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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60) K-Adoptees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31 피는 물보다 진하다 Blood is Thicker than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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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8천억 달러로 세계 10위에 랭크되어 있다. 지난해 무역규모는 9천800억 달러로 세계 7위다. 경제뿐만 아니라 한국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문화강국이다. 21세기 들어 K-팝, K-시네마, K-드라마, K-푸드, K-뷰티... 등 한류(Korean Wave)의 거센 파고가 열풍을 이어왔다. 

 

그러나, 한때 한국은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던 나라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난민 720만여명이 발생했다. 한국군과 민간인 45만여명이 사망했고, 6만여명은 전쟁고아가 됐다. 국토는 파괴됐고, 살아남은 이들은 굶주려야 했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고아들은 해외로 입양되기 시작했다. 한국이 '고아수출국' 1위라는 불명예를 달게된 것이다. 2019년까지 해외로 입양된 한인의 수는 16만여명에 이른다.  

 

입양한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새 가족을 만나 새 이름을 갖고 새 환경에서 성장했다. 대부분은 정체성 혼란은 물론, 생가족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분노, 또 생부모를 알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한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사춘기를 보낸다. 어떤 이들은 생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고, 어떤 이들은 몸 안에 용솟음치는 한민족의 DNA, 음주가무(飮酒歌舞)의 재능을 발휘해왔다. 시, 소설, 미술, 클래식, 오페라, 발레, 영화, 만화, 요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서핑 한류(Surfing K-Wave)에서 주목할만한 입양한인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성악가 앤드류 갱개스타드, 발레리나 제니퍼 월렌, 화가 사라 세진 장, 영화감독 디안 보셰 림, 요리사 대니 보윈, 그리고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다. 이중 오닐을 제외하고는 모두 필자가 뉴욕중앙일보(The Korea Daily, New York)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인터뷰한 인물들이다.  

 

 

#성악가 앤드류 갱게스타드(정우근) Bass Andrew Gangest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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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 Andrew Gangestad as Dr. Bartolo in Le nozze di Figaro Photo: Minnesota Opera 

 

"놀라운 힘과 울림" "아름답고, 바위처럼 견고한 목소리" "풍부한 베이스 음색과 균형감" "유머러스하며, 격조높은 연기" "훌륭한 파워와 아름다운 베이스 목소리를 갖춘" "한마디로 놀라운" "환상적인 피가로" "거룩한 베이스 음색" "풍부하고 거침없는 사운드"...

 

베이스(bass) 앤드류 갱게스타드(Andrew Gangestad, 한국 이름 정우근)가 언론으로부터 받은 찬사다. 갱게스타드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뉴욕시티 오페라, 뉴욕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비롯, 미네소타 오페라, 코네티컷 오페라, 켄터키 오페라, 신시내티 오페라, 미시간 오페라, 스폴레토 페스티벌 등지에서 노래해왔다

 

그의 한국이름은 정우근. 1975년 두살 때 충청북도 청원의 희망보육원에서 생활하다가 미네소타주에서 목재회사를 경영하는 샌디와 유진 갱게스타드 부부에 의해 입양됐다. 당시 소년은 결핵에 걸려 입국이 거절됐다. 양부모가 치료비를 대주어 1년 후 완쾌된 소년은 투하버로 이주했다. 그리고, 앤드류 갱게스타드라는 새이름으로 누이 4명과 함께 성장하게 된다.  

 

소년 앤디는 노래 실력을 타고났다. 그가 활동했던 투하버스쿨 재학 중엔 합창단과 뮤지컬에도 출연했다. 합창단 디렉터 질 핸슨(Jill Hansen)은 "앤드류는 이미 8학년 때부터 깊은 저음의 베이스를 갖고 있었다. 정말 좋은 목소리를 가진 전형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성악코치 역시 갱게스타드의 "매우 풍부하고, 어두우면서도 매우 균일한 목소리로그 나이에 훌륭하게 화려한 특성"에 주목했다. 

  

미네소다 주립대(덜루스)에 들어간 갱게스타드는 법률을 전공하려다가 좋은 성악 교수를 만나 진로를 성악으로 바꾸었다. 졸업 후 2000년 메트오페라 콩쿠르(Metropolitan Opera National Council Audition) 결선에 진출했고, 2005년엔 프리츠 앤 라비나젠슨재단 성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갱개스타드는 1999년 '오페라의 1번지'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입성, 베르디 작곡 '오셀로'의 로도비코 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루루' '돈 카를로' '투란도트' 등의 무대에 올랐다. 이외에도 레퍼토리도 '라 보엠' '돈 조반니' '라보엠' '피가로의 결혼' '세빌리아의 이발사' '맥베스' 등 비극과 희극에 두루 출연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2007년 1월 소프라노 홍혜경은 테너 김우경과 메트오페라 127년 역사상 최초로 '라 트라비아타'의 남녀 주역으로 공연한 아시안 성악가로 기록됐다. 그해 6월 갱게스타드는 입양될 무렵 찍은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32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도 모국을 찾는 다른 입양 한인들처럼 "왜 날 버려야 했는지" "내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형제들은 있는지" 궁극적으로 자신 속의 한국인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갱개스타드는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정-우-근. 그는 자신이 자랐던 희망보육원에서 원생들에게 오페라 아리아를 들려주었다. 한국 방문중 갱게스타드는 미 대사관에서 '비목'과 '뱃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해 여름 갱게스타드는 메트오페라 인더 파크(Met Opera in the Park)'의 '라 보엠'에서 미미 역의 소프라노 홍혜경씨와 노래했다. 그는 철학자 콜린느 역으로 분해 "낡은 외투여"를 노래했다.

 

갱개스타드는 미조리주 캔사스시티에 살며 활동하고 있다.

https://www.operabase.com/artists/andrew-gangestad-1018/en

 

 

#발레리나 제니퍼 월렌(남지연) Ballet Dancer Jennifer Wha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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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ifer Whalen in ABT's "Swan Lake"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정기 시즌을 여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er)에서도 한인들의 활동이 눈부시다. 2012년 서희(Hee Seo)가 아시안 최초의 수석 무용수가 됐고, 2020년엔 안주원(Joo Won Ahn)이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다. ABT 수석 무용수 16인 중  두명의 아시안 댄서가 한인들인 것이다. 마린스키 발레단 최초의 아시안 수석 무용수 김기민(Kimin Kim)도 게스트 아티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서희와 김기민은 2015년 '라 바야데르(La Bayadere)'에서 니키아와 솔라로 공연하며 ABT 75년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남녀 주역이 됐다.

 

2005년 서희가 ABT에 입단하기 전 군무 무용수(Corps de Ballet)에는 입양한인 제니퍼 월렌(Jennifer Whalen,  한국이름 남지연)이 활동하고 있었다.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난지 3개월만에 미네소타의 입양기관을 거쳐 캘리포니아 벤추라의 아이리시계 미국인 부부에 외동딸로 입양됐다. 7살 때 처음 발레를 본 후 곧바로 샌프란시스코 발레, 키로프 아카데미와 런던의 로얄발레 스쿨에서 수련했다. 

 

제니퍼 월렌은 유스아메리칸 그랑 프리(Youth American Grand Prix)에서 금메달, LA 퍼포밍아트 스포트라이트 1위를 수상했다. 2002년 17세에 ABT에 견습으로 입단, 이듬해엔 군무 발레리나가 됐다. 서희가 입단한 후엔 돌솥 비빔밥, 갈비, 김치 등 한국음식을 더 즐기게 됐다. 

 

2008년 월렌은 ABT '돈키호테' 한국 공연을 기해 생모를 찾아보았다. 당시 월렌은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동방사회복지회 입양 서류를 들고 있었다. 입양 번호 ‘85C-283’,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 출생시간 ‘1985년 1월 18일 오전 9시 44분’, 생모이름 남성철, 18세의 미혼, 세자매 중 막내'라는 서류를 들고 찾아 나섰다. 하지만, 생모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월렌은 한국에서 생모 남성철씨를 26년만에 만났다. ABT의 한국 투어에서 상봉한 모녀는 꽃다발과 선물을 교환하고, 한식을 먹으며,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의 상봉을 보도한 뉴욕 데일리 뉴스에 따르면, "막상 엄마를 만났지만, 통역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슬펐다. 엄마와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 가장 궁금했다"고 말했다. 남성철씨는 "딸을 입양 보낸 후 너무 힘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자라주고, 딸의 멋진 춤까지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월렌의 생부는 20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30대엔 교사를 꿈꾸던 제니퍼 월렌은 ABT 생활 15년을 접은 후 현재 코네티컷주 그리니치발레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가르치고 있다.

https://www.instagram.com/jensara1/?hl=en

 

 

#화가 사라 세진 장(장세진) Artist Sara Sejin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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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 Sejin Chang (Sara van der Heide), Four Months, Four Million Light Years, 2020 

 

2007년경 필자가 뉴욕에 거주작가로 체류중이던 그녀를 만났을 때 이름은 사라 반 더 하이데(Sara van der Heide)였다. 그는 이제 사라 세진 장(Sara Sejin Chang)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그때에는 화가였지만, 지금은 퍼포먼스와 영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그때는 자신의 입양 기억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했지만, 지금은 입양산업과 식민지 역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이데는 1977년 부산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네덜란드는 베르메르, 렘브란트, 반 고흐의 나라다. 또한, 오래 전 '하멜 표류기'의 헨드릭 하멜이 난파 사고로 조선에13년간 체류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사라 세진 장은 1997년 뉴욕주립대(SUNY, 퍼체이스)에 교환학생으로 수학했으며, 암스테르담 파인아트아카데미에서 아트&드로잉 역사교육을 전공했다. 이어 네덜란드 파인아트&디자인 아카데미(AKI)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6-17년 뉴욕의 인터내셔널스튜디오&큐레이터 프로그램의 거주 작가를 지냈으며,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와 암스테르담, 독일 그로닝겐의 미술학교에서 가르쳤다. 2009 인천여성미술 비엔날레(International Women Artist’s Biennale, Incheon), 2012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2020 베를린 현대미술 비엔날레(Berlin Biennale for Contemporary Art) 등에 참가했다. 

 

제 11회 베를린 현대미술 비엔날레 참가작 '4개월, 4백만 광년(Four Months, Four Million Light Years, 2020)'은 자신의 정체성과 국제 정치 및 식민지 역사에 대해 탐구한 작품이다. 

 

사라 세진 장은 부산의 고아원에 버려진 후 네덜란드로 입양됐던 자신의 이야기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점을 폭로한다. 한국의 해외입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 입양아들의 실종사건, 서류위조, 아동 인신매매 등을 지적하며, 선교사들에 의한 샤머니즘 문화의 폭력적인 근절과 현대 국가간 입양의 범죄성을 드러냈다. 

 

그는 어떻게 샤머니즘에서 모티프를 찾았을까? 미술 웹진 오큘라(ocula.com)와의 인터뷰 'Sara Sejin Chang (Sara van der Heide): Healing Colonial Adoption Narratives'에 따르면, 사라 세진 장은 2018년 한국 체류중 국가무형문화재(제 8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예능보유자)인 만신(Ten Thousand Spirits) 김금화(1931-2019)씨를 만났다. 그는 사라 세진 장에게 "한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무당이 됐을 것"이라며 "무당이 되는 것이 너의 운명이지만, 아티스트가 되는 것도 좋고, 삶을 그 방식으로 완수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베를린 비엔날레에 선보인 작품 '4개월, 4백만 광년'(35분)엔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16개의 직물과 종이 배너, 수채화, 북, 목소리, 자장가, 합창 등이 등장한다. 

 

네덜란드에서 유색인종 입양인으로 자라면서 사라 세진 장은 한때 그 나라의 황금기가 사실은 가장 폭력적인 시대였다는 것, 서구 사회의 아시안에 대한  우월의식을 체험했다. 이것은 입양한인, 여성작가, 아시안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통, 상실, 트라우마이기도 하며 식민지 역사에 대한 고발이다. 이를 표현하는 것은 마치 무당이 굿을 하듯이 예술로서 승화하는 셈이다. 작품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치유의 과정이기도할 것이다. 사라 세진 장은 이 작품을 지구촌 입양 가족들에게 헌사하고 있다.  

https://www.sarasejinchang.com

 

 

#요리사 대니 보윈 Chef Danny Bow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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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ny Bowien with his wife and fater at James Beard Foundation Awards in 2013/ Mission Chinese Food in East Broadway and Mapotofu

 

뉴욕 모모푸쿠(Momofuku)의 데이빗 장(David Chang, 장석호), LA 고기(Kogi)의 로이 최(Roy Choi), 켄터키주 루이빌 610 마그놀리아의 에드워드 리(Edward Lee), 샌프란시스코 베누(Benu)의 코리 리(Corey Lee)와 함께 미국 내 한인 셰프 열풍을 일으킨 대니 보윈(Danny Bowien)은 입양 한인이다. 

 

본명은 제임스 다니엘 보윈, 1982년 한국에서 태어나 3개월만에 오클라호마시티의 보윈 가정에 입양됐다. 양모와 함께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랐고, 13살 때는 베트남 식당에서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교시절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다. 

 

보윈은 19살 때 아시안이 많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난생 처음 한국 음식의 맛을 봤다. 샌프란시스코의 요리학교에서 수련한 후 '요식업의 메카' 뉴욕으로 이주해 트라이베카 그릴, 수밀레 등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이탈리아 식당에서 일하면서 2008년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열린 페스토(pesto: 베이질, 마늘, 잣, 치즈, 올리브유,  소금을 넣은 녹색 소스)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대니 보윈은 2010년 안소니 민트와 SF 차이나타운에 팝업 '미션 차이니즈 푸드(Mission Chinese Food)'를 시작하며 사천요리의 귀재로 등극하게 된다. 이탈리아인도, 중국인도 아닌 입양 한인이 중국식당에 도전한 것이다. 이어 데이빗 장이 한국요리보다 일본 라면(Momofuku Noodle)과 중국식 돼지고기 샌드위치 포크 번(Pork Bun)으로 스타덤에 오른 것과 유사한 케이스다. 데이빗 장, 대니 보윈의 공통점은 국적을 고수하는 요리가 아니라 '맛있는 음식' '미국화한 동양음식'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보윈은 2013년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에 미션 차이니즈 푸드 2호점을 열었다. 콘비프와 쿵파우 치킨, 베이컨과 가래떡의 콤보 등 대니 보윈의 도발적인 레시피는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피트 웰스를 매료시키며 2스타를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 2013년 '요식업계의 오스카'로 불리우는 제임스비어드재단상(James Beard Foundation Awards)에서 데이빗 장은 최우수 요리사상(공동 수상), 대니 보윈은 신인 요리사상을 거머쥐게 된다. 두 요리사가 한국인들의 재능을 널리 알린 것 뿐만 아니라 일본 라면과 중국 사천요리를 미국인들에게 보급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만 하다. 전통 레시피를 고수하기 보다는 융통성있게 믹스&매치하는 비빔밥 정신과 한민족의 입맛 DNA 혈통이 흐르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해 가을 코로나 팬데믹으로 맨해튼 지점은 폐업했지만, 브루클린 부쉬윅과 샌프란시스코 본점은 영업 중이다. 대니 보윈은 입양 한인 영미 메이어씨와 결혼, 아들 민오(Mino)를 키우고 있다. 

https://www.missionchinesefood.com

 

*사천요리의 풍운아 대니 보윈 

*Beyond BBQ and Kimchi: Five Korean-American Star Chefs at Inside Korea’s Table

 

 

#영화감독 디안 보셰 림(강옥진) Filmmaker Deann Borshay L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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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Matter of Cha Jung Hee, 2010/ Deann Borshay Liem with her adoptive mother

 

영화감독, 제작자, 작가 디안 보셰 림(Deann Borshay Liem)은 영화감독 데뷔작이 자신의 입양 미스테리를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1인칭 복수(First Person Plural, 2000)'였다. 1966년 8살 때 차정희의 여권을 갖고 샌프란시스코의 가정에 입양된 디안 보셰 림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입양기록을 조사하던 중 본명이 '강옥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아원에서 서류를 위조해 입양시킨 것이다. 입양 자체로 인한 정체성 혼란에다가 설상가상으로 타인의 이름으로 미국에서 사는 운명이 된 것이다. 

 

그의 양부는 디안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메리칸 걸'로 성장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버클리대 심리학과 출신 디안 보셰 림은 이번엔 자신이 카메라를 들었다. 양부모를 동반해 한국으로 가서 정체성 찾기에 나섰다. 디안 보셰 림은 군산에서 마침내 친가족과 상봉하게 된다. 소통되지 않는 통곡과 참회의 눈물 바다같은 다큐멘터리다. '1인칭 복수'는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됐고,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으며, 에미상 최우수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10년 후 디안 보셰 림 감독은 제 2탄을 연출한다. 운전면허증 등 자신의 법률 문서에 따라다니는 차정희라는 이름과 생년월일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진짜 차정희를 찾아 다시 한국으로 갔다. 다큐멘터리 '차정희에 관하여(In The Matter of Cha Jung Hee, 2010)'는 차정희를 만나는 과정에서 입양의 사회적 문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든 '비밀과 거짓말'을 알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는 디안 보셰 림 자신의 테라피 이자 힐링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는 LA아시안패시픽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감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2013년엔 램제이 림(Ramsay Liem) 보스턴대 심리학과 교수와 분단과 이산가족 이야기를 담은 ‘잊혀진 전쟁의 기억(Memory of Forgotten War)'을 공동 연출했다. 디안 보셰 림은 선댄스인스티튜트 펠로, 록펠러 영화/비디오 펠로십을 받았다. Korea Policy Institute 회장 폴 림(Paul Liem)과 결혼했다. https://www.mufilms.org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Violist Richard Yongjae O'N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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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Yongjae O'Neill and Ensemble DITTO

 

올 3월 제 63회 그래미상(Grammy Awards) 시상식에서 한국계 클래식 뮤지션이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Richard Yongjae O'Neill)이 음반 "Theofanidis: Concerto for Viola and Chamber Orchestra"로 최우수 클래식 솔로연주상(Best Classical Instrumental Solo)을 수상한 것이다. 2006년, 2010년 후보에 올랐고, 세번째 노미네이션 후 수상에 이르게 됐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1978년 워싱턴주 세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콜린 오닐(한국이름 이복순)씨는 네살박이 한국전쟁 고아로 1957년 미국에 입양됐다. 엄마는 어릴 적 열병을 앓고 정신지체가 되었고, 미혼모로 리처드를 낳자 아기는 외조부모가 돌보게 된다. 아이리시계 외할머니는 손자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5살 때 바이올린을 선물했고, 10년 동안 왕복 4시간을 운전해가며 레슨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오닐은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로 진학하면서 비올라로 전향했는데, 바이올린과 첼로보다 낯선 느낌, 엄마 목소리처럼 편안한 악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이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음대를 거쳐 줄리아드 음대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동 대학원을 거쳐 줄리아드에서 비올리스트 최초로 아티스트 디플로마(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마쳤다. 한국 이름 '용재(勇才)'는 재학 시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강효 교수가 지어주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2001년 강효 교수가 이끄는 세종솔로이스츠를 비롯, 링컨센터 체임버뮤직소사이어티, 에네스 쿼텟 등지에서 연주했으며, 2006년 링컨센터의 에버리피셔 커리어 그랜트(Every Fisher Career Grant)를 받았다.

 

2004년 오닐은 어머니의 가족을 찾기위해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출연했다. 그의 삶이 집중 조명된 후 오닐은 스타덤에 올랐다. 2007년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과 실내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체임버 앙상블 디토(Ensemble DITTO)를 결성(스테판 피 재키브-바이올린/ 마이클 니콜라스-첼로/지용-피아노), 2019년 해산할 때까지 12년간 전국 순회공연에 도쿄, 오사카, 상하이까지 진출하며 '클래식계의 아이돌 앙상블'로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 오닐의 활동은 음악 외에도 눈부셨다. 커피 광고모델, 한국적십자사 홍보대사, UN 세계평화의 날 홍보대사, 한국스페셜올림픽위원회 홍보대사 등을 맡았는가하면, MBC '무릎팍도사'에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출연하며 책(리처드 용재 오닐의 공감 DITTO, 나와 당신의 베토벤)도 출간했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 한국과 미국 사이,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한국에서 '용재'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덕수궁 돌담길과 명동을 배회하고, 불고기, 잡채와 불고기의 맛에 푹 빠졌다. 

 

오닐은 2019년 한국에서 디토와의 여정을 마감하고, 체임버 앙상블 타카치 쿼텟(Takács Quartet)에서 연주하고 있다. 

https://www.richard-oneill.com

 

 

한국은 여전히 고아 수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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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 중 4명 해외로…‘고아 수출국’ 오명 여전 / KBS 2021.10.18. <YouTube>

https://youtu.be/w7PrQazxvqM

 

"버림받은 생명들의 양부모를 찾아줌으로써, 하나의 인간이라도 되도록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1968년 대한뉴스-

 

한국전쟁 후 정부는 고아와 혼혈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입양을 장려했다. 1955년 오리건주의 해리와 버사스 홀트(Harry and Bertha Holt) 부부가 전쟁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홀트국제아동서비스(Holt International Children's Services)를 시작하게 된다.

 

알버트 C. 고(Albert C. Gaw)는 디안 보셰 림의 자전전 다큐멘터리 '1인칭 다수(First Person Plural, 2000)'에서 1955년부터 1966년 사이 미국에 입양된 한인 어린이 6천293명 중 41%가 백인과 한인 혼혈, 41%가 한인, 나머지는 흑인과 한인 혼혈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 미국남성과 한국여성이었다. 즉 혼혈아들은 '아버지의 나라, 미국'으로 보내지면서 한국인들에겐 '단일민족' '순수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뿌리 깊게 있었고, 타민족과 피가 섞이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단일민족'이란 용어는 2007년 국사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했지만, 지금도 미혼모의 버려진 아기들은 속속 입양되고 있다. 한국의 입양아수는 2011년 이래 감소추세다. 연합뉴스가 보건복지부의 '입양아동 법원허가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국내, 국외 입양아 총수는 2천464명이었다. 이후 2015년엔 1천57명, 2020년엔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492명으로 나타났다. 국내입양 비율은 2010년 이전 31%에서 2011년엔 62.8%, 2013년엔 74.4%까지 달했다. 2020년 국내 입양은 52.9%, 국외입양은 47.1%로 해외입양 수치를 능가했다. 이는 2013년 제정된 입양 특례법의 영향으로 보인다.  

 

KBS-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한국의 해외입양자수가 여전히 많은 이유 중 하나로 수수료를 꼽는다. 한국내 입양 수수료 수익은 1명당 270만원, 해외 입양은 최대 2천200만원으로 10배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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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경이 봉쇄됐지만, 한국의 해외 입양아수는 오히려 증가, 세계 7위에서 3위로 올랐다. 비정부기구 국제소셜서비스(ISS, International Social Service)와 국제참고센터(IRC, International Reference Center)의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국제입양자수 1위는 콜롬비아(387명), 2위는 우크라이나(277), 3위는 한국(266)이었다. 

 

미국은 해외입양자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미 국무성의 '2019 해외입양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 on Intercountry Adoption)'에 따르면, 미국내 해외입양아 수는 중국이 819명으로 최다였다. 2005년 미국의 중국 입양아수는 7천903명에 달했었다. 국가별로 중국에 이어 우크라이나(298), 콜롬비아(244), 인도(241), 한국(166), 불가리아(134), 아이티(130), 나이지리아(116) 순이었다. 2021년 보고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국(202), 우크라이나(192), 콜롬비아(137), 인도(103), 불가리아(99), 아이티(96) 등은 수치가 감소한 것을 밝혔지만 , 한국(188)은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여전히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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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6.26 15:16
    입양아 6인의 기사를 읽고 이들의 재능을 발굴해서 북돋아주고 뒷받침을 해준 양부모들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순간에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이들을 미국과 네델란드에 입양해서 예술과 기타분야에서 세계적 인물로 키웠다는 사실에 대해 한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이 서구에 입양이 안되고 고아원에 머물렀으면 어떻게 됐을까? 입양이 된 순간부터 운명이 바뀌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내가 이들을 입양했다고해도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로 키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경제적 부담은 물론이고 많은 장애가 가로놓여서 이것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입양이란 찰나에 생이 도약을한 이들,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신의 가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이들을(비올리스트 오닐을 빼고)인터뷰하고 기사를 쓴 컬빗에 감사를 드립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