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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 나간 천재 아티스트"

 야요이 쿠사마 Yayoi Kusama 



어릴 적 꽃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꽃들이 자신을 향해 속삭인다고 착각한 쿠사마, 화가가 되기위해 쿄토로 유학했지만 보수적인 미술계에 반발한다. 해외로 나갈 결심을 한 후엔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를 써 그의 후원으로 뉴욕에 왔다. 화가로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날아온 쿠사마는 회화, 조각, 콜라쥬, 설치, 퍼포먼스, 영화, 그리고 패션과 출판까지 예술의 스펙트럼을 종횡무진하면서 재능을 발휘해온 전천후 아티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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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도쿄의 무샤시대학교, 야요이 쿠사마가 신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Photo: Yayoi Kusama Studio

 


추상표현주의가 뉴욕 화단을 풍미했을 때 마크 로츠코, 앤디 워홀, 도날드 저드 등과 그룹전을 열었고, 이들과 롱아일랜드 사우스햄턴 바닷가에서 함께 수영을 했다. 쿠사마는 젊은이들을 불러 MoMA(Museum of Modern Art) 조각 정원과 브루클린브리지 위에 나체로 세워놓고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이들의 맨 몸뚱아리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물 무늬가 입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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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의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쿠사마. Photo: Jeremy Sutton-Hibbert/Getty Images

 

 

야요이 쿠사마, 나의 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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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살 무렵의 쿠사마. 1939. Photo: Courtesy of Yayoi Kusama Studio Inc

 

 

   “미술이 아니었더라면, 난 오래 전 자살했을 것” 

 

 

▶출생: 1929년 3월 22일 나가노현의 마츠모토에서 씨앗 도매사업을 하는 중산층의 5남매중 네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일본어로 草間 彌生.

 

▶어머니의 학대: 사업가 아버지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쿠사마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자랐다고 전해진다. 열살 무렵 물방울과 그물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인 모습을 점박이로 땡땡 칠해서 가리곤 했다.

 

▶정신착란 증세: 자서전에 따르면, 어릴 적 쿠사마는 종종 착란 증세와 강박관념, 그리고 때때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어느 날 제비꽃밭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꽃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식탁보의 빨간 꽃이 수십개로 불어나서 식탁 밖, 벽으로, 천장으로 팽창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일본화에 염증: 쿠사마는 1948년 교토로 가서 일본화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너무나 전통적인 화법과 도제 체계에 거부감을 느낀 후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된다. 1950년대 마츠모토와 도쿄에서 전시회를 연 후 이윽고 해외로 갈 결심을 한다.

 

▶프랑스 대통령에게 편지: 처음 고개를 돌린 곳은 파리였다. 쿠사마는 르데 코티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저는 당신의 나라를 보고 싶어요, 프랑스요.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코티 대통령은 “고맙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교환 프로그램을 상의해보라”고 답장해왔다. 하지만, 쿠사마는 불어에 장벽을 느끼고 포기한다.


 

 

220px-O'Keeffe-(hands).jpg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조지아 오키프, 1918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 영어가 더 쉬웠으니, 목표는 뉴욕이었다. 이번엔 중고책방 미술서적에서 본 오키프가 들어왔다. 오키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화가였다. 쿠사마는 6시간 기차를 타고 도쿄의 미국대사관으로 찾아가 인명사전에서 Georgia O’Keefee의 주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화가로서 조언을 구합니다’.

 

당시 남편인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를 잃은 오키프는 친절하게도 답장을 보내왔다. “이 나라에서 화가로서 먹고사는 것은 힘들다…하지만...”  오키프의  편지 한장이 스폰서가 되어 쿠사마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시애틀을 거쳐 드디어 뉴욕에 왔다. 1957년, 그녀 나이 스물일곱살이었다. 그로부터 55년 후 쿠사마는 자신의 은인인 오키프의 그림이 걸린 휘트니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는 것이다.

 

 

 

 NeAr_Louis_Vuitton_75_Kusama_Through_Time_WM4.jpg 1957년 뉴욕에 온 쿠사마.

 

 

뉴욕에 정착한 후 추상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대형 회화를 그리다가 천을 이용한 부드러운 조각으로 옮겨갔다. 이후 거울과 전등을 사용한 환경 조각을 선보였다. 쿠사마는 1960년대 초 앤디 워홀, 클레스 올덴버그, 조지 시걸 등과 나란히 전시를 하면서 팝아트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60년대 후반엔 바디페인팅 페스티벌 등 해프닝과 패션쇼, 반전 시위에도 가담한다. 또한 영화를 제작하는가 하면, 신문도 발행했다.

 

 

▶뉴욕 데뷔 개인전: 1959년 뉴욕의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호평을 쓴 이는 화가 도날드 저드. 그 전시회에 나온 작품을 저드와 프랭크 스텔라가 구입해갔다. 저드가 소장했던 ‘무한의 그물 2(Infinity Net, No. 2)’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510만 달러에 팔리며, 쿠사마를 생존 여성화가 중 가장 비싼 작가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무한의 그물'은 2011년 쿠사마 자서전의 제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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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기법을 따른 쿠사마의 '무한의 그물' 시리즈로 당대 잭슨 폴락, 재스퍼 존스 등과 그룹전을 열었다. SP 

 

 

▶‘무한의 그물(Infinity Nets, 1959): 가로 30피트의 대형 회화엔 그물과 점 모양으로 환각 상태를 표현한다. ‘무한의 그물’ 시리즈로 쿠사마는 잭슨 폴락, 마크 로츠코, 바넷 뉴만 등 당대 유명 화가들과 어깨를 겨누었다. 하지만, 뉴욕을 떠난 후 쿠사마는 1980년대 후반까지 ‘잊혀진 화가’였다.

 

 

IMG_6988.jpg 무한의 그물(디테일). SP

 

 

▶해프닝의 리더: 뉴욕에서 아방 가르드 운동에 가담한 쿠사마는 도발적인 해프닝으로 금방 리더가 된다. 1961년 도날드 저드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작업실을 옮긴다. 친구가 된 헤세는 1970년 서른네살에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남근 조각:성 혁명이 대세였던 미국의 1960년대, 쿠사마는 남근 모티프로 사다리, 구두와 의자 등을 감싸는 부드러운 조각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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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 소파, 드레스, 여행가방까지 모두 부드러운 남근 조각으로 감쌌다. SP 

 

 

▶거울 방: 1963년부터는 거울이 설치된 방에 네온색깔의 전구를 설치해 무한대의 우주에 있는듯한 환상을 주는 ‘거울/무한(Mirror/infinity)’ 시리즈를 시작했다. 

 

 

2.jpg '거울/무한' 시리즈에 누운 쿠사마.

 

 


▶패션 비즈니스: 쿠사마가 패션에 손을 댄 것은 1968년 뉴욕에서다. 그는 쿠사마패션컴퍼니를 세우고 전위적인 패션을 디자인해 블루밍데일 백화점의 ‘쿠사마 코너’에 팔기 시작했다.
 

 

▶바디 랭귀지: 1960년대 후반 히피 운동이 떠오르면서 쿠사마는 나체족들이 등장하는 ‘몸 축제(body festival)’를 열고, 몸에 컬러풀한 물방울을 그리면서 주목을 끌었다.

 

 

3.jpg  어머니의 학대, 보수적인 일본, 60년대 성혁명...쿠사마의 미술세계의 기저에 깔려있다.

 

 

 

“물방울 무늬는 우주와 우리 삶의 에너지의 상징인 태양의 형태다. 또한, 고요한 달의 형태이기도 하다. 둥글고, 부드럽고, 컬러풀하고, 무의미하고, 미지의 물방울 무늬는 움직임이다…그리고, 무한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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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박관념은 예술로 승화하고...2011년 물방울 무늬 배경에서 같은 패턴의 의상으로...
 Photo: Victoria Miro Gallery, London/Ota Fine Arts, Tokyo/Yayoi Kusama Studio Inc. 2011

 

 

▶왕성한 작업: 60년대 후반 조셉 코넬, 도날드 저드와 친하게 지낸 쿠사마는 과로 때문에 종종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작품을 팔아서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이에 조지아 오키프는 자신의 아트딜러에게 쿠사마의 작품을 몇 점 구입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닉슨에게도 편지를: 쿠사마는 센트럴파크, 브루클린브리지 등지에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월남전 반대 시위를 했다. 또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을 끝낸다면, 그와 섹스를 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IMG_6860.JPG  누드와 폴카닷을 결합한 퍼포먼스.

 

 

▶누드, 누드, 누드: 1967-69년 벌거벗은 이들에게 물방울 무늬 바디 페인팅으로 성적인 행위를 묘사하는 해프닝에 집중했다. 1969년 MoMA 조각정원에서 연 ‘죽은 자를 깨우는 그랜드 그룹 섹스(Grand Orgy to Awaken the Dead)’ 퍼포먼스는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다운타운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식(Homosexual Wedding at the Church of Self-Obliteration)’ 해프닝도 벌이면서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하면, 누드 작업실과 동성애자 소셜클럽 ‘Kusama Omophile Kompany’를 오픈했다.


 

 

1966-Narcissus-Garden-1-full.jpg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상술 발휘.

 

▶베니스 비엔날레: 1966년 쿠사마는 제 33회 비엔날레에서 거울공 설치작 ‘자아도취 정원(Narcissus Garden)’을 소개한다. 황금 기모노 차림의 쿠사마는 관람객들에게 거울공을 2달러에 팔다가 비엔날레 측에 의해 중단됐다. 그러나, 쿠사마는 자신의 작품을 머천다이징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평가된다. 그만큼 쿠사마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실험영화: 1968년 자신이 주연하고 제작한 ‘자기 망각(Self-Obliteration)’은 벨기에 국제실험영화제와 메릴랜드영화제, 앤아버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유일한 사랑: 쿠사마는 뉴욕에서 조각가 조셉 코넬과 10여년간 동거했다. 하지만, 성관계 없는 플래토닉 러브를 지속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IMG_6872.JPG 조셉 코넬과 함께. 유일하게 웃는 모습이다.

 

 

 

고향에 돌아가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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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신주크 인근의 작업실에서 83세의 노화가는 왕성하게 그리고 있다. 그림은 그에게 생명줄이다.
 

 

“내가 정신병원에서 사는 것은 내가 아프기 때문이다. 혼자 있기 힘들다. 난 사람들 사이에서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병원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난 환각 증세가 있다. 주변에서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에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

 

▶정신병원으로: 1973년 건강이 쇠약해진 쿠사마는 일본으로 귀국, 보수적인 미술계 분위기를 느끼고 아트딜러가 된다. 이후 정신 이상이 생기자 1977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작가 변신: 아트 딜러로 일하면서 단편과 소설, 시를 발표해온 쿠사마는 소설 ‘크리스토퍼스트릿의 매춘굴(The Hustlers Grotto of Christopher Street)’로 일본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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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트니뮤지엄에 전시 중인 '천국과 지상(Heaven and Earth, 1991)'. SP

 

 

▶유럽 개인전: 1986년 프랑스 돌(Dole)의 시미술관에서, 3년 후엔 칼레의 ‘뮤제데보자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93년 옥스포드의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영화 배우: 1991년 쿠사마는 무라카미 류 감독의 ‘도쿄 데카당스’에 주연을 맡았으며, 93년엔 요코하마의 설치작에서 영국의 뮤지션 피터 가브리엘과 함께 작업했다. 

  

   

▶호박 설치작: 1993년 제 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거울로 장식된 방에 작은 호박이 있는 설치작에서 검은 무늬가 있는 대형 호박 조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호박은 쿠사마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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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외 조각: 쿠사마가 옥외 조각을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후쿠오카겐코센터를 비롯, 후쿠오카시미술관, 나오시마의 분카무라(사진), 마츠모토시미술관, 비버리힐즈 비버리가든파크, 안양의 평화공원 등지에도 조각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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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은 '구름(The Clouds), 정면은 “꿈 속에서 남은 눈(Leftover Snow in the Dream), 오른쪽은 '재생된 영혼(Revived Soul)'. SP

 

 

▶회고전 재조명: 1996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다시 시작, 2년 후엔 LA카운티뮤지엄, 뉴욕 MoMA와 미네소타의 워커아트센터, 도쿄의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실존: 2000년대 설치작 ‘난 여기에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니예요(I'm Here, but Nothing, 2000–2008)’에선 물방울 무늬로 도배한 방이 등장한다.

 

▶기록영화: 2008년 다큐멘터리 ‘야요이 쿠사마, 난 나 자신을 사랑한다(Yayoi Kusama, I adore myself)’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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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존 여성작가 최고의 작품에 팔린 '무한의 그물' 시리즈. SP 

 

 

▶경매: 2008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쿠사마의 작품 ‘무한의 그물’이 510만 달러에 팔리며 생존 여성작가로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유명화가 도날드 저드가 소장했던 작품이라 더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패션 컴백: 2009년 쿠사마는 셀폰 모양의 핸드백, 셀폰용 개 모양 홀더를 디자인했다. 2011년엔 랑콤 화장품과 한정판 립글로스를 냈고, 마크 제이콥스와 루이뷔통 라인을 디자인했다.

 

 00lockit_mm_monogram_vernis_dots_infinity_noir_102940713_north_545x.jpg 쿠사마+루이뷔통 백

 

*쿠사마+루이 뷔통=뉴 콜렉션 기사 보기

 

 

▶수상: 2000년 일본 교육부의 예술공헌상, 2002년 프랑스 정부의 문화예술공헌훈장을 받았다. 2006년 국가평생공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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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 로비갤러리에 설치된 ‘물 위의 개똥벌레(Fireflies on the Water)'는 시간제 티켓을 받고 들어가 60초간 홀로 감상한다. Photo: Suki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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