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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Food Obsession
2021.08.07 15:07

위대한 음식 열정 (21) 앤디 워홀의 달콤한 욕망

조회 수 435 댓글 1

The Great Food Obsession <21> Andy Warhol's Endless Sugar Cravings 

 

Andy Likes It Sweet!

앤디 워홀의 달달함에 대한 뿌리 깊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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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수퍼볼 버거킹 광고에 나온 앤디 워홀의 햄버거 먹는 비디오/ 앤디 워홀의 작품들

 

 

"나는 커다란 크기의 고기를 사서 저녁 식사용으로 요리하다가 완성되기 전 분해해버린다.

그리고, 대신 빵과 잼으로 저녁식사를 할 것이다. 내가 단백질을 요리하는 동작은 농담일 뿐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설탕뿐이다."

-앤디 워홀, The Philoso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 Back Again, 1975-

 

 

세렌디피티 3, 앤디 워홀 스페셜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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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rrozen Hot Chocolate, Serendipity 3, NYC

 

'팝의 황제(King of Pop)'이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이었다면, '팝아트의 황제(King of Pop Art)'는 앤디 워홀(1928-1987)이었다. 캠벨 수프, 코카 콜라, 바나나 그림에서 햄버거 먹는 비디오, 45분짜리 다큐멘터리 'EAT'(1963)까지 워홀의 음식에 대한 열정은 강박관념에 가까왔다. 

 

지난 8월 6일 앤디 워홀이 살았더라면 93세가 됐을 것이다.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디저트 전문 레스토랑 세렌디피티 3(Serendipity 3)는 워홀이 무명시절부터 백만장자 화가로 숨을 거둘 때까지 즐겨 찾았던 곳이다. 세렌디피티 3는 워홀에게 '비공식 사무실'로 불리울 정도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긴 휴면 후 지난 달부터 오픈한 세렌디피티 3는 6일 단골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탄생일을 기해 그가 즐겼던 특별 메뉴 'Andy Warhol Special)를 제공했다. 사워크라우트를 올린 뉴욕 스타일 핫도그, 프렌치 프라이, 그리고 세렌디피티 3의 간판 메뉴 프로즌 핫 초콜릿(Frrrozen Hot Chocolate)이다. 가격은 $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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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and Stephen Bruce(founder of Serendipity 3), ca. 1962. Photo: John Ardoin/ Serendipity 3

 

워홀은 1950년대 일러스트레이터로 고군분투할 때부터 세렌디피티 3를 드나들며, 음식 값 대신 구두 그림을 주기도 했다. 워홀이 가장 좋아했던 메뉴 프로즌 핫 초콜릿은 14종의 코코아를 얼음과 혼합해 휩드 크림과 초콜릿을 저며 토핑으로 올린 디저트. 

 

세렌디피티 3엔 앤디 워홀이 차지하던 테이블이 있으며, 그 위엔 브루클린 조각가 엘리엇 아킨의 워홀 조각이 램프처럼 매달려 있다. 워홀이 폴라로이드로 찍은 셀피들도 몽타쥬로 벽을 차지하고 있다.  

 

1954년 오픈한 세렌디피티 3엔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빌 클린턴도 다녀간 레스토랑이다. 할리우드에선 존 쿠삭과 케이트 베켄세일이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 '세렌디피티 3'(2001)도 나왔다.  

 

*세렌디피티 3의 컬트 디저트 프로즌 핫 초콜릿

http://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3597190

 

 

앤디 워홀 뉴욕 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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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ørgen Leth, Andy Warhol Eating a Hanburger, 1981, 4:15 min

 

지난해 미국 TV 프로그램중 가장 광고비가 비싼 수퍼볼(Super Bowl)에 앤디 워홀 버거킹(Burger King) 광고가 나와 #EatLikeAndy가 소셜미디어에서 화제였다. 이 광고에서 사용한 비디오는 1982년 워홀이 버거를 먹는 모습을 덴마크 영화감독 조르겐 레스(Jørgen Leth)가 찍은 것이다. 

 

햄버거, 캠벨 수프, 달달한 디저트 등이 워홀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을까? 

 

워홀은 대공황이 터지기 전해인 1928년 피츠버그의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 아버지는 광부였고, 가난했던 집에는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소년 워홀은 늘 케이크, 빵, 과자를 실컷 먹는 꿈을 꾸었다. 그의 어릴 적 환상은 "집에 가정부를 두는 것이 아니라 캔디를 먹는 것"이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그 환상은 캔디를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으로 성숙해졌다. 1975년 출간한 에세이집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 Back Again)'에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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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From A to B and Back Again,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2018

 

워홀은 낮에는 그의 스튜디오 팩토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찍고, 자신이 창간한 잡지 '인터뷰'를 편집했으며, 밤에는 친구들과 파티를 열고, 클럽에 다녔다. 당연히 아침 잠이 많았다. 대개 아침식사는 정오가 지나야 켈로그 콘플레이크(Kellogg’s Corn Flakes) 한 그릇으로 시작했다. 이후 페퍼민트 티와 잉글리시 머핀 토스트에 마말레이드 잼을 발라 먹었다. 

 

워홀은 바나나 말고도 체리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체리을 한 그릇 다 먹은 후엔 항상 씨앗으로 가득한 그릇을 숨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가 체리를 몇개를 먹었는지 정확히 셀 수 있었기 때문. 씨앗 한개짜리 과일은 워홀에게 늘 짜증을 유발했다. 그래서 대신 건포도를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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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로버트 인디애나가 먹는 모습을 찍은 45분짜리 '먹다(Eat, 1963)'/ 시인 존 조르노가 자는 모습을 5시간 21분간 담은 자다(Sleep, 1964).

 

가난한 이민자 가정의 소년에서 뉴욕의 톱 아티스트로 성공을 거둔 앤디 워홀의 식생활은 극단적이었다. 그는 뉴욕 미술계와 상류사회 인사들과는 프랑스 식당 라 그레누이(La Grenouille)와 루테스(Lutèce, *폐업)를 즐겨 찾았다. 그리고, 메뉴에 있는 음식을 모두 주문했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건드리지 않은 음식들은 싸갖고 나가 거리에 놓았다. 홈리스나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한 것이다. 대신 자신은 날씬함을 유지하고, 음식은 낭비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는 "앤디 워홀 뉴욕 다이어트(The Andy Warhol New York City Diet)"라고 불렀다.  

 

달콤한 간식에 대한 그의 갈망은 수집벽에서도 나타난다. 워홀은 평생 벼룩시장과 중고품 가게를 드나들며 'Aunt Jemina' 베이킹 믹스 깡통 175개, 각종 모양의 도자기 비스킷 통을 모았다고 한다. '앤디 워홀의 철학'에는 스페셜 케이크 레시피가 나온다. 두 조각의 빵 사이에 초콜릿을 끼우면 샌드위치가 됩니다. 그것이 케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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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해런 감독의 'I SHot Andy Warhol'(1996) 포스터/ 앨리스 닐의 앤디 워홀 초상 Alice Neel, Andy Warhol, 1970

 

1968년 6월 워홀은 자신의 스튜디오 팩토리(The factory)에서 페미니스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의 총격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정신분열증상이 있던 솔라니스는 워홀이 자신의 삶을 망쳤다며 저격했다. 이 사건을 토대로 메리 해런 감독의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 1996)'이 제작됐다.

 

총격 사건 이후 워홀은 평생 의료용 코르셋을 차고 살아야 했으며, 병원과 의사 공포증이 생겼다. 아버지로부터 취약한 쓸개를 물려받은 워홀은 1970년대 제거수술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거부했다. 1980년대에도 쓸개질환으로 피해야할 음식인 견과류와 초콜릿을 계속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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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y Warhol, The Last Supper, 1986

 

1987년 2월 워홀은 미드타운 일식당 니폰(Nippon)에서 저녁식사 후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 증상을 '쓸개 발작'으로 간주하고, 정크푸드를 포기하고, 담낭 수술을 받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뉴욕 호스피털에 입원했다. 괴저(Gangrene)로 가득한 쓸개는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워홀은 어느날 밤 수면 중 불규칙한 심장박동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의료과실로 고소했고, 병원 측과 신속한 합의금을 받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피츠버그 외곽 베델파크의 카톨릭교회 묘지에 그가 발행했던 잡지 '인터뷰(Interview)' 1부, Interview가 새겨진 티셔츠 하나, 에스테 로더 향수 'Beautiful'과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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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회고전@휘트니뮤지엄, 2018

*영화감독 앤디 워홀: 인스태그램, 리얼리티 TV 예견하다

*북 디자이너 앤디 워홀@모건 라이브러리, 2016

*'팝 아트의 대부' 앤디 워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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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8.17 22:51
    저는 앤디 워홀하면 떠오르는 게 마릴린 몬로의 얼굴들입니다. 헤벌러진 입과 처진 눈, 금발을 너무 실감나게 묘사해서 그녀가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팝 아트라는 쟝르를 만들어낸 거장이며 예술가임을 본문을 통해서 거듭 알았습니다. 어린시절의 가난과 배고품을 견뎌낸 힘이 잘 묘사되 있네요. 예술이란 보이지않는 힘이 그에게 내재해 있었기에 가난을 이길 수 있었든게 아닐까요? 현실을 직시하는 명언들은 많은 공감을 자아냅니다.
    "아티스트란 사람들이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산다는 것이다".
    "돈 세는 것, 돈 버는 것은 예술이다".
    이런 말들은 앤디 워홀이 팝 아티스트이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2000만불이나되는 전유산을 예술을 위해 헌납하게한 유언이 고귀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