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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 Kim, 김보현 화백

자유를 열망하는 명상의 캔버스  

 


그는 5년 후면 100세가 된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노 화백은 조각가 아내와 나란히 손 잡고 뉴욕의 갤러리 오프닝에 나타났다. 그리고, 따뜻한 눈길로 후배들의 전시를 격려하곤 했다. 
 

 김보현(95) 화백. 한인들은 그를 ‘김포 선생님’, 미국인들은 ‘포(Po)’라고 부른다. 그는 뉴욕의 한인 1세대 화가다. 어쩜 제 1호 한인 화가일지도 모른다. 
 

 김 화백은 뉴욕이 추상표현주의로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던 50년대부터 팝 아트, 미니멀리즘, 컨셉추얼 아트, 그리고 지금의 이즘(ism)이 실종된 현대미술까지 모두 옆에서 목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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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개월간 두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병상에 있었던 김 화백은 퇴원 후 추상화에 색테이프 콜라쥬를 혼합하며 컬러풀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Photo: Sukie Park/www.NYCultureBeat.com

 

 

 

 

 지난해 3월 김 화백은 부인을 저 세상에 보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3권짜리 화집 ‘김보현 작품 전집’(조선대학교 출간)이 나왔다.

 

 

 얼핏 가냘퍼 보이는 체격이지만, 다부진 에너지를 품고 있던 김 화백은 지난해 가을 작업실에서 자신의 그림을 보다가 넘어졌다. 이후 병상에서 4개월간 보내면서 두 차례 큰 수술을 거쳤다. 꼿꼿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휠체어와 조수에 의지하고 있다.

  

 
 김 화백은 지난달 15일부터 이달 16일까지 뉴욕한국문화원 내 갤러리코리아에서 개인전 ‘충만한 영혼(Abundant Spirits)’전을 열고 있다. 그의 2010년과 2011년 작품을 중심으로 한 이번 특별전엔 컬러풀한 대작과 고적한 명상의 캔버스가 공존하고 있다.

 

 과연 40년 이상 동거동락 해온 아내를 떠나 보낸 노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월드 여사의 병 수발을 하던 시기, 그의 그림은 청색과 황색의 파스텔톤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역동적인 붓 터치가 돋보이는 화사한 캔버스다. 2011년 아내를 보낸 이후 그의 캔버스는 회색지대로 어두워졌고, 간간이 드리핑으로 정적이면서도 고독한 느낌을 자아낸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세상의 그림을 만나게 된다. 그림이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영혼을 통해 손끝으로 나오는 예술이라면, 김 화백의 두 상반된 캔버스들은 인간의 절대 고독과 생존의 환희를 변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전시엔 뉴욕 정착 초기인 1960-61년 작품 13점도 소개된다. 50년 전의 그림이지만, 일필휘지 식의 역동적인 브러쉬 스트로크와 색면(color field)의 농담은 김 화백의 트레이드마크다. 21세기 그의 작품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는 요람과도 같은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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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한국문화원에서 16일까지 열리는 김 화백의 '충만한 영혼'전에선 아내 사별 전후  캔버스의 명암이 드러난다. 2010년 1월 1일에 그린 ‘Beginning of the Year 2010’(오른쪽)은 월드 여사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의 작품이다. 왼쪽 멀리 보이는 작품은 ‘Black Abstract’(2009). SP

 

 

 오늘 아침에도 붓을 들었다                                                                                            

 

 

 

 지금도 김 화백은 아침 일찍 잠을 깬다. 그리고 붓을 든다. 3월 초 그를 만난 날 아침에도 노 화백은 그림을 그렸다. 그날의 캔버스는 오렌지색 물감으로 물들었다. 휠체어에 의지해 있어도 그의 ‘액션’과 ‘제스처’ 페인팅은 여전히 정정하다. 퇴원 후 그린 벽화 크기 캔버스엔 알록달록한 색종이 테이프가 콜라쥬되어 더욱 컬러풀하다. 그림의 제목은 ‘우연’이다.

 

 김 화백은 정갈하게 빗은 머리카락에 스웨터와 버버리 머플러 차림으로 갤러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가을만해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노 화가는 아직 휠체어가 익숙하지 않은 눈초리다.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좋아요. 요즘은 이렇게 잘 돌아다닐 수 없고, 귀가 잘 안 들려서… 아침 6시에 일어났어요. 보통은 4시 반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지요.”

 

-그리실 때 어떤 생각을 하세요. 꿈에서 보신 걸 그리시나요.

“요즘 꿈은 확실하지 않고, 꿔도 잘 잊어버리게 돼요. 그냥 그리는 거지요.”

 

-식사는 잘 하시나요.

 “아침은 돌봐주는 사람과 근처에서 카페 라테와 케이크을 먹어요. 그림 그리다가 점심은 근처 이스트빌리지 ‘소바야’나 ‘로바다야키’ 아니면, 건너 식당 ‘차이나타운’에 가지요. ‘하사키’는 지하라서 계단을 내려가야 하니깐 못 가지요. 일주일에 몇 번씩 병원에도 가야하고… 모레엔 이영희박물관 카탈로그 출판 기념회에도 가야 하고… 그 날은 여기 오프닝과 겹치는데.”

 

 (김 화백은 두 가지 일정을 어떻게 소화할지 걱정하는 눈치다. 2006년 김보현 화백은 빌딩 4층의 공간을 부부의 이름을 딴 ‘실비아월드&포김 아트갤러리’로 개관했다. 뉴욕에 아모리쇼, ADAA 아트쇼, 코리안아트쇼 등 현대미술전이 동시에 열리는 3월 초 그의 갤러리에서도 전시가 시작된다. 8일부터 2인전을 시작할 조각가 헤더 쉬한과 설치작가 미셸 자페가 한창 작품을 설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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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titled'(2101). 지난해 3월 24일 월드 여사가 눈을 감기 전 시작해서 장례식이 끝난 후 마무리한 작품이다. 조희성
  큐레이터는 “전시에서 색테이프를 사용한 유일한 작품으로 봄 기운이 가득해 문화원 첫 전시로 입구에 꼭 걸고 싶었다”고
  말했다. Photo: Sukie Park/www.NYCultureBeat.com

 

 -한국문화원에서 개인전하시는 감회가 어떠세요.

 “생각도 못했던 전시였어요. 병원에서 죽는 줄 알았기 때문에 살아나와서 하게 됐지요. 다행히 반응도 좋아서 나도 기쁩니다..”

 

 -부인 돌아가신 후 생활이 어떻게 바뀌셨어요.

 “실비아가 1년간 아팠을 때 화집을 준비하느라고 주야로 바빴어요. 한국의 인쇄, 출판사와 연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너무 바빠서 슬픈 지도 몰랐지요. 장례 끝나고 나서 보니, 함께 살다 한 사람이 죽어도 그냥 내 삶은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슬프다기보다는 글쎄, 그냥 적응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었지요. 실비아 죽는 날도 아침 6시에 약을 주려고 일어났는데, 벌써 실비아 손끝이 파래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간다는 걸 알았지요.“

  

  -42년, 오랜 세월 함께 하셨으니 무척 적적하실 것 같은데요.

 “같이 살 때도 난 8층, 실비아는 7층에서 따로 그리고, 잤어요. 식사도 항상 외식을 했기 때문에 보통 부부들과는 다르게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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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30일, 이날은 실비아 월드&포 김 갤러리에서 부부의 듀오전이 개막했다. 월드 여사의 95세, 마지막 생일이기도 했다. SP

 

 

 

-왜 따로 주무셨어요.

 “옛날에 남자는 사랑채에, 부인은 자식들과 안채에서 살지 않았나요(웃음). 실비아는 스튜디오가 7층이라서 작업하고 따로 자는 식의 개별적인 삶을 살았어요.”

 

 -반세기 넘는 작가생활을 결산하는 화집을 내시니 기분이 어떠세요.

 “미국에서 그린 모든 작품이 실렸어요. 1955년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교환교수 생활하면서부터 근작까지 담겼어요. 내 삶의 기록인 셈이니까요. 처음 책을 받았을 땐 기분이 좋았는데, 자꾸 보다 보니 비판적이 되네요. 달리 낼 수도 있었는데…”
 

 

 좌익으로, 우익으로 몰려 고문                                                                                         

 

 

 

 김보현 화백은 1917년 경남 창녕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 그는 누나와 남동생을 폐렴으로 잃었고, 자신도 열다섯살 때 폐병에 걸렸으나 살아 남았다. 큰 형이 그림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 그도 열아홉살 때 형을 따라 도쿄로 가서 미술과 법학을 공부한다.

  

 당시 군국주의에 빠졌던 일본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 급기야 한인 유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보내려 했다. 김 화백은 도망 다니다시피 하다가 10년만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간다. 광주에 정착한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미술학과를 창설에 관여한 후 그는 만학도를 가르치는데 열중한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혼란기의 조국은 자유정신이 강한 화가 교수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미군정 때는 우익분자로, 한국전쟁 때는 좌익분자로 낙인 찍어 고문을 해댔다. 한반도의 근대사는 그에게 아직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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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90세의 노화가는 마티스의 색채와 샤갈의 알레고리가 조화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언제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셨나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어요. 전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해서 대표로 상도 받았지요. 도화도 잘했지만, 꼭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진 않았어요. 그림만 잘했다면 아마도 화가를 지망했을지 모르지요. 어릴 때 도화 견본을 보고 그렸는데, 종이를 대고 복사했다는 오해도 받았지요. 혼자 그림을 잘 그렸어요. 아마도 형의 영향이었던 지, 형이 화가 되니 나도 자연스럽게 된 것 같아요.”

 

-형은 어떤 화가이셨어요.

 “나보다 일곱 살 위였는데, 이름이 김창덕(1910-1983)이죠. 형이 대구 상업학교 2학년때 집이 갑자기 가난해져서 학비를 못 내게 되자 오사카에 갔어요. 일본에선 ‘다카하시 스스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하지만 일본에서도 형은 오사카, 난 동경에 있었기 때문에 한 집에 살지 않아서 피차 잘 몰랐지요.”

 

 (형 김창덕은 대구상업학교 2년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가서 1927년 오사카의 나카노시마 미술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40년대 일본의 권위있는 미술전 ‘니가텐/이과전’에 출품해 여러 차례 입선했고, 아사히 신문에도 보도됐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아 이과전의 후신인 행동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두 분 다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잘 사셨나 봐요.

 

 “우리 집은 가난했어요. 수업료도 못 낼 정도였지요. 그래서 고학을 하러 일본에 간 거지요.”

 

 (김 화백은 학교 졸업할 때 특별상 부상으로 시계를 받게 됐는데, 학교 측에서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고 시계를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 후 학교에서 ‘시계 가져가라’는 통지가 왔다. 하지만 그 시계도 어머니가 전당포에 30전에 맡겼다. 어린 시절 김 화백 가족은 돈이 없어서 굶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김 화백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설탕과 곡물 등을 경매하는 대구 기미시장에서 재산 전부를 잃어서 집안이 망했다고 들었다. 그는 열 여섯살 때 창녕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서방의 조수로 일하며 35원을 모았다. 이 돈은 3년 후 형 찾아 오사카로 가는데 쓰게 된다.)

 

-1937년 도쿄로 가신 후 미술과 법률도 공부하셨지요.

 “태평양미술학교와 명치대학교 법과를 다녔지요. 당시엔 한국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법과였어요. 그때는 공과 계통은 일이 별로 없었고, 직장을 구하려면 법과 나와서 관청에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지요. 꼭 법률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당시 좋아하셨던 화가는.

 “마티스하고 고갱을 좋아했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열아홉 살 때 갔을 당시 일본은 가난한 나라였어요. 아침엔 신문 배달하면서 공부했어요.”


 

 (김 화백은 명치대학교 재학 시절 학병제를 피해 다녔다. 도피 중 일본 형사가 잡으러 왔다. 학병에 안 가려면 북해도나 구주의 탄광으로 가라고 했다. 형 김창덕도 잡혀서 구주의 탄광에 들어갔다. 폐병 전력이 있던 김 화백은 의사의 증명서를 제출한 후 주소를 바꾸어버렸다. 1944년 일본에서 광주 출신으로 일본여자치과의전을 졸업한 치과의사와 결혼했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광주에 정착하게 된다. 아내는 조선대학교에서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조선대학교에 미술학과를 만드셨지요.

 “1946년 조선대에 음악과 미술을 합한 예술학과가 생겼지요. 한국에서 최초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대학교도 미술부가 같은 해에 생겼다고 해요. 난 전임교수로 가르쳤지요. 주로 나이가 20-30대 초반 등 나이가 제법 든 학생들이 공부하러 왔어요.”
 

 

(김 화백은 1948년 9월 조선미술동맹 광주지부의 그룹전에 이경모, 천경자, 윤재우, 장한철씨 등과 함께 참가했다. 같은 해 광주 미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자연주의 성향의 그림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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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화백과 천경자 화백은 조선대학교에서 함께 가르치며, 전시도 하고, 종군화가단에서도 활동했다.
  이 그림은 1951년 일선에서 김 화백이 그린 천 화백의 모습이다.

 

 

 

-이번 작품집에 천경자 화백을 모델로 한 드로잉(1951)도 있던데요.

“아마 일선에서 그렸을 꺼예요. 한 두어 시간 앉아 있었지요.”

 

-천경자 화백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우린 조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우리 집이 광주 시내에 있어서 조선대 교수들이 종종 모였지요. 전쟁 후 종군화가단에서 같이 활동하며 친하게 지냈어요.”

 

 (천경자 화백은 1927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전남여고 졸업 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46년 광주여고 강당에서 개인전을 연 후 조선대 미술학과장까지 지낸 김 화백은 1952년 천경자, 조복순, 이경모씨와 광주 미 공보원에서 4인전을 열었다. 1955년  미국으로 오기 전, 천경자 화백을 통해 김환기와 남관 화백을 알게 된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장을 지낸 천 화백은 1998년부터 뉴욕에 살고 있다.)
 

 -해방 후 우익분자로 몰리셨지요.

 “미 군정 때 광주 주둔 사령관의 딸에게 그림을 가르쳤어요. 어느 날 부인이 찾아와 개인지도를 해달라고 했어요. 좋다고 했지요. 그런데 당시엔 한국에 자동차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두번씩 우리 집으로 미군 지프차를 보냈지요. 동네 사람들이 보기엔 미군들이 왔다갔다 하니까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예요.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다시 잡혀가 고초를 당했지요.”

 

 -이후엔 좌익으로도 몰리셨어요.

 “밤중에 경관들이 와서 잡아갔어요. 난 이유도 몰랐지요. 여순반란 사건 이후 경찰이 사람을 마구 잡아갈 때였으니깐. 그땐 경찰이 사람 죽여도 아무도 말을 못하는 무법천지였지요. 난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흥미가 없어요. 난 자유주의자예요. 그러니까 양쪽에서 몰린 거지요.”

 

 처음 잡혀갔을 때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 후 학생들과 홍도로 스케치 여행을 갔는데, 6.25가 터졌다. 이때 흑산도 지서장이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좌익 분자’라고 체포하러 와서 전쟁이 난 줄 알았다. 당시 김 교수는 바로 목포 구치소로 들어갔다. 근거가 없다고 이틀 만에 풀려나 보니 인민군이 목포로 들어왔다.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서 목포에서 광주의 집까지 갔다.

 그후 광주의 인민위원회에서 호출해 조서를 썼다. 이때 인민군이 광주까지 들어왔다. 좌익계 예술가들은 김 화백을 반동분자라고 배척했다. 이후 국군이 들어오자 그는 또 불려갔다. 한겨울 도망가지 않고 광주에 남아있던 천경자 화백과 둘이 경찰서 유치장 속에 갇혔다.
 

  2006년 천경자씨의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 따르면, 당시 미술동맹 광주지부에선 김보현과 천경자 화백을 감시 중이었다. 이들이 전시회를 자주 하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라는 것. 이들은 경찰서에 쌓인 장작을 옮긴 후 무혐의로 나왔다. 이후 천 화백은 홍익대 교수가 됐고, 1992년 귀국 첫 전시를 서울 해나-켄트 화랑에서 열었을 때 천 화백과 40여년 만에 상봉한다.   

 

 -좌익으로, 우익으로 몰리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항상 경찰에 대한 공포감이 생겼어요. 형사들이 때론 돈 빌려달라고 찾아왔는데, 그 사람들만 보면 소름이 끼쳤지요.”

 

 

 

 자유 찾아 미국으로 오다                                                                                                   

 

 

 1955년 단돈 300불을 손에 쥐고 김 화백은 미국으로 향했다. 일리노이주립대학교 펠로쉽을 받고 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2년 후엔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뉴욕으로 왔다.

 
 뉴욕에 왔을 때 그는 영어도 부실하고, 돈도 없었으며, 게다가 불법체류자였다. 넥타이 공장, 백화점 디스플레이를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68년 마침내 인생과 그림의 동반자 실비아 월드 여사를 만났다. 그 후로 그림도, 생활도 안정됐다. 전업화가가 되어서도 김 화백은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매일 10-12시간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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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화백이 퇴원 후에 그린 '우연'. 김 화백은 온 몸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Photo: Sukie Park/www.NYCultureBeat.com

 

 

 

 뉴욕에서 반세기를 보내면서 화풍도 진화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극사실주의로 갔다가 다시 추상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러는 동안 컬러로 스타일도 조금씩 바뀌게 된다.

 

 

 -언제 미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셨나요.

 “미국은 미 군정 때 마음을 먹었지요.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선 수업료 일부를 면제해준다고 했고, 일리노이대에선 연구원 초청이었지요. 그래서 일리노이로 갔어요.”

 

 -미국에 오시니 어떤 점이 좋으시던가요.

 “때때로 생활태도가 다르고, 사회제도가 달라서 놀랐지요. 한 60년 전 유명한 외과의사의 파티에 초대돼서 갔었어요. 파티 끝날 무렵 의사가 설거지를 하다가 열 두살 짜리 아들을 불러 ‘거들어달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아들이 서슴지 않고 ‘No, I don’t want to!’하고 가버렸어요. 헌데,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어서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동서양 사람 생각하는 것 많이 달라요. 정치적으로는 자유롭다는 점이 좋았지요. 여기선 대통령 욕을 해도 되니까요.” 

 

-일리노이 생활은 어떠셨어요.

 “학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업을 들었지요. 그런데,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으니까, 교수도 말을 안 시켰어요. 당시엔 대학원생들이 모두 추상을 했는데, 난 마지막 작품을 구상으로 했어요, 한 학기 동안 여자 둘을 그리는 거였는데, 난 이주일 만에 그렸지요.”

 

 (이 그림은 결국 C학점을 받았다. 1957년 7월 김 화백은 뉴욕으로 왔다. 후에 일리노이 미술대학원 교수가 김 화백을 찾아와 그의 C학점 그림이 총장실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왜 뉴욕으로 오셨나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이 무서웠어요. 경찰을 봐도 겁나고… 한국에선 항상 소화가 잘 안돼서 항상 약을 먹어야 했지요. 여기 와선 그게 없어졌어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봐요.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니까요. 도피하러 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했지요. 뉴욕은 생동감 있는 도시였어요. 일리노이는 학술적이었지만, 뉴욕은 맥박이 뛰는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한국에서 올 때 수중에 300불이 있었어요. 1년 연구원으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바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지요. 그래서 뉴욕에 온 뒤 소호의 넥타이 공장에 나갔어요. 넥타이에 인쇄된 선을 따라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는 일이었는데, 시간당 1불 받고 일했지요. 하루에 넥타이 1200여개 이상 하다가 그만 두니 다른 한국 화가를 소개해달라고 하더군요. 한국 사람 다 잘하는 줄 알고. 이 후엔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도 했지요.”

 

 -신분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백화점에서 일할 때 어느 날 이민국 형사가 잡으러 왔어요. 그때 인사과장이 ‘절대 필요한 사람이니 잡아가지 말라’고 하더래요. 형사가 그러면 ’자수하라’고 권해서 자수하러 갔더니, 서류가 준비되어 있더라구요. 담당자가 나보고 ‘You are very lucky!’하더군요. 전 해에 법이 바뀌어 교환비자 소지자는 무조건 나가야 했는데, 나는 이미 그 전부터 불법체류자라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 뉴욕 미술가들과 교류하셨나요.

 

 “친하지는 않았지만, 드 쿠닝은 몇 번 봤어요. 내가 왔을 땐 벌써 유명한 사람이 됐지요. 그도 유명해지기 전엔 페인트 칠을 했고, 마크 디 수베로도 페인트공으로 일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깐 살기 위해서 아무거나 해야 했어요. 후엔 뉴욕대학교에서 동양미술사와 수채화를 가르쳤지만, 강사 월급은 별로 좋지 않았지요. 고생 많이 했어요. ”


 

 (1978년부터 김보현 화백이 살고 있는 맨해튼 아스터플레이스 인근은 1950년대 미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즐겨찾던 지역이다. 유니버시티플레이스의 술집 ‘시다 태번(Cedar Tavern)’엔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츠코, 프란츠 클라인 등 유명 화가들과 시인 앨런 긴스버그, 소설가 잭 쿠리악 등 뉴욕의 예술가들의 단골이었다.)

 


 -이 동네가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다고요.

 “그 시절 추상표현주의 미술활동이 전부 여기서 다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드 쿠닝, 라우셴버그 등 유명한 사람은 이 부근에서 살았어요. 당시 ‘10th St. Galleries’라고 집집마다 화랑들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들고, 모두 여기서 활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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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 김 화백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추상표현주이였다. '추상 146'(1960-61).

 

 -선생님도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하셨어요.

“억압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과거에서 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고, 당시 내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 추상표현주의였지요. 인습과 전통에 반대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한국에서 좌우익 대립에 시달려 죽음의 위기까지 갔던 김 화백은 미국에서 자유를 찾았고, 뉴욕에서 무한한 자유의 캔버스를 발견한다. 가난과 이념과 고문과 폭력이라는 악몽을 모두 쏟아냈다. 하지만, 뉴욕에서 그는 다시 ‘아웃사이더’였다. 가난과 영어라는 장애물이 있어도 캔버스는 그에게 위안이 됐다. 그는 전신을 움직이며 일필휘지식의 서예기법과 액션 페인팅의 스타일로 ‘김 포’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 뉴욕의 화단도 진화 중이었다. 앤디 워홀이 등장해 팝 아트(Pop Art) 작품을 쏟아냈고,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에서 영감을 얻은 클로즈업으로 비평가들을 현혹시켰다. 이방인 김보현 화백은 이토록 미국적인 미술가들 사이에서 잠시 혼란에 빠진 듯하다. 그는 1965년, 파리로 간다. 일본 유학시절 파리 미술계에 대한 동경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60년대 뉴욕에선 ‘파리는 한 물 갔다’고들 했지만,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파리에서 남관 화백과도 재회했다. 남 화백도 ‘파리는 벌써 끝난 도시이니 독일이나 바르셀로나가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 화백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유럽의 미술관과 명소를 돌아다니다 1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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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뉴욕타임스는 브로콜리 그림에 대해 '사실주의와 추상주의가 절묘하게 매혹적으로 조화된 작품'이라고 평했다.

 

 

 

-유럽 체류 후 화풍이 바뀌셨나요.

 “몇 년간 바뀌지 않았어요. 그런데, 추상을 한 20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너무 관념적인 것 같아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70년대 초반 학생의 자세로 돌아가 드로잉 작업을 했지요. 학생같이 사실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김 화백은 과일과 야채 등 소품 위주의 드로잉을 그리기 시작한다. 꽃은 이미 아름다우니 늘 먹는 청과물을 모델로 택했다. ‘김포 작품 전집’에서 김 화백은 말했다. “소품은 시 같고, 대작은 소설 같아요. 모든 작품에 시와 소설이 들어있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복숭아, 자두, 양파, 망고,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콩.... 호두까지 추상표현주의에서 극사실주의로 전환하셨지요.

 “그냥 가깝게 있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나서 한 7년 계속했지요. 처음엔 연필로 하다가 이후엔 색연필로 그렸어요. 보통 정물화하면, 테이블과 꽃 등 세팅이 나오는데, 난 그걸 무시하고 그림자도 없이 대상 자체만을 중심에 두었어요.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하루에 10시간, 12시간 그렸지요. 그러다 나중엔 그림자도, 구름도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도전의식이 없어져서 그만 두었지요.”

 

 (1979년 여름 김보현 화백은 롱아일랜드 브리지햄턴의 엘레인벤슨 갤러리에서 열린 청과물 소재 35인 그룹전 ‘청과물에서(At the Greengrocer)’에 참가했다. 뉴욕타임스의 헬렌 A. 해리슨은 김 화백의 그림에 주목했다. 해리슨은 “극도의 사실주의적이지만 공간을 신중하면서도 모호하게 사용해 사과, 복숭아, 딸기의 그림자를 극소화하면서도 기하학적으로 정리했다. 이 과일들은 사진적인 정확성으로 사랑스러운 모델이 되어 있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질감이 표현되어 있으나, 수학의 공식처럼 시각화했다. 결과적으로 사실주의와 추상주의가 매혹적으로 조화됐다”고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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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엔 추상표현주의로 회귀하셨나요.

 

“사실주의가 아니고, 기억이나 상상에 의거해 그리기 시작했어요."

 

 ‘비명(Scream)’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는 "나는 보고 있는 것을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 단지 보았던 것을 그릴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 화백은 미국 온 후 ‘한국에서 체험했던 것, 즉 악몽 같은 기억으로부터 끌어낸 이미지를 추상표현주의로 담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실제 보고 있는 것에 충실한 극사실주의로 돌아갔다가, 80년대부

터 변증법적으로 두 가지가 조화된 구상회화로 옮겨간다.
 

 

 이후 그의 캔버스엔 새, 물고기, 풀, 나무, 하늘 등 자연이 나타나 제각각 속삭인다. 이따금 호랑이와 색동 저고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곳에 가녀린 인물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림은 그가 무의식의 우물 속에서 길어내는 희로애락의 표현일 것이다. ‘깨어나기 전’’잠 못 드는 밤’ 등 90년대의 컬러풀한 대작에서 우리는 청년 시절 그가 고통스럽게 체험했던 악몽과는 저 반대편에 있는 낙원의 파노라마, 즉 이상향을 만나게 된다. 
 

 

 


 악몽에서 깨어나 이상향을 그린다                                                                                   

 

  

 어려웠던 뉴욕생활 초기, 그러니까 57년부터 60년대 말까지 김보현 화백의 캔버스는 ‘회색시대’였다. 1964년 시민권을 받고, 68년 실비아 월드 여사를 만난 이후 그의 컬러도 밝아졌다. 김 화백은 시민권을 신청하면서 이름을 발음하기 쉽게 ‘Poe Kim’으로 바꾸었다. 원래 ‘Poe’였지만 아내 실비아 월드 여사가 ‘Poe’(*에드가 알란 포우처럼)는 미국에서 성이라며, e를 떼버리라고 해서 아예 Po Kim으로 쓰고 있다. 법적 이름은 Poe Ki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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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임스는 2005년 김보현-실비아 월드 부부를 잭슨 폴락-리 크리스너 부부와 함께 서로 영향을 받지않면서 강한 작품성을 유지해온
  미술가 커플이라고 거론했다. 2006년 90세의 김 화백과 92세의 월드 여사.  Photo:SP/www.NYCultureBeat.com

 

 

 -실비아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1968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레노어 토니라는 섬유예술가 친구가 인도로 간다면서 한 100명을 초대해 파티를 했지요. 이때 실비아가 친구를 따라 왔어요. 파티에서 동양 사람은 나와 이사무 노구치(*일본계 미국인 조각가)뿐이었지요. 실비아가 친구보고 ‘저 사람 누구냐’고 소개해 만났어요. 실비아의 첫 인상이 어딘지 동양인 같았지요. 실비아가 집에 초대하면서 데이트가 시작됐어요. 그리고 이듬해 결혼했지요.”

 


 (실비아 월드, Sylvia Wald 여사는 1915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무어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공황기에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후 1937년 뉴욕으로 이주해 첫 개인전을 열었다. 50년대엔 실크스크린 판화의 선구자로 유명해져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뮤지엄 등지에서 전시했다. 2002년 조선대학교 미술관에서 개인전, 김보현 화백과 여러 차례 2인전을 열었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 구겐하임뮤지엄, MoMA, 휘트니뮤지엄 등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78년 화가 부부는 다운타운 아스터플레이스 인근의 8층짜리 테라코타 빌딩을 샀다. 듀플렉스 중 7층엔 월드 여사, 8층엔 김 화백의 스튜디오를 마련했고, 옥상엔 열대식물로 그들만의 화원을 꾸몄다. 8층엔 파랑색 앵무새 찰리(24세)와 점블러(21세) 등 새들이 김 화백의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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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타임스는 김 화백과 월드 여사가 폴락과 크래스너 부부처럼 서로 영향을 받지않고, 강한
 작품성을 유지해온 미술가 커플이라고 썼다. 사진은 월드 여사의 작품.   Photo: Sukie Park  

 

 

 

-부부 간에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셨나요.

 “실비아는 조각이고, 나는 평면 작업을 하지요. 재료도, 작업 방식도 달라 서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어요. 내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안하지요. 실비아도 거의 내 작품에 대해 말을 안하고, 어쩌다 ‘It’s good’ 정도로만 했어요."
 

 

 (2004년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D. 도미니크 롬바르디는 뉴욕의 화가 부부 중 서로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강한 작품성을 유지해온 커플로 잭슨 폴락-리 크래스너 부부와 김보현-실비아 월드 부부, 그리고 게리 스테판-수잔 조엘슨 부부를 거론했다.)

 

 김보현 화백이 고국에 돌아간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즈음해서였다. 33년만에 조국과 화해한 후 고향 땅을 밟아봤는데, 산천도 사람도 그 때 그 느낌은 아니었다. 그는 1992년 해나-켄트 서울 갤러리에서 '김포'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하면서 한국의 화단에 복귀했다. 그리고, 2000년 조선대학교에 자신의 그림 307점을 기증했고,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선 그의 화업을 결산하는 회고전 ‘고통과 환희의 변주’가 열렸다. 지난해 9월엔 조선대에 김보현-실비아월드 미술관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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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덕수굴미술관에서 김 화백의 회고전 '고통과 환희의 변주'가 열렸다. 김 화백 스튜디오에 걸린 포스터.  

 

 

 

-뮤지엄, 갤러리에도 자주 가시나요.

 

 “지난해 MoMA에 내가 좋아하는 드 쿠닝 회고전 보러 갔어요. 요즘엔 남이 어떤그림을 하는지에 대해선 훙미가 없어요. 지금은 특히나 휠체어에 의지해 있으니 돌아다닐 수도 없고.”

 


 (김 화백이 최근 그린 그림은 컬러풀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서예의 역동적인 필치와 제스처, 그리고 생동을 연상시키는 색테이프가 가미되어 그의 캔버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유토피아다.)

 

-집에 새가 많네요.

 

 "내가 새를 좋아했어요. 뉴욕 와서 조그만 새 두 마리를 사서 위안을 삼았지요.  찰리도 기서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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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 앵무새 찰리는 요즘 거동이 불편한 김 화백이 잘 놀아주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다고 한다. 찰리는
  김 화백 집에서 태어난 암컷이다. Photo:SP/www.NYCultureBeat.com

 


-그림은 선생님께 무엇인가요.


 “그림은 내 생활이지요.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지요. 특히 요즘 와선 더 그래요. 몸이 이렇게 됐으니, 다른 건 하고 싶어도 못하니깐요. 내가 두 번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어요. 첫 번째는 경찰에 잡혀서 고문 당하며 여러 번 죽을 뻔했지요. 그리고 이번에 병원에서 여러 번 죽음을 생각했고요. 그런데, 살고 보니 이제 몸은 병신이 되어 있고. 지금 여생에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이젠 여생이라고 이름을 붙일 여유조차 안 남아 있어요. 내가 얼마나 더 살겠어요. 2-3년? 이젠 여생이 너무 짧은 거예요.”

 

-인생에 후회가 있으세요.


“후회는 없어요. 오래 살다 보니 운명론자가 됐어요. 모든 것이 운명인 것 같아요. 넘어졌을 때도 사실 그림을 보다가 그럴 필요없었는데, 옮기다가 그만 그 순간에 넘어진거죠. 욕심을 내자면 서서 맘대로 그리고 싶어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운명에 따라서 노력해보는 것이예요.”  

 

 

 이윽고 점심 시간이 됐다. 김 화백은 자신의 갤러리에서 2인전을 준비중인 헤더와 미셸 두 작가들을 인근 식당 ‘차이나타운’에 초대했다. 그리고, 이들과 ‘딤섬’을 먹으면서 오프닝 리셉션에 한식을 준비하겠다고 제안했다. 감동한 두 화가들이 극구 사양하자 김 화백은 음료만 준비하는 걸로 후퇴했다.

 

 

 식사 후 김화백은 휠체어를 끌고, 화가들과 함께 인근 와인숍으로 직접 가서 스파클링 와인 2박스를 사주었다. 손님들 대접을 해야 한다는 김 화백의 신조였다.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따사로운 마음씨는 여전하다.

 

 

 김 화백은 기나긴 세월 동안 수 차례 악몽에서 깨어났다. 죽음까지 직면했다가 얻은 세 번째로 얻은 고귀한 삶을 매 순간 살고 있다. 그는 내일 아침에도 깨어나 여전히 붓을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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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화백은 김 화백의 갤러리에서 2인전을 설치하고 있던  미술가들과 점심 식사 후 오프닝 리셉션에
  대접할 와인 두 박스를 사주었다. 왼쪽부터 미셸 자페, 김 화백, 화백의 어씨스턴트 예시, 헤더 쉬한.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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