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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Muse <15> Picasso and Seven Muses <상> 

모델 페르낭드, 친구애인 에바, 발레리나 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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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Self-portrait with Palette, 1906/ Young Girl with a Flower Basket, 1905/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MoMA Collection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상> 페르낭드, 에바와 올가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중> 마리-테레즈와 도라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하> 프랑소아즈와 자클린과 실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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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평생 바람둥이였다. 91세로 장수하면서 무수한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수많은 젊은 여성들과 즐겼다. 

 

애인이었던 프랑소아 질로는 피카소가 "여자는 고통의 기계이며 내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성만이 있다: 여신들과 현관 매트들이다"라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피카소는 질로가 회고록을 출판하는 것을 저지시키려다 무산되자 그녀가 낳은 자식들을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키는 복수를 했다. 

 

손녀 마리나 피카소는 '피카소, 내 할아버지(Picasso, My Grandfather)'에서 "피카소는 자신의 동물적인 성적본능에 여성들을 굴복시켰고, 길들였고, 매혹시키고, 삼키고, 캔버스에 구겨넣었다. 수많은 날 동안 그들의 에센스를 추출한 후 그들의 피가 마르면, 처분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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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 to Picasso in Vallauris, 1949 by Paul Haesaerts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코클로바, 마리-테레즈 발테르,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자클린 로크, 그리고 실베트 다비드...

피카소의 삶에서 여성들은 영감이었고, 뮤즈였으며, 예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피카소가 청색시대-장미시대-입체파-신고전주-초현실주의 등 작품 스타일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애인은 무수했지만, 수전노 피카소는 딱 두번 결혼했다. 부인은 올가 코클로바(1918-1955), 자클린 로크(1961-1973) 뿐이었다. 올가는 피카소 아들 파올로, 정부 마리-테레즈는 딸 마야, 정부 프랑소와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다. 마리-테레즈 월터와 자클린 로크는 자살했으며, 코클로바와 도라 마르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그리고, 아들 파울로는 우울증으로 인한 알콜중독에 빠졌으며, 손자 파블리토는 자클린 로크가 피카소의 장례식에 못오게 하자 자살해버렸다. 

 

뉴스 블로그 허핑톤포스트(The Huffington Post)를 창간한 아리아나 허핑톤(Arianna Huffington)은 1989년 피카소의 여자 관계를 폭로한 전기 '피카소: 창조자와 파괴자(Picasso: Creator and Destroyer)'를 출간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피카소는 지칠줄 모르는 화가이자 보헤미안이며, 성적인 새디스트이자, 배신자, 충성스러운 공산당원, 아버지이자 모순의 남자로 묘사되어 이전의 신과 같은 피카소의 이미지가 파괴됐다. 

 

 

파블로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상>

 

#1 입체파 시대: 페르낭드 올리비에 (1904-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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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Portrait of Fernande Olivier Headscarf, 1906/ Fernande Olivier & Pablo Picasso, 1909

 

 

1901년 파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가 매춘부 제르맹에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카사헤마스의 절친 피카소의 캔버스는 그즈음부터 암울한 청색시대로 들어갔다. 

 

1904년 몽마르트 근처에 늘씬하고, 거무스름한 피부에 귀족 분위기의 하녀가 살고 있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모델로 초대했고, 사랑에 빠졌다. 동갑내기 페르낭드와 피카소는 동거에 들어갔고, 그녀는 다른 화가의 모델로 일하지 못한 채 7년간 피카소만의 뮤즈가 됐다.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1881-1866)는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혼외 자식으로 부모에게 버려져 친척집에서 자랐다. 16살에 가출해 건달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학대가 계속되자 파리로 도망갔다. 남편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이름까지 바꾸어버렸다. 그녀 나이 19세, 몽마르트르에서 모델 일을 시작,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클럽에서 어울리다가 피카소를 만났다. 당시 피카소는 스페인 항구도시 말라가에서 온 무명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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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Head of a Woman(Fernande), 1909-10

 

피카소는 페르낭드를 만난 후 뒷골목의 불행한 인물들을 그렸던 청색시대(1901-04)에서 행복에 겨운 캔버스의 장미시대(1904-1906)를 전환했다. 이어 혁명적인 입체파(Cubism)로 진화하게 된다. 

 

페르낭드를 모델로 걸작 '아비뇽의 여인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MoMA 소장)'을 그렸으며, 조각 '여인의 두상'(1909-10)을 비롯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2003년 워싱턴 DC의 내셔널갤러리는 페르낭드를 모델로 제작한 60여점으로 전시회 'Picasso: The Cubist Portraits of Fernande Olivier'를 열었다.    

 

페르낭드와 피카소는 1907년 동네 고아원에서 13살 난 소녀 레이몽드를 입양했다. 어느날 페르낭드는 피카소가 그린 소녀의 누드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레이몽드를 고아원으로 돌려보냈다. 페르낭드는 이즈음 일기를 꼼꼼히 쓰고 있었으며, 훗날 회고록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세월이 흘러 화가로서 유명해진 피카소는 변했다. 무명시절 동거동락했던 페르낭드에 대한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가게 된다. 1912년 둘은 결별에 이르렀다. 페르낭드는 법적으로는 건달의 유부녀 상태였기 때문에 피카소로부터 위자료도 받지 못했다. 이후 먹고살기 위해 가게 직원, 정육점, 골동품 판매원 등 각종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모은 돈으로 미술 교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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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a Toilette, 1906. Picasso. Blue and Rose, Musée d'Orsay, Paris, 2018

 

1930년 페르낭드는 벨기에의 신문에 피카소와의 관계를 칼럼으로 연재한 후 회고록 '피카소와 친구들(Picasso et Ses Amis,1933)'을 냈다. 이에 노발대발한 피카소는 변호사를 고용해 두번째 회고록의 출간은 저지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아있는 한 책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된다.

 

페르낭드는 이때 피카소로부터 연금을 받아  생활했다. 노년에 들어서 귀가 멀고,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페르낭드는 1966년 세상을 떠났다. 피카소는 1973년 별세했다. 1988년 양자 사망 15년 후 페르낭드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회고록 제 2탄 'Souvenirs intimes: Écrits pour Picasso'가 출간됐다. 

 

*피카소의 청색시대@파리 오르세뮤지엄, 2018

*피카소의 장미시대@파리 오르세뮤지엄, 2018

 

 

 

#2 분석적 큐비즘 시대: 에바 구엘(1912-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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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 Gouel/ Picasso and Eva Gouel

 

1911년 페르낭드와 피카소는 카페에서 마르셀르 윙베르(Marcelle Humbert, 1885-1915)와 폴란드 출신 유대인 화가 루이스 마르쿠씨스(Louis Marcoussis) 커플을 만나곤 했다. 마르셀르의 본명은 이브 구엘(Eve Gouel). 페르낭드는 친구가 된 마르셀르에게 피카소에게 쌓인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이탈리아 출신 미래파 화가 오발도 오피(Ubaldo Oppi)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리바이에 마르셀르를 이용하다가 그만 피카소를 빼앗기고 만다. 

 

1912년 5월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오피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서 절교를 선언하고, 재정지원도 없다고 못박았다. 마르셀르도 마르코씨스를 떠났다. 그리고, 피카소와 마르셀르는 페르낭드를 피해 남부 프랑스로 도피여행을 떠났다. 아비뇽에서는 피카소와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된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부부와 함께 휴가를 보냈다. 브라크 부인의 이름도 마르셀르였다. 피카소의 요청으로 마르셀르는 이름을 다시 에바 구엘(Eva Gouel)로 쓰게 된다. 에바는 피카소가 입체파 콜라쥬에 전념하던 시기의 뮤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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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Woman with a Guitar/ Ma Jolie(My pretty one, 1912)/ 'J'aime Eva(I love Eva, 1912)' 

 

마르셀르는 연약하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이탈리아 화가 지노 세베르니는 마르셀르를 "중국 인형처럼 생긴 아담하고, 매운 소녀"라 묘사했다. 분석적 큐비즘 시대 피카소는 'J'aime Eva(I love Eva, 1912)' 'Woman with a Guitar/ Ma Jolie(My pretty one, 1912)' 등 캔버스에 에바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1913년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의 친가로 가서 에바와의 결혼을 승낙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피카소 아버지가 별세하고, 에바가 결핵에 걸리자 계획은 무산된다. 피카소 친구였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에 따르면, 당시 피카소의 삶은 지옥같았다고 한다. 에바 구엘은 1915년 12월 오페라 '라 보엠'의 미미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녀 나이 서른살이었다.  

 

*큐비즘 탐구 <1> 메트뮤지엄 레오나드 로더 입체파 4인방 컬렉션 특별전

*큐비즘 탐구 <2> 입체파에 대해 궁금한 것 10가지

 

 

#3 신고전주의: 올가 코클로바(1917-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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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Portrait of Olga in the armchair, 1917

 

피카소의 첫 부인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 1891-1955)는 피카소가 입체파를 버리고,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으로 전환하는 시기의 뮤즈였다. 

 

코클로바는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우크라니아의 네친에서 태어났다. 러시아발레단(Ballets Russes)의 댄서로 활동하던 올가는 1917년 5월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안무작 '퍼레이드(Parade)'를 공연하다가 피카소를 만났다. 당시 피카소는 공연 의상과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에릭 사티는 음악, 대본은 시인 장 콕토가 맡았다.

 

러시아발레단은 파리 공연 후 남미로 투어를 갔지만, 올가는 피카소와 사랑에 빠져 파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피카소의 엄마는 외국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이에 피카소는 올가를 스페인 처녀처럼 그린 그림을 어머니에게 주며 설득시켰다. 1918년 7월 피카소는 파리 러시아정교회 성당에서 올가와 결혼식을 올렸다. 시인 장 콕토와 막스 자코브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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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Dancer Sitting(Olga Picasso), 1920/ Group of Dancers. Olga Kokhlova is lying on the foreground, 1919-1920

 

 

피카소와 페르낭드의 동거가 빈곤의 시대였다면, 피카소와 올가의 결혼생활은 사치의 시대였다. 이들은 2층 전체를 차지하는 작업실에 운전수가 딸린 자가용을 굴렸다. 올가는 아파트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미고, 리셉션, 디너 파티와 사교 행사를 열었다. 올가는 고급 패션, 캐비아와 샴페인을 즐겼고, 피카소는 고급 정장을 맞추었고, 조끼 주머니에는 금시계를 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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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ga in 1920s

 

1917년 피카소는 러시아발레단과 로마 순회 공연에 갔다가 르네상스 미술과 고대 유물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화풍을 신고전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1919년 올가는 러시아 발레에 조인해 런던에서 열린 '삼각모자(Le Tricorne)' 무대에 올랐다. 피카소는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맡았으며, 그 무대 커튼이 맨해튼 씨그램빌딩의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렸다가 뉴욕역사협회 소장품으로 들어갔다.

 

*포시즌 레스토랑 피카소 러시아발레 '삼각모자' 무대 커튼 뉴욕역사협회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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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Mother and Child, 1921

 

올가는 1921년 피카소의 첫 아들 파올로를 출산했다. 행복에 겨운 피카소는 모자(Mother & Child)를 주제로 1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피카소는 차츰 눈을 밖으로 돌리며, 올가와 파올로를 등한시했다. 1927년 파리 백화점에서 만난 17살 짜리 소녀 마리-테레즈 월터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올가는 8년 후에야 친구로부터 마리-테레즈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올가는 파올로를 데리고 남부 프랑스로 이사한 뒤 이혼소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피카소는 프랑스 이혼법에 따라 재산의 절반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 때문에 올가는 1955년 칸느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법적으로 피카소의 부인으로 남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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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ga Kokhlova, Paolo, Picasso and Jean Cocteau, 1932

 

올가와 피카소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이었을까. 아들 파올로는 1975년 알콜중독으로 사망했다. 손자 파블리토는 1973년 피카소 장례식에 참석하려다가 두번째 부인 자클린 로크로부터 거부당하자 3개월 후 자살했다. 

 

한편, 손자 베르나르 루이즈 피카소는 2003년 가문의 소장품 285점을 모아 할아버지 고향 스페인 말라가에 피카소뮤지엄(Museo Picasso Málaga)을 개관했다. 손녀 마리나 피카소는 1만여점을 상속받아 미술재단을 설립했다. <계속>

 

 

*아티스트와 뮤즈 <1> 만 레이와 몽파르나스의 키키

*아티스트와 뮤즈 <8>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여인들

*아티스트와 뮤즈 <9> 구스타프 클림트와 뮤즈들

*아티스트와 뮤즈 <10> 폴 세잔과 부인 오르탕스 피케

*아티스트와 뮤즈 <11> 마크 샤갈의 등대, 뮤즈, 부인 벨라 로젠필드

*아티스트와 뮤즈 <12> 에곤 쉴레와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Wally) 

*아티스트와 뮤즈 <13>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 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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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11.03 12:11
    피카소가 일곱명의 뮤즈가 있었다니 놀라운 사실입니다. 프랑수와즈 질로는 알았지만 이렇게 열손가락에 가까운 여인을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로 했다니 이해가 잘안되네요. 피카소의 그림이 난해해서 이해가 않될 때가 있는데, 그의 사생활이 순탄치 않고 풀리지않는 실타래같아서일까 생각했습니다. 피카소 게르마늄 팔찌가 롯테 홈쇼핑에서 판매했던 게 떠오릅니다. 피카소란 이름 자체가 돈방석이라고 말씀하셨던 중학교 미술 선생님 얘기가 생각나네요. 피카소의 3편에 걸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피카소를 연재해 주시는 컬빗에 감사를 드립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