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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김미경: 딸에게 KO패 당한 날
서촌 오후 4시 (7)
그림이 뭐길래?
몇 일전 미국 사는 딸이 너무 좋은 글이라면서 읽어보라고 링크를 잡아 보내줬다.
눌러보니 영어로 11장짜리. 에구구. 읽으려다 포기했다.
컴퓨터 화면으로 긴 영어로 쓰인 글을 읽긴 너무 짜증난다.'
다음에 프린트해서 읽어야지~' 하고 넘겼다.
또 딸을 만나러 가보고 싶은 맘에 어느 여행길 비행기안에서 그렸던 그림.
다음날 “엄마! 그 글 다 읽었어?” 하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어~지금 읽으려고 해. 내일 읽으께.”
다음날 또 득달같이 메시지가 왔다. “
다 읽었어? 왜 안 읽어?”
요 다음부터는 딸과의 대화 내용이다.
나 : “있잖아. 엄마가 요새 그림을 너무 열씨미 그리다보니까 말이야.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고, 텔레비전도 안 보고. 그림 그리는 거 외에 딴 거 하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 있지?”(살짝 엉겨붙으면서 안 읽고 넘어가려는 수작 수준으로)
딸 :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야.
나 : 어어어...알아써.
딸 :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까 다른 것도 많이 해야지.
나 : 그런데 자꾸 그림만 그리고 싶어.
딸 : 그러면 그림이 좋을 수 없지. 자꾸 다른 것을 많이 해야 그림이 좋아지지. 아트는 아트만 하면서 배우는 게 아니잖아.
나 : (속으로 허걱! 하다가 반전의 기회를 찾은 듯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맞아. 아트는 아트만 하면서 배우는 게 아니야. 엄마가 그리는 그림이나 선은 엄마 인생이야.
딸 : 머라고?
나 : 엄마가 살아온 것들이 다 녹아들어 엄마 그림이 됐다고~. 갑자기 뚝딱 그림 기술 배워 그리는 게 아니란 말이지.
딸 : 그건 당연하지. 근데 엄마! 엄마가 지금까지 산 걸로 다 되는 게 아니야. 앞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고 그게 합쳐져야 진짜 그림이 되는 거지.
나 : 허걱! (완전 졌다.KO패!)
딸 : 알았지? 그림만 그리지마!!!
나 : 알아써. 고마워. (깨갱)
결국 그 11장짜리 글을 프린트해 다 읽고 그 글의 내용과 관련해서 딸과 1시간 동안 지멜 메신저로 대화를 했다.
참고로 그 글을 읽어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된다.
http://theamericanscholar.org/solitude-and-leadership/#.U9JR0PldXT8
김미경/'브루클린 오후 2시' 작가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문과와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여성신문 편집장,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2005년 뉴욕으로 이주 한국문화원 기획실에서 일했다. 2010년 뉴욕 생활을 담은 수필집 '브루클린 오후 2시'를 펴냈다. 2012년 서울로 부메랑,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2014년 3월부터 화가로서 인생의 새 챕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