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Apple People
2013.02.27 19:45
마크 모리스: ‘시애틀의 빌리 엘리엇’에서 ‘현대무용의 모차르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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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Morris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이 2014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8월 7일부터 9일까지 데이빗 코크 시어터에서 신작 '아시스와 갈라티아(Acis and Galatea)'를 뉴욕 초연한다.
헨델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양치기 아시스와 바다의 요정 갈라티아의 러브 스토리를 그려낸다. 의상은 마크 모리스의 단골 파트너 아이작 미즈라히. http://mostlymozart.org/events/mark-morris-dance-group
*2014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무료 콘서트
*2014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 무료 콘서트
마크 모리스
발란신 이후 최고 안무가
지금 뉴욕에서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안무가는 누구일까?
아마도 마크 모리스(Mark Morris)일 것이다. 조지 발란신의 재능과 모차르트의 음감으로 비평과 대중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훨훨 날고 있는 인물이다.
마크 모리스는 클래식 발레에서 동유럽의 포크댄스, 그리고 모던댄스까지 무용계의 긴 스펙트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포스트모던 안무가이다. 또한, 고전 음악에서 컨트리, 재즈까지 다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 온 다재다능한 댄스메이커이기도 하다. 마크 모리스는 안무에서 지휘, 그리고 오페라 연출까지 파스텔조 경력의 스펙트럼도 넓혀가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나는 자유분방 안무가. 뉴욕에서 마크 모리스의 댄스그룹이 공연을 하면, 반드시 봐야하는 이유가 있다.
시애틀의 빌리 엘리엇
마크 모리스는 1956년 8월 29일 시애틀의 빈민촌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누나들이 발레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소년 마크는 어렸을 때 컵 속에 자신의 발을 집어넣으면서 발레리노가 되기를 꿈꾸곤 했다. 탄광촌에서 발레댄서를 꿈꾸는 소년 ‘빌리 엘리엇’을 상상해 보라.
그런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본 엄마가 있었다. 마크의 엄마는 열세살 때부터 그에게 플라멩코, 발레, 동유럽의 포크댄스 교습을 시켰다. 열일곱 살, 청년 마크는 대학교 대신 스페인의 마드리드행 비행기표를 샀다. ‘플라멩코의 나라’에서 댄스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1976년, 스무 살의 청년 모리스의 종착역은 바로 ‘꿈의 도시’ 뉴욕이었다.
1970년대 뉴욕의 무용계를 이끌어온 안무가 머스 커닝햄과 폴 테일러는 이미 50대에 이르렀다. 뉴욕은 발랄한 청년 안무가를 필요로 했다. 이때 시애틀에서 온 청년 모리스는 마치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처럼 스타성을 갖추고 있었다.
헨델의 음악에 안무의 옷을 입힌' 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는 모리스의 걸작으로 남았다.
뉴욕에 온 모리스는 라르 루보비치, 한나 칸, 로라 딘, 엘리엇 펠드와 콜레다 발칸 댄스 앙상블에서 기량을 쌓는다. 그리고, 1980년 친구 몇 명을 모아 무용단을 창단한다. 이름하여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Mark Morris Dance Group, MMDG). 그 첫 무대는 전설적인 머스 커닝햄의 스튜디오였다.
정교하면서도 시적이며, 로맨틱하면서도 풍자적이고, 자유스럽고도 유쾌한 그의 안무 스타일은 머스 커닝햄 이후 미국 무용사에 작은 획을 긋기 시작한다. 이후로 33년간 모리스는 130편이 넘는 안무를 창작하면서 발란신 이후 최고의 거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1984년 브루클린아카데미오브뮤직(BAM, Brooklyn Academy of Music)의 ‘넥스트 웨이브 페스티벌’에서 마크모리스댄스그룹(MMDG)은 ‘글로리아(Gloria)’ ‘오 랑가사이(O Rangasayee’ 및 ‘챔피온 레슬링(Championship Wrestling)’을 발표하며 모리스는 단숨에 ‘뉴욕 무용계의 무서운 아이’로 떠오른다. 이어 MMDG는 워싱턴 DC의 케네디센터에 데뷔하고 보스턴, 포틀랜드, 스폴레토페스티벌 등 미 순회공연을 가졌다. 1986년에는 비엔나로 진출하며 유럽 무대 데뷔 테이프도 끊었다.
뉴욕에서 온 ‘난폭한 안무가’
1988년 마크 모리스는 벨기에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브뤼셀의 국립오페라단 ‘테아트르 로얄 드 라모나이’의 전속 무용단으로 제안을 받은 것. 그는 MMDG를 이끌고 벨기에로 날아갔다.
그러나, 시애틀과 뉴욕 스타일의 바른 말 잘 하는 모리스는 보수적인 벨기에 언론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그에게 ‘난폭한 아이(Mr. Outrageous)’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마크 모리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작한 안무 ‘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그의 걸작으로 남게 된다.
동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어른들을 위한 코믹 현대무용으로 각색한 '하드 넛'에서 마크 모리스.
1990년 모리스는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무용수 미하일 바르시니코프와 화이트오크댄스 프로젝트를 창단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명작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을 현대식으로 패러디한 ‘하드 넛(The Hard Nut)’을 무대에 올려 찬사를 받는다.
‘단단한 호두알’의 ‘하드 넛’, 마크 모리스 버전 ‘호두까기 인형’은 동화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코미디였다. ‘하드 넛’으로 모리스는 미국의 댄스매거진이 수여하는 상도 받았다. 서러움이 많았던 벨기에 생활도 3년만에 막을 내린다. 모리스는 MMDG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마크 모리스(오른쪽)와 미하일 바르시니코프.
1993년 무용 비평가 조안 아코셀라가 쓴 전기 ‘마크 모리스(Mark Morris)’가 출간됐다. 같은 해 모리스는 미하일 바르시니코프, 첼리스트 요요마, 패션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 록가수 미셸 쇽트, 그리고 롭 와서만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력했다. 이듬해에는 보스턴 컨서바토리 오브 뮤직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MMDG는 링컨센터에 데뷔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뉴욕 스테이트시어터(현 데이빗코크시어터)에서 ‘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를 뉴욕 초연하고, 영국 에딘버그 페스티벌의 가장 큰 영예인 하마다상을 받았다. 이어 런던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려질 장 필립 라모의 오페라 ‘플라테(Platte)’를 연출했다.
BAM 건너편에 자리한 마크모리스댄스그룹 빌딩. 마크 모리스를 중국어 발음대로 쓴 '마구 모리사'도 있었다.
마크 모리스는 오랫동안 ‘무용수들의 집(home)’을 꿈꾸어 왔다. 1998년 본격적으로 댄스 스튜디오의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모리스가 발견한 장소는 브루클린 포트그린 BAM의 건너편 명당, 이를 위해 740만 달러 기금조성 캠페인을 벌였다. 그로부터 3년이 걸려 완성된 3만1천평방피트 규모의 연습실은 미국 내 최초의 안무가 스튜디오가 됐다.
2001년 BAM에서 3주간 MMDG의 20주년 공연을 열 때 이미 모리스에게는 100여 편의 안무작이 있었다. 이 해 모리스는 줄리아드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사진집과 에세이가 담긴 ‘알레그로’가 출간된다. 그리고 드디어 마크모리스댄스스튜디오를 오픈했다.
현대 무용가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모리스의 소재가 됐다. 9•11 테러 이후 모리스는 절친한 뮤지션 요요마와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테러 극복을 주제로 한 안무작 ‘V’를 구상했다. 2003년 모리스는 프랫 인스튜트(Pratt Institute)에서 주는 명예박사 학위를 하나 더 추가했다.
현대 무용의 모차르트
“모든 무용은 음악 때문에 존재한다.”
마크 모리스의 지론이다. 그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는 안무가다. 그의 안무작은 음악과 무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불협화음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집에는 늘 음악이 흘렀다. 아버지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우리는 늘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려서부터 학교 합창단에서 활동했다.”
그가 지난 30여 년간 안무해 온 작품 목록은 모차르트, 베토벤, 비발디, 브람스, 바흐, 헨델, 스트라빈스키, 스트라우스, 슈베르트, 하이든, 베르디, 도니제티, 글룩, 숀버그, 드보르작, 생상, 쇼팽, 슈만, 자크 이베르, 헨리 퍼셀, 에릭 사티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사를 관통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모리스를 ‘현대 무용계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도 MMDG의 공연을 ‘안무와 음악이 하나가 되는 공연’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Corbis
모리스의 취향이 고전 음악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그의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조시 거쉰, 윌리엄 왈튼, 존 아담스, 오노 요코 등 현대 음악가에서 컨트리 음악 작곡가인 루 해리슨과 록 스타 미셸 쇽트까지, 콜린 맥피의 발리 음악과 루마니아 민요까지 동과 서, 고전과 현대를 종횡무진 한다.
2007년 마크 모리스는 글룩이 작곡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오르페와 유리디체’를 연출했다. 지휘봉은 메트의 예술감독 제임스 리바인이 잡았다.
오페라 '오르페와 유리디체'
마크 모리스는 항상 라이브 음악으로 공연한다는 것이다. 모리스는 깡통 음악, 즉 녹음된 음악을 절대로 쓰지 않으며, 생 연주음악을 고집해왔다. 때로는 그가 직접 지휘까지 한다.
“라이브 음악을 쓰는 이유는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녹음 음악은 집에서도 들을 수 있다. 나는 공연이 리얼하고, 관객도 리얼하기를 원한다. 생음악은 절대적으로 공연의 질을 높인다.”
이를 위해 모리스는 1996년 마크 모리스 뮤직 앙상블도 창단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피아노, 퍼커션에 테너, 바리톤, 소프라노, 알토까지 14인조가 MMDG와 함께 여행하며 라이브 음악을 제공하고 있다.
마크 모리스는 무대를 오선지로 댄서들을 음표로 구사하는 것 같다. 팝음악, 바로크, 민요, 컨트리 뮤직 등 무엇이던 간에 그의 안무는 음악과 일치한다. 모리스는 무용수들을 마치 악기처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크 모리스는 안무의 공식을 깬다. 느린 음악에 빠른 댄스를, 빠른 음악에 느린 댄스가 코믹한 느낌을 자아낸다. 동물 또한 그에게 영감을 준다. ‘글로리아’에서 댄서들은 도마뱀처럼 바닥을 기거나, 나비처럼 하늘을 날기도 한다.
1993년 모리스의 전기를 출간한 비평가 조안 아코셀라는 “모리스의 관심은 사랑, 동지애, 고독, 죽음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얼핏 경박한 듯하지만, 심오한 주제를 깔고 있기에 우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 것이다.
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
*이 글은 2006년 5월 '예술의 전당'에 기고했던 글을 업데이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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