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조회 수 5794 댓글 0

 

모딜리아니 가면을 벗다

Modigliani Unmasked 

 

September 15, 2017–February 4, 2018

Jewish Museum

 

01.jpg

아프리카 에쿠아도르 기니아의 탈(왼쪽부터), 모딜리아니의 여성 두상(1915). 아프리카 아이보리코스트의 탈과 모딜리아니의 잔느 에뷔테른 초상화(1918)

 

아프리카 민속 탈을 연상시키는 인물화와 조각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그의 특별전 '모딜리아니 가면을 벗다(Modigliani Unmasked)'가 9월 15일 맨해튼 쥬이시뮤지엄(Jewish Museum)에서 개막됐다.

 

 

714.JPG

건강이 쇠약했던 모딜리아니는 돌가루 때문에 조각을 포기한다. 석회암 조각 '기둥 여인상(Caryatid, 1914)'.

 

내년 2월 4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모딜리아니의 회화와 조각 외에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의사 폴 알렉상드르(Dr. Paul Alexandre)의 컬렉션 중 초기 드로잉을 대거 미국 내 처음으로 소개한다. 

 

미술 경매에서 피카소, 자코메티, 워홀, 베이컨과 함께 1억달러대 클럽에 오른 모딜리아니는 미술사에서 위작이 많은 작가 중의 한명. 올 여름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전시회에서 1/3이 위작으로 판명되는 스캔달도 터졌다. 때문에 알렉상드르 박사 컬렉션은 '위작' 논쟁에서 자유로운 진품으로 강조하고 있다.

 

 

673.JPG

모딜리아니를 후원했던 의사 아트 컬렉터 폴 알렉상드르의 미완성 초상화(1913).

 

쥬이시뮤지엄 측에서는 모딜리아니가 스페인계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으로 그의 유대성에 또한 주목한다. 1906년 모딜리아니가 파리로 이주했을 때 드레퓌스 사건(*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누명을 쓴 채 유죄판결받은 사건)으로 반유대 감정이 팽만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활동했다는 것.        

 

 

661.JPG

열정적인 관계에 빠졌던 러시아 시인 안나 아크마도프를 모델로 한 여인 두상(1911-12).

 

이 전시는 모딜리아니가 사망한 후 임신한 채 투신자살한 애인 잔느 위베르틴보다 이전에 만났던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의 관계 및 작품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고 있다. 아흐마토바는 1910년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갔다가 모딜리아니를 소개받고 관계를 시작한다. 이들은 루브르에 이집트 고미술을 보러 다녔고, 이에 영감을 받은 조각, 회화, 드로잉을 제작했다. 

 
 
639.JPG
아이보리 코스트의 민속 탈과 모딜리아니의 드로잉.

 

'모딜리아니 가면을 벗다'는 알렉상드르 컬렉션 외에 회화와 조각 등 150여점이 테마 별로 소개되고 있다. 모딜리아니에게 영감을 준 아이보리 코스트와 에쿠아도르 기니아의 탈, 그리스 키를라데스 조각,  이집트 조각과 석비, 티벳, 태국, 캄보디아의 부처상 등을 병치하고 있다. 

 

 

 

글로벌 시각의 화가 모딜리아니 Global Pespective of Amedeo Modigliani

 

Amedeo_Modigliani_1919.jpg

 

#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터스카니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스페인계 유대인(Sephardic Jewish)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와 이모는 광산업이 파산지경에 이르자 마을에 프랑스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열고, 모딜리아니에겐 미술을 주입시켰다.

 

# 하지만, 어릴 적 늘 병을 달고 살았다. 11살 땐 늑막염, 14살 땐 장티푸스, 16살 땐 결핵으로 늘 집안에 누워있어야 했다. 이때 단테, 니체, 스피노자의 책을 읽었다. 병세가 회복되면 미술학교에 가거나 뮤지엄의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감상하며 보냈다. 고향 리보르노는 피렌체, 시에나, 루카, 피사와 가까왔다.

 

 

601.JPG

 

#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와 베니스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1906년 22세에 파리로 가서 피카소와 작가들이 몰려 사는 몽마르트의 작업실 바토 라보아에 둥지를 틀었다. 

 

#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종종 "저는 모딜리아니, 유대인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 그는 일찌기 글로벌한 시각을 가진 화가였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비서구적인 미술에 흥미를 보였다. 아프리카 탈을 연상시키는 초상화들은 그런 관심이 녹아난 작품들이다. 이집트 미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0년 만난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와는 종종 루브르의 이집트 미술을 보러갔다. 그녀를 모델로 한 드로잉에서 이집트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609.JPG

 

# 모딜리아니의 영감은 뮤지엄이었다. 특히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Musee d’Ethnographie du Trocadero)에서 이국적인 민속품을 보는 것을 즐겼다. 1878년 개관한 파리 최초의 민족학 박물관인 트로카데로는 프랑스가 약탈해온 식민지국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었다.

 

길다란 얼굴에 가느다란 코, 아몬드처럼 얄상한 눈매, 작게 다문 입술까지 모딜리아니 조각과 회화에 나타난 인물들은 원시 아프리카 부족의 탈을 비롯 에서 북아프리카, 남아시아와 태평양 군도, 그리스 키클라데스(Cycladic)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711.JPG

 

# 피카소 등 입체파와 야수파 화가들도 트로카데로 박물관의 아프리카 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피카소는 특히 아프리카 가면에 대해 "인간성과 그것을 둘러싼 미지의 적의 힘 사이의 명상같은 것으로 회화가 무엇인지를 모두 말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큐비즘으로 가는 걸작 '아비뇽의 여인들(Les Demoiselles d'Avignon)'에 응용했다. 

 

 

649.JPG

 

# 모딜리아니는 조각으로 시작했지만, 1914년 건강이 쇠약하면서 회화로 전환하게 된다. 돌 조각 작업에서 나오는 돌가루가 폐에 나쁠 뿐만 아니라 석회암을 구입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 1917년 파리의 갈러리 버르세 웨일(Galerie Berthe Weil)에서 서른세살에 모딜리아니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음모가 그려진 누드 작품이 쇼윈도우에 걸렸고, 건너편엔 경찰서가 있었다. 경찰은 누드 그림을 치우라고 명령했고, 웨일은 거부해서 체포됐다. 이 누드화가 2015년 1억7천40만 달러에 팔린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800px-Modigliani,_Picasso_and_André_Salmon-Modigliani, Pablo Picasso and André Salmon, 1916.jpg

몽마르트의 화가들. 모딜리아니, 피카소, 앙드레 살몬.

 

# 모딜리아니는 패셔니스타였다. 초콜릿 색의 코드로이 수트, 노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 같은 스타일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파리의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에 살면서 렌트를 낼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늘 멋쟁이로 입고 다녀 주목을 끌었다. 세살 위의 친구 피카소는 모딜리아니가 "옷을 잘 입을 줄 하는 유일한 남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술에 취하면 소리 지르거나, 컵을 깨고, 옷을 벗거나, 웨이터를 모욕하는 주정도 부렸다. 

 

 

modigliani-2004-01-g (1).jpg 영화 '모딜리아니(2004)'

 

# 그의 이름 아메데오(Amedeo)는 신이 사랑한 사람이라는 의미.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멜란콜리한 천사', '보헤미안 왕자'로 불리웠다. 미남에 위트 넘치고, 매력있었다. 검은 곱슬 머리에 우윳빛 피부에 깊고 검은 눈동자로 여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 모딜리아니가 신화화된 것은 요절, 임신한 애인의 투신 자살같은 그리스 비극같은 스토리에 음주, 약물, 섹스 등 현대의 록스타나 보헤미안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딜리아니를 소재로 한 영화로 프랑스 자크 베커 감독의 '몽파르나스의 연인들(Modigliani: Les Amants de Montparnasse,1958)'과 앤디 가르시아 주연 '모딜리아니(Modigliani, 2004)'가 제작됐다. 

 

 

695.JPG

 

# 모딜리아니는 1920년 결핵수막염으로 숨을 거둔다.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다음날 애인 잔느 에뷔테른(Jeanne Hebuterne)이 투신 자살했다. 8개월 임신한 몸, 그녀 나이 스물하나였다. 이들 사이엔 당시 13개월된 딸 잔느가 있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잔느는 리보르노의 친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된다. 잔느 모딜리아니는 미술사를 전공한 후 아버지에 관한 책 '모딜리아니: 남자와 신화(Modigliani: Man and Myth, 1958)'을 출간했고, 1984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Jean Cocteau, 1916, Henry and Rose Pearlman Collection, on long-term loan to the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jpg 장 콕토(1916)

 

# 프랑스 시인 장 콕토는 모딜리아니가 즐겨 그린 모델이었다. 콕토는 "그는 마치 집시 점쟁이처럼 자신의 드로잉을 사람들에게 주곤했다. 나를 그린 것이 50여점 되지만, 정작 나는 1점 밖에 없다"고 말했다. 

 

#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위작이 횡행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올 6월 이탈리아 제노아의 팔라쪼 듀칼레에서 열린 모딜리아니 전시에서 1/3에 해당하는 21점이 위작으로 판명되어 전시를 조기에 폐막했다.  

 

 

nu-couch.jpg

2015년 중국인 아트 컬렉터가 1억7천40만 달러에 구입한 '누워있는 나부(Nu Couche/Reclining Nude, 1917)'.

 

# 경매에서 모딜리아니는 1억 달러 클럽의 멤버(?)다. 세잔, 피카소, 뭉크, 자코메티, 앤디 워홀,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과 함께 미술시장에서 1억달러 넘게 거래되고 있다. 2015년 중국의 택시운전사 출신 아트 컬렉터 류이첸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Nu Couche/Reclining Nude, 1917)'를 1억7040만 달러에 구매해 화제가 됐다. 이전 모딜리아니 최고가는 7070만 달러에 팔린 석회암 여인 두상(소더비 경매)이었다. 모딜리아니 작품가가 치솟은 것은 2010년 파리 크리스티에서 열린 조각 경매에서 예상가 500-700만 달러를 상회하는 5200만 달러에 팔리면서부터다. 

 

# 모딜리아니 회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내 뮤지엄은 워싱턴 D.C.의 내셔널갤러리와 필라델피아의 반즈 파운데이션(Barnes Foundation), 12점씩 소장하고 있다.

 

 

598.JPG

 

The Jewish Museum

개방시간: 금요일-화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 45분. 수요일 휴관.
입장료: $15(성인), $12(65세 이상), $7.50(학생), 무료(18세 이하) *토요일 무료, 목요일 오후 5시-8시 맘대로 내세요

 

 

*플로린 스테타이머: 시를 그리다@쥬이시뮤지엄 

*샤갈: 사랑, 전쟁과 망명@쥬이시뮤지엄

*제 멋대로 패션 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의 세계 

*로어이스트사이드 투어 <1> 카츠델리, 러스앤도터, 테너먼트뮤지엄, 라운드 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