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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김호봉: 이스트빌리지의 추억
Memory <9> Village People
이스트빌리지의 추억
Hobong Kim, Dream Desire Oblivion-lost time, 36x24inch, oil, 2020
뉴욕은 영화같은 도시, 이스트빌리지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동네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떠오른다.
90년대 중반 뉴욕에 왔을 때의 내가 있는 곳이 그 유명한 곳 뉴욕이구나 하고 흥분내지는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데, 뉴욕에 막상 와보니 흡사 영화의 한장면처럼 느껴젔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외화 특히 미국영화와 로큰롤과 팝송을 즐겨보고 듣곤해서 막연히 가고싶었고 직접 보고 듣고 싶은 맘 뿐이었으니 그렇게 느껴지는것은 당연한건지 모르겠다.
그곳에 가면 영화배우들과 유명한 작가들 또한 볼 수 있으리라. 정말 그떈 그 유명인들은 많은 사람들 중에 분명 섞여 있으리라 짐작하며 설레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요즘 작업에 유명 예술인이 들어가 있는 이유다. 만약 그렇지 않타고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고 싶다. 지금의 뉴욕은 그때와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똑같다. 변치않는 곳, 마음이 변치않는 우정이 느껴지는 친구처럼, 나에겐 친근한 곳이 되었다.
뉴욕대학교(NYU)를 다닐 때의 기억은 난 항상 살이 베이는듯한 칼바람의 뉴욕이 상기된다. 옷을 여러 겹으로 입어도 어느 틈에선가 찬 냉기가 들어와 몸을 덜덜 떨게만든다. 난 사진 클래스와 비디오아트에 심취해 있던 때라 밖으로 나가 사진 찍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 뉴욕의 겨울은 끔직하리 만큼 추웠다. 유학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마음만은 풍요로웠지만, 몸과 주머니는 너무나 추웠고, 텅빈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 부모님이 보내주신 학비와 생활비에 맞추어 쓰다보니 그 시기엔 아껴 쓴다고 외식이 고작 햄버거나 피자 한 조각(큰조각으로)과 콜라였다. 우리 부부에겐 거의 외식은 금기로 여긴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우리가 사는 이스트 빌리지의 모습은 평화스러웠다. 여유있는사람들은 아닌 학생 또는 가난한 싱글들의 주거지로 밤마다 떠들썩한 곳 가히 측제 분위기라 할 수 있다. 낮에는 홈리스들도 거리엔 자주 보였고, 훔친 물건들 또는가짜 시계나 액서서리를 거리에서 펼처놓고 파는 흑인들, 그러다 경찰이 오면 도망가기도하고 체포되기도하고. 그리고 몇명이 팀이 되어 춤을 추며 묘기(현재도 그런 춤꾼들이 존재함)를 부리는 흑인들도 꽤 있는 그런 재미있는 East Village 풍경이 존재했던 곳이다.
멀지않는 곳에 내가 다니는 NYU를 비롯해 쿠퍼 유니온, 프랫(Pratt) 분원, 조금 더 떨어진 곳엔 SVA(대학원에 아내가 다녔었던 곳) 등 아트 스쿨들이 있어 주변의 레스토랑의 저렴한 메뉴들이 학생들을 반기곤했다. 다한 다양한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의 음식들을 맛볼수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땐 자주 가보지 못했지만 아주 가끔 지인들이 오면 들르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인도음식을 난생처음 먹어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런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특히 날씨가 화창할 때는 NYU 도서관옆 워싱턴 스퀘어 파크 주변에는 삼삼오오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하고 강아지와 산책하는사람들, 학생들을 상대로 대마초를 파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시가렛?'하면서 호객행위를 하곤했다. 파크 벤치에는 연인들이나 시니어들 또 책을 읽고있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리고, 당시 뉴욕대학 근처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킴스 비디오(Kim's Video)라는 곳이 꽤 학생들 사이에 알려져있는 비디오숍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각종 당시 음반(LP, CD)들과 비디오 테잎(VHS) 그리고 레이저 디스크(LD)들이 가득차 있어 뉴욕대학 영화나 음악 전공자들이 드나들던, 핫한 곳이었다.나도 개인적으로 그곳에 들어가면 귀한 여러나라의 영화 포스터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컬트영화들을 겉으로라도 구경할 수가 있어 시간가는줄 모를 정도로 매력적인 나의 favorite place, 지금은 세월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됬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뉴욕의 모습, 정말 창의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환경이 좋았다. 그래서 이곳이 세계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환경이보다 창조적인 자유로운 사고가 이루어지고 결과적으로 가치있는 예술작품들의 산실이 되지않았을까? 이번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Parasite)'으로 오스카상 4개를 석권하는 자랑스런 수상장면을 보면서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오래전 미국의 기사를 소개해본다.
"미국의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에서 지난 1926년 늑대가 모두 사라진 후 먹이감이었던 엘크가 번식하면서 나무와 나뭇잎이 모두 없어지고 이로 인해 엘크의 월동지였던 사시나무가 20세기말 1%밖에 남지 않는 등 사막으로 변해버렸고, 코요테가 늘어나면서 다람쥐, 들쥐 등이 급감했다"며 "1995년 캐나다로부터 14마리, 다음해에 다시 17마리의 늑대를 들여와 방사한 결과 자연생태계는 물론 자연환경이 복원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1926년에 그곳 늑대수를 줄이기위해 늑대의 씨를 말렸던 것이었는데, 그뒤로 자연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였다. 이처럼 자연의 섭리를 어기게되면 재앙을 얻는다는 교훈을 준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 사회가 그곳의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의 예술적 표현을 억압하고 통제를 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며 언젠가는 그 것이 곪아 터지고말 것이기 떄문이다. 더 이상의 불랙리스트가 없기를 바라며...
김호봉/화가, Artcomcenter 대표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주요 미술 공모전 등에서 여러차례 수상했다.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Studio Art를 전공하면서 비디오 아트에 매료되어 졸업후 수년간 비디오 작업을 하며 전시를 했다. 이후 뉴저지로 건너와 평면작업으로 이어져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으며 현재는 코리안 커뮤니티센터와 개인스튜디오 아트컴센터(Artcomcenter)에서 성인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업하고 있다. https://www.artcomcen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