마는 이듬해 2월 요절하고 만다. 화병은 아니었다. 쥐약 먹고 횡사한 쥐를 먹은 것이다. 


이어 폴라와의 관계에도 종지부를 찍은 페일 메일은 새 짝꿍 제나(Zena)를 임신시켜 3마리 새끼를 낳았다. 그러나, 제나는 2012년 9월 실종되고 만다. 다시 페일 메일은 8번째 파트너를 찾아낸다. 2012년 만난 현재 부인 '옥타비아'는 페일 메일의 라틴어로 8을 의미한다. 그후로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살아온 페일 메일은 올 봄 옥타비아와 사이에 새끼 세마리를 낳았다.


*Palemale & Octavia Babies May 1, 2017 <YouTube>



Pale-Male-nest-Murray-Head.jpg 74스트릿 아파트의 둥지


페일 메일은 연이은 아내들의 죽음 말고도 시련이 있었다. 바로 집 문제였다. 그 사건은 페일 메일을 스타덤에 올려놓게 된다.


2004년 12월 74스트릿 고급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사회를 통해 페일 메일의 둥지를 제거한다. 졸지에 홈리스가 된 페일 메일을 위해 뉴요커들이 단결했다. 뉴욕조류협회와 센트럴파크 조류 커뮤니티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 아파트에 살던 배우 메리 타일러 무어도 시위단에 합류했다. 


뉴욕 언론이 보도하면서 시민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자 당황한 아파트 이사회 측은 건물의 쇠기둥을 제거하고, 대신 페일 메일을 위해 둥지용 요람을 만들어 달았다. 여기에 페일 메일은 잔 가지를 날라다가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2005년 당시 파트너였던 롤라는 새 둥지에서 새끼를 부화하는데 여러차례 실패한다. 임신 때마다 유산된 셈이다. 원흉은 불안한 둥지에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준 둥지.  



pale-male-2.jpg 시위대에 가담한 메리 타일러 무어


이에 분노한 뉴욕조류협회 회원들이 둥지 내부의 사진을 낱낱이 찍어 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둥지를 둘러싼 스테인레스 쇠못이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고, 급기야 제거되기에 이른다. 2006년 페일 메일과 롤라 부부는 74스트릿 아파트를 포기하고, 센트럴파크웨스트의 고급 아파트 빌딩 베레스포드로 이주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베레스포드는 어디까지나 쉼터, 말하자면 커피숍 정도였지 잠을 자는 home, 둥지는 아니었다. 대낮에 센트럴파크를 횡단해 웨스트사이드에 놀어갔다가도 해가 저물면, 페일 메일과 롤라는 늘 74스트릿 아파트, 집으로 돌아갔다. 


조류 애호가들은 봄이 오면, 센트럴파크 74스트릿 인근 모델보트호수(Model Sailboat Pond)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74스트릿 아파트의 둥지에서 노니는 페일 메일과 옥타비아 새끼들을 관찰한다. 



2016-10-24 273.JPG

센트럴파크 베데스다 파운틴 조각 '물의 천사' 위의 새들. 



그러면, 페일 메일의 장성한 새끼들과 다른 빨간 꼬리 매들은 어디에?

페일 메일 주니어와 샬롯은 2005년 센트럴파크 사우스의 트럼프파크호텔에 둥지를 틀고 새끼 두마리를 낳았다. 2년 후 엔 7애브뉴 57스트릿의 빌딩으로 둥지를 옮겼다. 또한, 플라자호텔 인근에도 빨간 꼬리 매 한마리가 부화를 시도했으며, 다른 매 커플은 센트럴파크 쉽 메도우의 모서리에 둥지를 틀고, 새끼 두마리를 낳았다. 


2006년 센트럴파크 북쪽 그레이트 힐과 노스 우드엔 트리스탄과 이졸데 커플이 살다가 세인트 존 더 디바인 성당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2014년까지 무려 20마리의 새끼를 부화했다고.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 리버사이드 파크와 워싱턴스퀘어파크 등지에도 가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집 뒷마당에도 한번 큰 새가 날아와 앉았는데, 빨간꼬리 매였을지도 모르겠다. 2017년 현재 뉴욕에는 모두 14-15쌍의 빨간꼬리 매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Post-The-Legend-of-Pale-Male-POSTER.jpg


그래도 뉴욕의 스타는 단연 74스트릿 아파트의 페일 메일이다. 그가 살아온 수많은 고난의 나날들이 인생유전같기 때문이다.

대개 빨간 꼬리 매의 수명은 28세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8마리의 아내를 두고, 장수해온 매부리코 17세의 페일 메일, 뉴요커들과 동거동락해온 그가 평안한 노년을 보내며, 장수하기를 기대한다. 


벨기에 출신 프레데릭 릴리엔(Frederic Lilien) 감독은 1993년 뉴욕에 왔다가 페일 메일에 매료되어 다큐멘터리 '페일 메일의 전설(The Legend of Pale Male, 2009)'을 연출했다. 페일 메일은 뉴욕이라는 냉정한 도시의 전설이다.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