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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준 코리아: 마지막 수업 La Dernière Classe
잊혀져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 (7) 젊은 날의 초상
마지막 수업 La Dernière Cla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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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서니 뚱한 녀석들의 표정이 나를 맞는다. 아마도 매번 공원에서 진행했던 수업을 교실에서 진행한다고 하니 녀석들의 불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어렵사리 첫마디 말을 꺼냈다.
"오늘 수업, 공원이 아닌 교실에서 모이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 수업을 굳이 교실에서 진행하게 된 이유는 말이다, 오늘이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다."
녀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난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너희들을 가르쳐왔지만, 사실 난 선생님 자격증을 딴 사람도 아니고 사진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아마 너희들 대부분이 내 나이를 모를 것이다. 나에겐 너희들만한, 중학교 2학년짜리 동생이 있다. 동생이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는 해도 내 나이를 대강 짐작할 수는 있을 거야. 그래. 선생님은 스물 세 살이다. 교단이 아닌 밖에서 만났더라면 아마 형, 오빠 정도가 되었겠지. 스물 셋이라는 나이, 너희에게는 어른이지만 사회에서는 아직 아이일 뿐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졸업도 하지 않은 주제에 이렇게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지금 너희들 앞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제부터 잠깐의 옛날 이야기를 해 주겠다. 지루할 수도 있고, 제 자랑마냥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단 1초간이라도 너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이 수업을 만족하며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녀석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초리다. 지금까지 따라왔던 선생이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는 이도 아니고, 사진을 전공한 자도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 학창시절에 지금 너희들이 양아치, 혹은 날라리라고 부르는 패거리 중의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배운 술과 담배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비슷한 녀석들과 어울리며 놀다보니 수업은 뒷전, 항상 땡땡이 치고 당구장에 붙어 있기가 일쑤였지. 성적은 자연스럽게 바닥을 쳤고 학교에서는 항상 우리를 문제아 취급하고. 집에서는 공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대학 갈 거냐고 닦달하고. 그렇게 항상 내 주위를 맴도는 억압을 견디다 못해 가출도 하고. 그때는 모의고사 점수가 400점 만점이었는데 언젠가 200점이 나온 성적표를 보고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대학을 갈지 까마득하더라. 결국 마지막에는 불안감에 잠깐 동안 책을 잡았고 운이 좋았던지 수능 때는 어떻게 실력에 비해 과분한 점수를 받아서 간신히 강남대 공대에 입학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더구나."
첫 운을 떼고 나자 녀석들의 의심어린 눈초리가 호기심으로 바뀌는 듯 했다.
"그를 만난 건 대학교 첫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 적응을 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 여행이었다. 숙소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했던 나는 근처에 있던 학생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가 내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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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날
오리엔테이션 첫날 저녁, 몇몇 행사를 마치고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그렇게 기분좋게 술에 취해 복도에 나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누군가 밑에서 사발면 두 개를 들고 손짓을 했다.
"라면 먹을래요?"
아까 나를 도와줬던 자원봉사자다. 난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고 밑으로 내려가 우리 둘은 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같은 남자였지만 그의 인상은 참 호감이 갔기에, 나는 꽤나 빠른 속도로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가 나보다 한학년 선배이고 같은 학교 산업디자인과에 재학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후로 1년 동안, 깊은 우정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면 종종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대학 오면 난 모든 게 달라질 줄 알았다. 사실 달라지긴 했다. 매일 꼬박꼬박 챙겨 입어야 했던 교복의 제재로부터도 벗어났고, 술담배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험을 못 봤다고 때리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것이 완벽한 자유인 줄 알았고, 1년을 그렇게 보냈다.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 매일 수업 빠지고 잔디밭에서 술먹고 드러눕고 놀러다니고. 시험 때는 아는게 없으니 그저 백지 한 장에 편지 한 줄 써서 내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것은, 그렇게 생활해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1학년 기말고사 무렵 미술 관련 그룹 과제가 하나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공부에 손을 놓고 있었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인터넷으로 몇 가지 자료조사를 했다. 링크를 타고 링크를 타고 흘러가던 중에 한 홈페이지에 접속을 했다. 검은색 배경에 홈페이지 주인이 찍은 사진들이 수 없이 걸려있었다. 엿보는 마음으로 몰래 들춰본 일기장에는 그가 살아온 하루하루에 대한 인생철학이 꼼꼼히 메모되어 있었고. 참 멋진 사람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이런 사람은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일까. 프로필을 눌렀다.
'딸깍'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는 학교 컴퓨터실에서 홀로 싸늘한 정적을 느끼며 얼어있었다. 그다. 1년 전 오리엔테이션 자원봉사자. 사실 그것은 정말 몇 억분의 일의 희박한 확률이었다. 내가 그곳에 접속했다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문제는 그때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그 정적 속에서 깨어났고,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 나와 고작 한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멋있게 살고 있는데. 지금 난 무언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하고 제 멋대로 삶을 굴려대고있는 나는 정말 쓰레기인가. 한심했다. 죽고 싶었다.
다음날 나는 장롱 안에 있던 자동카메라를 꺼냈고,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고 내가 그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보았던 세상을, 나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HTML을 공부하면서 홈페이지를 구상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나고 해가 바뀐 1월 22일, 나는 내 사진이 담긴 내 홈페이지를 오픈했다. 그때 이룬 성취감은 내 짧은 스무 살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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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라는 이름의 예술
그렇게 시작한 사진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무심히 지나가고 흘러가는 연속된 시간들 속에서 정지된 영상을 잡아낸다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정원에 심어진 꽃들의 질서정연함 보다는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나는 잡초의 생명력이 보였고, 네온이 번쩍이는 도시의 화려함 보다는 철거되기 직전 황폐해진 골목의 슬픔이 보였다. 주위 하나 하나 어느 아주 작고 작은 것 까지도 아름답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 어쭙잖은 일상의 스케치는 인터넷을 통해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하나에 열정을 쏟아 그것을 인정받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대로라면 그 어떤 것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대학 2학년, 그래서 난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지지리도 못할 수 있었던 그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기초가 부실하다 못해 없었기 때문에 낙서만 가득한 고등학교 책들을 다시 찾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고, 수업 때마다 조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수업시작 20~30분 전에 들어가서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이 침 튀기는 것을 그대로 받아가며 수업에 열중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얼마 못가 그만둘 거라고 말했지만 난 그럴수록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만두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아서. 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말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항상 공부하는 몇몇 친구들과 쉬는시간 함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배가 고프면 야참을 시켜 잔디밭에 도란도란 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날 하루 저녁엔 막차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두꺼운 전공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정류장으로 달려가는데, 이야.. 이런 게 진짜 대학생활의 낭만이구나 싶었다. 당연히 술 마시는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간간히 한번 있는 술자리에서 마시는 술은 이전보다 몇배는 더 맛있었다. 공부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는지, 난 술자리에서 더더욱 미친 듯이 놀았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성적표를 받았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성적표에는 학비감면액 일백육십만원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장학생이 된 것이다. 그 공부 더럽게 못하던 내가. 너무 기뻐서 학교 옥상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대고 싶었다. 여기저기 자랑을 했다. 공부 잘하던 놈이 그렇게 자랑을 했으면 참 꼴값이었을텐데 그래도 꼴통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고등학교때 친구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대학가더니 뻥만 늘었다고 했다. 부모님도 믿지 못하시면서 또 기뻐하셨다.
한번 맛을 보니 이건 다시 놓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년 동안 공부하며 들여놓은 생활습관을 다음 학기, 또 다음 학기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 학기 장학금을 따냈고,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좋더라. 공부하라고 돈 주는 것도 좋고 여기저기서 인정받는 것도 좋더라. 하지만 더 좋은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긴게 너무 좋더라. 하면 된다. 하면 되더라. 그때 얻은 또 다른 자신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든든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스물두 살, 3학년 1학기를 마쳤고 그때까지도 난 계속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 틈틈이 이론도 겸하고 있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체계가 잡히지 않는 것 같다. 학원에라도 가서 이론수업을 들어볼까 생각을 하던 중, 마침 2학기 커리큘럼에 사진 디자인이라는 강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게 우리과 수업이 아니고 예대 전공 수업이다. 학점이야 어차피 자유학점으로 처리되어 이수에는 문제가 없지만 예대생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공대생이 홀로 버텨낼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종종 모델로 쓰던 여자 동기 한명을 꼬셨다. 내가 네 성적은 책임지겠노라고 근거도 없는 자신감으로 호언장담을 했다. 며칠간 녀석을 설득한 끝에 우린 수강신청을 했고 첫 수업 때 당당히 맨 앞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출석을 부르는데 다들 예대생인 것 같다. 우리에게서만 공대생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다들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건가, 슬그머니 후회가 된다. 교수님이 학생들 카메라를 이리저리 둘러보시다가 내 카메라를 집어드셨다. 당시 s2pro를 쓰고 있었는데 아는 형님에게서 중고로 물려받은 필터나 악세사리들이 본의 아니게 좀 고급이었다. 교수님이 대뜸 한마디 던지셨다.
"폼 나는건 다 달았네."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애써 웃었지만 내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짓이겨진 기분이었다. 쉬는시간, 교수님이 예대 학생들과 담배를 태우러 나가셨는데 내가 뒤에서 담배피고 있는 것을 모르셨는지 학생들에게 짤막한 한마디를 던지시더라.
"그 공대생 좀 사나 보던데."
울컥한 나는 뒤에서 대뜸 내뱉었다.
"저희집 못살아요."
교수님은 당황하셨는지 얼굴을 붉히셨고 난 그 길로 강의실로 돌아왔다. 오기가 생겼다. 좋은 카메라에 비싼 악세사리 달고 폼 재고 다니는 양아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내가 이 카메라를 잡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보여주겠다. 레포트 하나가 나올 때마다 수십 권의 책을 읽으면서 며칠에 걸쳐 페이퍼를 완성했고, 사진 한 장 찍어오라는 과제가 나오면 며칠 날을 잡아 수백 컷의 사진을 찍어 그중에 딱 한 장을 골라 제출했다.
첫 시간 나를 그닥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하셨던 교수님도 그런 나를 달리 보셨는지 수업시간마다 내가 해 온 과제물을 샘플로 사용하셨다. 그때 마침 운 좋게도, 과제로 촬영했던 사진 한 장이 동아일보 사진 공모전에서 1등을 해서 부상으로 사이판행 티켓이 나왔다. 여정을 떠나기 전, 사진은 내가 찍었지만 그 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교수님 덕분이니, 어느 날 수업을 마친 후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비록 너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만 한다면 앞으로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거다."
우여곡절이 참 많았던 사진수업. 마지막 시험날 그 동안 냈던 과제물을 받으러 갔더니 교수님이 앞으로 있을 수업에 내 레포트와 도록을 활용하고 싶다며 모두 제출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시기에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라 했다. 강의실을 나오며 처음 수업 때 내 독한 마음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래, 하면 되는구나.
3학년 2학기를 마칠 즈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나에게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당시 Paper 라는 잡지에 내 사진 몇 점이 실리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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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에서 프로페셔널로
해가 지나고 1월경,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아주 작지만 커다란 시작이. 홈페이지를 통해 장지은이라는 분께서 연락을 주셨다. 자신의 웹사이트를 위한 프로필을 촬영하고 싶은데 내가 사진을 찍어 주었으면 좋겠노라고. 나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희산이라는 분이 추천을 해 주셨다고 한다. 희산, 희산.. 누구지? 낯이 익은 이름인데. 생각해보니 하루 전날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좋은 사진 잘 보았노라고 간단한 인사 글을 남기고 내 홈페이지 주소를 메모하고 왔었는데 내 사진을 본 그분이 촬영자로 나를 추천해 주신 거라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우연은 참 기가 막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튼 장 선생님(지금은 내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을 만나서 촬영 콘티를 짜고 장소 섭외를 하고 몇 번에 걸쳐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때 장 선생님 웹사이트를 디자인하는 분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 선생님 눈이 워낙 높은 게 아닌데 사진에 너무 만족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내가 가진 모든 기술과 장비를 동원해서 촬영을 마쳤다. 그 촬영은 내가 보수를 받고 찍게 된 첫 촬영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사진 전공자도 아닌 내가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클라이언트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 선생님은 당시 쇼 호스트를 교육하는 학원에서 강사로 있었는데 그 촬영을 계기로 나에게 몇 명의 수강생들을 소개시켜 주셨다. 면접 때 프로필 사진이 필요한데 이전에 촬영한 사진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압구정의 모 스튜디오에서 15만원에 촬영한 사진이라며 그들이 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더 잘 찍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었던 것 같다.) 난 같은 금액을 나에게 지불하면 훨씬 좋은 사진을 뽑아주겠노라고 말했고 지인의 스튜디오를 대관해서 그들을 촬영했다.(당시 나는 스튜디오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때부터 난 아마추어라는 생각을 버렸다. 이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나에게 의뢰를 해온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아마추어 같은 행동을 보이거나 허점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큰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 전에 암시를 걸었다.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촬영결과 그들은 매우 만족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켜준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난 학창시절 무작정 부러워했던 프리랜서 사진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속사도, 가진 장비도 별로 없었지만 카메라 한대로 사람을 만나고 촬영을 하고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았다. 이것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고, 당시 내 삶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당시 나는 2학년 때부터 관리해온 학점 덕분에 선배들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 받고 있었다. 당시 내 점수라면 웬만한 수도권 상위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했다. 학사과정을 마치고 스트레이트로 석사, 연구원, 그리고 박사. 선배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는 꽤 안정적인 생활과 연봉을 보장하고 있었고 그렇게 젊은 나이에 박사라는 직함을 달게 된다는 것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동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군대도 미루고 학점관리에 열을 올렸다. 이대로만 가면 돈과 명예가 함께 하는 밝은 미래가 성큼 다가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난 4학년 1학기가 시작될 무렵 망설임 없이 휴학계를 냈다. 나를 이끌어 주던 선배들에게는 정말 죄송했다. 하지만 난 사진에 미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생활도 좋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뜨겁게 살고 싶었다. 돈을 조금 못 벌지언정 하루하루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고 살고 싶었다. 그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내가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휴학계를 낸 당시는 한창 총선 시즌이었는데, 당시 알던 선배의 소개를 통해 미디어 파트 팀장 직으로 한영수 전 자민련 부총재님과 한 달간 계약을 맺었다. 사실 선거 자금이 그리 녹녹치 않아 기업에 의뢰하기는 힘들고 해서 나를 불렀다고 그쪽에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난 의뢰비가 조금 적을지언정, 그 두 배, 세 배만큼의 결과물을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돈보다 가슴이 시키는 길로
그 와중에 너희들을 만났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고 많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좋은데 어떻게 하지. 오늘 수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기분이 묘하다. 조금만 더 고생했으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공원에 모여 사진 찍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너희들과 안녕을 고했으면 편했겠지만, 또 다른 후회를 남기기 싫어서 굳이 너희들을 이 교실로 모이게 했다. 하루 사진을 찍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희들 인생에 좀 더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너희들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내 작은 이기심을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들이 사진을 전공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뜨겁게 살아라.
돈 많이 버는 직업보다는 너희 가슴이 시키는 일을 택해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차가운 현실에 주저앉지 말아라.
지금 너희의 두근거리는 심장은 언제나 그것보다 뜨거울거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것으로, 너희들과 나와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상.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짧은 시간 나도 모르게 많은 정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잠깐의 정적, 한 녀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이내 그 작은 교실안에 채워진 고사리 같은 손들의 박수소리는 끝내 내 눈과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반장 윤찬이 녀석은 수업 후 내내 곁을 맴돌더니 버스 타는 길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 영원한 이별은 아닐 거야. 세상은 참 좁다는 것-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니. 다시 보자. 내 생애 첫 번째 제자들...
June Korea/Visual Artist
서울 출생. 한국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사진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 캘리포니아 Art Center College of Design(ACCD)의 학사 과정, 뉴욕 School of Visual Arts(SVA)의 석사 과정을 각각 장학생으로 수료했다. 뉴욕에 거주하며 영상과 사진을 통해 그와 인형들이 만들어내는 동화 속 세계의 이야기들을 현실 밖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미국 첫 개인전 'Still Lives: As I Slept, I Left My Camera Over There'로 데뷔했고, 미 서부와 동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지에서 전시와 출판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http://www.Jun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