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의 여왕' 바바라 월터스
Barbara Walters Says Goodbye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17살 때 꿈은 "바바라 월터스처럼 되는 것"이었다.
바바라 월터스. 무려 53년간 브라운관을 누벼온 여걸. 그는 '인터뷰의 여왕'이었다.
카스트로, 카다피, 사다트에서 달라이 라마, 캐더린 헵번, 모니카 르윈스키, 안나 윈투어,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도 그녀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세상의 유명 인사들 모두 바바라 월터스 앞에서 진심을 고백해야 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조명 뒤, 인간 바바라 월터스에겐 불우한 가정사가 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했던 바바라 월터스, 그 인터뷰 기술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바바라 월터스가 5월 16일 자신이 만든 ABC-TV 토크쇼 '더 뷰(The View)' 출연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84세의 화려한 TV 카메라를 뒤로 하고 백스테이지로 들어간다.
바바라 월터스는 53년간 군림했던 카메라 앞에서 물러나지만, ‘더 뷰’의 책임 프로듀서로 남아 제작을 지휘할 예정이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60)는 10년 전 바바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7살 때의 올 모델이 바바라 월터스였다고 고백했다. 바라라 월터스는 리처드 닉슨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역대 대통령은 물론, 퍼스트 레이디도 모두 인터뷰했다.
카스트로 인터뷰
쿠바에서 10일간 피델 카스트로를 동행 취재해 인터뷰했는가 하면, 빌 클린턴 스캔달의 주인공 모니카 르윈스키도 독점으로 TV 앞에 끌어낸 인터뷰의 명수다.
바바라 월터스는 1961년 NBC-TV 모닝쇼 ‘투데이’의 기자, 작가 겸 패널 진행자로 방송 경력을 시작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유일하게 동행했던 여성 TV저널리스트였다.
1974년 탁월한 인터뷰 실력과 인기로 공동 호스트로 발탁되면서 미 방송사상 최초의 공동 사회자가 된다.
NBC-TV 투데이쇼에서 진 샬릿, 바바라 월터스, 프랭키 맥기.
1976년 ABC로 스카우트됐으며, 이브닝 뉴스의 공동 앵커로 진행하면서 미 네트워크 방송사 최초의 여성 공동 앵커로 기록된다. 이와 함께 연봉은 최고액인 100만 달러로 치솟았다.
이후 ‘바바라 월터스 스페셜’ 과 연말 특집 ‘10대 매혹적인 사람들(10 Most Fascinating People)’을 이끌었다. 1984년부터는 ABC 시사 프로그램 ‘20/20’의 공동 사회자 겸 기자로 일해왔다. 1996년 바바라 월터스는 TV 가이드 선정 ‘역사상 위대한 TV 스타 50인’ 중 34위에 선정됐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인터뷰
1999년 3월 빌 클린턴을 궁지에 몰아넣은 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독점 인터뷰는 7500만명의 시청자를 끌면서 TV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린 뉴스 프로그램으로 기록된다.
바바라: 이 다음에 당신의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모니카: 엄마가 말이야, 크나큰 실수를 했단다.
1965
바바라 월터스는 1929년 보스턴에서 연극 프로듀서 루 월터스와 디네 셀레츠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동구권계 유대인으로 런던에서 태어난 아버지 루 월터스의 원래 성은 왐워써. 1896년 뉴욕으로 이민온 아버지는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지그필드 폴리스, 1943’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했으며, 라스베가스의 트로피카나 리조트&카지노의 예능 국장으로 일했다. 이후엔 나이트 클럽도 운영했다.
남동생 버튼은 1944년 폐렴으로 사망했고, 언니 재클린은 정신박약아로 태어나 1985년까지 살았다. 불안한 가정과 불우한 형제들이 깊숙히 뿌리 박혀있어서 심도 있는 인터뷰어가 됐을까?
1976
쇼 비즈니스에서 일한 아버지의 재정은 늘 불안정했다. 어린 시절 늘 연예인들 사이에서 지냈던 소녀 바바라에게 스타는 별로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누그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는 용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 실패한 후 센트럴파크웨스트의 펜트하우스 아파트도 날리게 됐으며,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이후 플로리다로 이사해 살던 중 정부가 집, 자동차, 가구까지 차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바바라 월터스는 사라 로렌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광고회사에서 일하다가 NBC에 취직하게 된다.
방송계에서 이름을 날리면서 1989년 TV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으며, 2007년 6월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별을 새겼다. 2000년 월터스는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로서는 최고액수인 1200만 달러의 연봉, 5년 계약으로 화제가 됐다. 월터스가 방송으로 거머쥔 에미상 트로피는 34개에 이른다.
세번의 유산 후 입양한 딸 재클린과.
바바라 월터스는 세 남자와 네 번 결혼했다. 1955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사업가였던 로버트 헨리 카츠와 결혼했지만, 11개월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3년 연극 프로듀서 리 구버와 결혼해 임신했으나 3차례 유산 끝에 1968년 여아를 입양해 언니와 엄마 이름을 따서 재클린 디네 구버라고 지었다. 구버와는 1976년 이혼했다.
1981년 로리마 TV 방송국의 대표 머브 아델슨과 결혼했으나 84년 이혼, 그리고 2년 후 다시 결혼했다가 1992년 다시 이혼했다. 바바라 월터스는 1970년대 미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장 앨런 그린스펀과 연애했으며, 1990년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남편이었던 존 워너 상원의원과도 염문설이 있었다. 앨런 그린스펀은 1997년 CNN 기자 안드레아 미쳴과 결혼했다.
달라이 라마와 리처드 기어와의 만남.
바바라 월터스는 2004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20/20 공동앵커 시절 자신을 싫어했던 앵커 휴 다운스와의 갈등에 대해 설명했다. 월터스는 “인생에서 실패한 후엔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성공이 단순히 행운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에 종종 최고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The View
바바라 월터스는 운전면허증이 없다. 요리도 못한다고 고백했다.
양딸 재클린에 따르면, 엄마 바바라는 TV 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놀려댄다. 바바라가 인생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자식이었지만, 세 차례나 유산한 후 입양할 수 밖에 없었다. 월터스는 “훌륭한 유산과 훌륭한 경력, 훌륭한 결혼과 훌륭한 자식들이나 훌륭한 자식들과 훌륭한 경력을 다 갖고 싶지만, 세가지 모두를 갖기는 힘들다”라고 밝혔다.
오프라와 바바라
오프라: 이제까지 삶에서 가장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바라: 당신이 사랑할 누군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 꼭, 그가 당신을 사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야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건 반드시 직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또한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상투적인 말들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친절해져야 한다. 이것이 내가 날이 갈수록 더 훌륭한 인터뷰 기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