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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31) Country of Trauma, Culture of Drama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3> 한(恨)과 한국영화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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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인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한(恨)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저기 저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한국인들만 이해하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병이 있다. 바로 '한(恨)''화병(火病)'이다. 한민족은 단군조선 이래 5천년 역사 속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었다. 그 고난의 삶을 살아오면서 가슴 속에 한이 맺혔다. 역사적(외침, 내란, 식민지, 전쟁, 분단, 실향, 이산가족, 입양아  등), 정치적(독재, 부정부패, 자유 억압 등), 사회적(계급, 남존여비의 유교문화, 빈부차 등), 개인적(입시, 군대, 취업, 이혼, 효도 등) 요인 등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어 오랜 시간 가슴에 축적된 슬픔, 분노, 우울, 불안, 패배의식이다. 즉, 약자의 감정이다. 

 

이 한이 쌓이면 화병(火病, Hwa-Byung)이 된다. 화병은 이민자들에게는 더 잘 걸리는 병일 것이다.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 둥지를 트고 제 2의 삶을 시작하면서 늘 언어장벽, 문화장벽, 인종차별에 부딪힌다. 여기에 영주권, 렌트, 의료보험비, 그리고 자식과의 세대차까지 무한대의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산다.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는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서 '화병(Hwabyeong)'을 한인 이민자들에게 나타나는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거론했다. 영어로는 'Somatization Disorder(스트레스 성 신체화장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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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나운규 감독, 각본, 주연, 제작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한이 그려진 영화로 주제가 '아리랑'이 널리 퍼지게 된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한이 짙게 배인 노래다. '아리랑'은 사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춘사(春史) 나운규(1904-1937)가 스물두살에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1926)의 주제가였다. 독립운동가였던 나운규가 제작, 각본, 감독, 주연까지 겸한 작품이다. 서울 유학 중 미친 청년 김영진이 고향에 돌아온 돌아와 일제의 토지수탈 횡포에 시달리는 이야기를 통해 나라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주었다.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날부터 총독부가 전단지 1만매에 불온한 가사가 있다며 압수하고 탄압했다. 하지만, 개봉 후 주제가 '아리랑'은 방방곡곡으로 퍼지며 애국가처럼 불려졌다. 영화 '아리랑'은 그후로도 20년간 서울에서만 800여회 재상영된 민족영화로 남았다. '한국영화의 오손 웰즈' 나운규는 1937년 잡지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아리랑을 자신이 지었다고 밝혔다.

 

"내가 지엇소이다.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을 울려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어보았답니다....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아리랑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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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19년 단성사에서 개봉된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 신문광고와 제작자 박승필, 김도산 감독.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은 대표곡이 됐다.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등 전국에 70여종, 5천수가 넘는 아리랑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2012년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영화 '아리랑'의 필름은 소실됐고, 나운규는 34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는 나운규의 호를 딴 춘사영화제를 열어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영화는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 최초의 영화는 일제 치하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였다. 단성사 주인 박승필이 제작비 5천원를 투자한 '의리적 구토'는 연극 사이에 삽입하는 영화, 활동사진 연쇄극(kinodrama)의 형태였다.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정차장, 뚝섬 등지에서 촬영했으며, 계모 역은 김영덕이 여장으로 출연했다. 간악한 계모의 흉계에 맞서 싸우는 아들 송산의 이야기로 계모는 일본, 송산은 조선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주제는 권선징악이지만, 조선인들에게는 3.1 운동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영화였을 것이다. 

 

 

Country of Trauma, Culture of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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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TV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983). Photo: KBS 

 

우리 민족의 한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에서 증폭됐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은 가족들을 생이별시켰다. 그리고, 1983년  KBS-TV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특별 생방송은 온 대한민국 안방 시청자들을 눈물의 바다 속으로 빠트렸다. 혈육이 재회하며 부등켜안고 울부짖는 장면은 대본이 없는 휴먼 드라마, 극적인 리얼리티 쇼였다. 미국 TV의 '빅 브라더(Big Brother)'나 '서바이버(Survivor)'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같은 흥미 본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아픔과 상흔과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고취시킨 한국의 오리지널 TV 리얼리티쇼였다. 

 

필자는 그해 여름 KBS에서 이산가족의 신청서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삐뚤빼뚤 슬픔이 담긴 입분이, 섭섭이라는 이름도 보았다. 여의도 KBS 본관은 애타게 헤어진 가족을 찾는 벽보로 빼곡하게 메워졌다. 그해 6월부터 11월까지 138일간의 생방송과 녹화 테이프, PD 수첩, 이산가족 신청서, 사진 등 자료 2만 500여건이 담긴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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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를 다룬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Memory of Absence)'은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2020) 다큐멘터리 후보에 올랐다. 

 

2014년 4월 16일, 한국인들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목격하고 있었다. 3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고는 한인들에게 정신적 충격,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 정부와 책임자들에 대한 분노, 살아남은 이로서의 죄책감까지 겹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폭로로 이어졌고, 성난 시민들은 촛불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민주혁명을 이루게 된다.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만큼이나 처절한 현실의 드라마를 체험한 민족이다. 트라우마가 많은 우리들은 웬만한 드라마에는 감동하지 않는다. 한국의 TV 시청자들, 영화 관객들의 기대 수준은 높다. 구태의연한 드라마나 진부한 영화의 스토리로는 만족시킬 수 없다. 

 

이에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들은 더 자극적이고, 더 흥미진진하며, 반전과 스릴이 넘치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감독들은 더 빼어난 연출력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를 겨냥하며 수준을 높였고, 결국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게되지 않았을까?  

 

 

Korean Cinema I: Dark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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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쏟아진 호스티스 영화들.

 

영화는 사회의 거울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독재정권 하에서 영화인들의 표현의 자유는 억압됐고, 검열에 시달렸다.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오늘날 시네마 르네상스의 환희를 누리고 있다. 어떻게 한국에서는 그토록 뛰어난 시네아스트들(Cineastes)이 나왔을까?  지금 한국은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감독을 보유한 영화강국이지만, 한때 한국영화는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영화들이 난무한 암흑의 늪에 빠져 있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하 영화법은 우수영화에 외화수입쿼터를 배정하게 된다. 이에 국책영화(의상 안중근, 효녀 심청, 아라비아의 열풍 등)가 쏟아져 나오며, 한국영화 제작은 수입권을 따기 위해 전략적 도구로 추락한다. 한국에서 1970-80년대 20대를 보낸 7080 세대(1950-70년생)들은 군부독재, 10월 유신, 통행금지,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 교복 문화의 경직된 사회 속에서 포크송, 통기타와 맥주, 다방, 경양식집 등 낭만을 찾던 세대였다. 

 

그러면, 영화는? 'O양의 아파트' '내가 버린 여자' '아스팔트 위의 여자'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 '꽃순이를 아시나요' 나는 77번 아가씨' '여자들만 사는 거리'  등 호스티스 영화가 풍미했다.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등 한국의 대표 감독들과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의 여배우 트로이카가 호스티스라는 기이한 장르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작고한 배우 신성일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의 검열을 피하려면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상류층의 비도덕성이나 버스 차장 등 하류층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대신, 항의하지 않을 직업인 호스티스 영화가 대세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스티스 영화의 저변에는 산업화 시대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이 겪었던 노동과 성의 착취구조도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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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공화국의 1980년대는 에로영화가 봇불을 이루었다.

 

1980년대 제 5공화국은 스포츠, 섹스, 영화(Sports, Sex, Screen)의 3S 정책으로 대중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분야로 돌리며 대중의 우민화를 가속화했다. 1982년 통행금지가 37년만에 해제되면서 성매매업소가 급증했고, 스포츠 신문이 날개돋힌듯이 팔렸다. 뉴욕엔 스포츠 신문이 따로 없다. 

 

그즈음 한 스포츠 신문에서 필자에게 원고 청탁이 왔었는데 던져준 주제가 '에로티시즘과 영화'였고, 부담되어 거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건방지다"는 반응이 왔다. (그 신문사에서 여는 제 1회 뉴미디어전 프로그램 위원회에 무보수로 참가하던 때라 보상의 뜻이었던 것 같다. 결국 그 칼럼은 영화 잡지사 출신 남자 시나리오 작가가 맛깔스럽게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대엔  '애마부인'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매춘' '뽕' '빨간 앵두' '산딸기' '변강쇠'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 '뼈와 살이 타는 밤' 등 '벗기기' 위주의 에로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 세대(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들은 이문열(사람의 아들, 익명의 섬/안개마을, 구로 아리랑...)과 최인호(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겨울 나그네) 두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로 갈증을 해소했다. 사회비판 시각의 이장호 감독과 감성의 로맨티스트 배창호 감독이 쌍벽을 이루었던 시대였다. 1980년대의 간판 배우 안성기는 냉소적인 지식인, 나약한 소시민(바람 불어 좋은 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꼬방동네 사람들, 안개 마을, 고래 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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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암흑기에 빠진 80년대 홍콩 누아르와 무협영화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대학 졸업한 해에 필자는 여성단체협의회의 매스컴 모니터 요원으로 잠시 일을 했다. 당시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은 자신이 삭제한 영화 장면들을 모아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여자 주인공이 바나나 먹는 장면, 도로공사에서 바닥에 구멍을 뚫는 장면조차 성적인 행위가 연상된다며 삭제됐다. 이장호 감독은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하는데, 제목을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바꾸어야 했다. '공포'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되었기 때문이다. 

 

제 5공화국은 '공포의 가위손'으로 영화인들의 창작의욕을 위축시켰다. 1989년 동경국제영화제에 취재 갔다가 한 비디오숍에 들어갔다. 한국영화들이 거의 포르노 섹션에 비치되어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 영화가 칸, 베니스, 베를린, 아카데미를 휩쓰는 것은 실로 괄목상대할 변화다. 

 

이 틈새를 타서 홍콩영화가 한국의 영화계를 장악했다. 서극 감독을 비롯, 배우 성룡,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 임청하 등이 출연하는 무협액션, 누아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천녀유혼'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소오강호' '동방불패' 등이 한국 관객을 사로잡았다. '한류(Korean Wave)' 이전에 '홍콩 웨이브(Hong Kong Wave)'를 체험했으니, 지금은 역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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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씨받이'와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작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1987년 배우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89년 배용균 감독의 불교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로카르노영화제에 금표범상(대상)을 받으면서 영화계에 희망의 빛이 쏟아졌다. 효성대 미대 교수였던 배용균 감독이 홀로 제작, 감독,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조명까지 맡고, 무명 배우를 쓴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등대가 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88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규제가 풀리면서 한국영화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1990년대 영화인들의 억눌렸던 창작열은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임권택, 장선우, 정지영, 박철수, 박광수, 장길수, 곽지균, 이명세 등 중견 감독들이 한국영화를 이끌어갔다.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곽재용 감독의 '비 오는 날 수채화'의 조연출을 맡았던 박찬욱은 1992년 가수 이승철 주연의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 데뷔했지만, 흥행에 고배를 마셨다. 여기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홍상수, 프랑스에서 영화를 독학한 김기덕 감독이 데뷔했으며,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신예 김의석, 박종원 등이 메거폰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잡지 '로드쇼'와 '키노'를 읽으며 성장한 시네필들이 비평가 못지않은 영화지식으로 무장한 날카로운 관객이 됐다.

 

충무로의 프로듀서 시대는 신씨네(신철/ 결혼 이야기)로 시작해 우노필름/싸이더스(차승재-8월의 크리스마스)와 명필름(심재명-접속, 조용한 가족, 섬)과 시네마서비스(강우석 감독-투캅스) 등 파워 제작자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삼성, 현대, 대우 등 대기업이 영화 사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국영화는 흥행의 르네상스에 진입한다. 1990년대 중반 문화체육부(?)의 영화산업 보고서를 강한섭 교수, 김영진 평론가와 함께 쓸 때 필자가 '대기업의 영화계 진출'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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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한국영화 사상 첫 100만명의 관객을 돌파했다. "가슴을 팔로 저미는 한(恨)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장군의 아들 1, 2'로 흥행에 성공한 거장 임권택 감독은 소리꾼 영화 '서편제'로 1993년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명 이상의 관객(103만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한국영화사가 시작된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예술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판소리를 비롯, 한국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게 된다. 1990년대의 대표 배우 한석규(닥터 봉, 은행나무 침대, 초록 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는 코미디, 스릴러, 액션, 멜로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며 흥행 스타로 군림했다. 

 

 

Korean Cinema II: Renaissance 

 

2000년대엔 충무로에 대기업이 2차로 진출하며 활력을 띠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삼성, 현대, 대우 그룹이 진출했으나, 97년 외환위기의 암초에 부딪혔다. 2000년대 들어서서 제일제당(CJ 엔터테인먼트), 오리온그룹(메가박스), 롯데그룹(롯데엔터테인먼트)이 영화 제작, 투자, 배급 및 극장 등 영화 사업 전반에 뛰어들었다.  

 

2000년엔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로 조용히 데뷔했고, 이어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으로 미래의 거장으로 발돋움했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으로 재기하면서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으로 잔혹미학의 귀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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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임권택, 이창동, 김기덕, 박찬욱 감독과 배우 전도연이 칸, 베니스, 베를린의 3대 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했다. 

 

이 시기는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연달아 수상하며 'Korean Cinema'를 세계에 알렸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같은 해 이창동 감독이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으며, 2004년 김기덕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사마리아)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빈집)박찬욱 감독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올드 보이)을 거머쥐었다. 

 

2007년 배우 전도연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은 다시 200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박쥐), 이어 2010년 이창동 감독은 칸영화제 각본상(시), 홍상수 감독은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상(하하하)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우수성이 공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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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한국에선 조폭영화가 봇물을 이루었고, 1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2010년대 한국 내에서는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들이 전성기를 누린다.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비열한 거리' 등이 관객동원에 성공했다. 고개숙인 한국남성들의 열망을 반영한 것일까? 부패한 사회에 대한 응징일까? 어쨋거나 이 시기엔 1천만 관객 시대가 도래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복수관 동시 개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03년 '실미도'가 1천만 관객을 달성한 후 '태극기를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2005), 괴물(2006), 해운대(2009)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영화가 흥행을 질주하게 된다. 

 

2013년, 흥행과 작품성이 공인된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박찬욱 감독은 니콜 키드만 주연의 스릴러 '스토커', 김지운 감독은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액션 '라스트 스탠드', 봉준호 감독은 크리스 에반스, 틸다 스윈턴, 송강호와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유럽 영화제 수상도 이어졌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의 첫 대상을 품에 안았다. 술과 연애담의 작가 홍상수 감독은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황금표범상)을 수상했다. 그는 거의 매년 뉴욕영화제의 콜을 받으며 14편이라는 최다 초청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18년엔 김민희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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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2013년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반면, 흥행영화의 전선은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 '국제시장' '내부자들' '밀정' '부산행' 등 액션과 스릴러가 사수했다. 배우 송강호는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의 단역으로 출발, 이창동(초록물고기, 밀양), 박찬욱 감독(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봉준호 감독(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 등 작가주의 감독과 흥행사 김지운 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 )등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20년 넘게 톱스타로 군림하며, 한국의 국민배우가 됐다. 한편, 이병헌은 '광해, 왕이 된 남자' '남한산성' '밀정' '내부자들' 등 국내 흥행작과 할리우드 영화 'G.I. Joe: Retaliation' 'RED 2' 'Terminator Genisys' 등에 출연하며 글로벌 스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2008-2017)의 10년은 다시 문화계를 암흑으로 끌어내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을 탄압하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세월호 시국선언 문인부터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문화예술인까지 9천500여명 중에는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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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에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병자호란, 임진왜란, 광해군, 상해임시정부, 한국전쟁 등 역사물이 급증했다. 이 시기에 '최종병기, 활'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 '암살' '고지전'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밀정' '덕혜옹주' '동주' '항거' '봉오동 전투'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영화가 쏟아져 나온 것이 우연은 아닐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촛불 시민혁명으로 타올랐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2017. 3. 10)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근혜과 최순실을 비롯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 조윤선 전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몰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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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역사 100년만에 이룬 쾌거,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남북한 해빙시대가 시작됐고, 문화예술계도 안정을 찾았다. 할리우드에서 '설국열차'와 '옥자'를 만들었던 '블랙리스트' 감독 봉준호는 한국으로 돌아가 연출한 '기생충'으로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김도산 감독)가 상영된 지 100년만의 쾌거였다. 그리고, 2020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국제극영화상을 휩쓸며 아카데미상과 한국영화사를 새로 썼다. 

 

또한, 올 1월 미국의 권위있는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에서는 한국계 리 아이삭 정(Lee Isaac  Chung,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Minari)'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까지 거머쥐었다. 2020년 미국의 주류와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쌍두마차 영화제의 최고상을 한인들이 석권한 사건이다. 여기에 2월 말 제 70회 베를린영화제에서는 홍상수 감독이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품에 안았다. 오늘 한국영화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계속>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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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기생충'에 이어 한국 영화의 힘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초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후보에 올랐으며, 윤여정(Yuh-Jung Youn, 73)씨가 제 93회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윤여정씨는 한인 최초의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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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넷플릭스의 한국산 드라마 '오징어 게임(Squid Game, 연출 황동혁)'은 2021년 9월 17일 첫 방영되어 17일만에 지구촌 1억1천100만여명이 시청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10월 현재 '오징어 게임'은 2천14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여되어 9억달러의 수입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오징어 게임'은 흥행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영화협회(AFI)의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제 74회 골든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TV 시리즈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이정재), 남우조연상(오영수) 후보에 올라 있다. 시상식은 2022년 1월 9일 열린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고전영화극장(Korean Classic Film)' 무료 보기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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