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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영주: 몬타나의 촌뜨기
뉴욕 촌뜨기의 일기 (7)
몬타나의 촌뜨기
- 몬타나 이야기 (1) -
저는 지금 몬타나주의 ‘보즈맨(Bozeman)이라는 작은 마을에 와있습니다. 막내가 살고 있어서 여름과 겨울에 한번씩 다녀갑니다. 겨울엔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사람들이 아이젠을 신고 걸어 다니거나 아니면 스키를 타는 사람도 종종 봅니다. 기온은 영하 18도를 오르내리는 차가운 날씨지만 공기가 얼마나 청명한지 추위조차 상쾌감을 더해주는 이상한 곳입니다. 여름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로키산맥 줄기인 수많은 산의 트레일들은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습니다.
저는 몬타나를 좋아합니다. 청정한 공기가 으뜸이기도 하려니와 막내가 밭을 만들어서 마당 안팎의 밭들에서 각종 채소가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꽃들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지, 그저 신기한 농장 구경하는 기분으로 하루를 지냅니다.
마당 안엔 꽃밭이 3군데, 밭이 2개 있습니다. 길쪽의 담장에 붙여 직사각형으로 만든 밭이 이집 농장의 본부입니다. 땅을 1미터 가량 높여서 만든 이 밭엔 양파 2종, 케일, 토마토, 방울 토마토, 한국 상추 2종(그린과 적색), 타이 민트, 아루굴라, 당근 3종(노랑, 주황, 빨강색) 브로콜리, 비트 3종(빨강, 노랑, 빨간 줄무늬), 부추, 허브인 카펫타임(thyme), 베이즐 등이 있고, 밭 가운데 한쪽엔 조그만 샘을 만들어 연꽃과 금붕어까지 키웁니다.
본채에 붙어 있는 허브 밭엔 민트, 오레가노, 차이브, 라벤더, 세이지 2종, 캔들프랜드, 로즈마리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꽃밭의 꽃들은 워낙 종류가 많은데, 일일이 그 이름을 외울 수가 없습니다. 향내가 숨을 멎게 하는 스위트피만 이름을 압니다. 보즈맨에선 매년 8월마다 스위트피 페스티발이 열립니다.
마당 밖에도 두 개의 밭이 있습니다. 땅을 50cm 정도 높여서 철로 배 모형을 크게 만들어 그 안을 밭으로 만든 것이 큰밭입니다. 이 보트를 볼 때마다 조각가 리차드 세라의 대형 철 구조물 작품이 연상됩니다. 작은 밭은 딸기밭입니다. 큰밭에는 7가지 마늘과 호박 5종류(조선호박, 스쿼시, 노란 호박, 펌킨, 둥근 호박), 그리고 고추 2종(하바네로 외 1종), 오이, 가지, 깻잎 2종(한국, 일본), 슈거스냅피(Sugar snap pea),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습니다. 슈거스냅피는 그냥 먹어도 달아서 지나다닐 때마다 몇 개씩 따서 입에 넣습니다.
몬타나에 온 다음날엔 앤털롭 고기를 구워 밭에서 깻잎과 파랑·빨강 상추, 케일을 따서 쌈밥을 먹었습니다. 앤털롭은 지난 겨울 사위가 사냥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은 온갖 야채를 다 뜯어다 채썰어서 (오이와 깻잎, 토마토, 사과도 함께 채썰어서) 비빔밥을 양푼에 가득 비벼서 먹었습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임산부가 밥에 배고파서 몰래 부엌으로 가 양푼에 김치와 고추장 넣고 비벼 먹는 바로 그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밭을 둘러 보면서 호박을 따고, 방울 토마토를 따먹고, 가지와 고추도 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끼니 때마다 필요한 야채도 되도록 제가 가지러 갑니다. 여기서 이렇게 밭에서 방금 딴 유기농 야채를 먹다가 제가 사는 뉴저지로 돌아가면 한동안 음식 먹기가 싫어집니다. 채소가 맛이 영 다릅니다.
어제는 금요일이었습니다. 아침녘에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드링킹 호스 마운틴(Dringking Horse Mountain)’ 트레일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왕복 약 3마일 코스인데, 올라갈 때는 계속 오르막을 올라가므로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워낙 보즈맨이 해발 5천 피트 고지인데다가 다시 거기서 산을 오르니 온지 사흘 밖에 되지 않은 저에겐 조금 숨이 가쁘고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내려오는 길은 산을 에둘러 내려오므로 경사도 덜하고 걷기에도 편해서 반 마일 가량 트레일이 더 길었지만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거개가 침엽수인 산은 야생화의 천국이었습니다. 한 산에 그렇게 많은 야생화들이 창궐한 모습은 뉴욕에선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저는 야생화 사진 찍느라 수없이 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드링킹 호스 트레일 같이 3마일 되는 것은 트레킹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이런 길이의 트레일은 출근하기 전 새벽에 뛰어 올라갔다 내려가는 코스입니다. 진짜 하이킹은 보통 10마일에서 15마일인데, 그 트레일도 뛰어 다닌다고 합니다. 트레일 올라가는 것을 저는 큰 산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곳에선 거의 일상입니다. 막내도 얼굴은 물론 근육질의 팔다리가 새까맣습니다.
그렇게 멋진 하이킹을 하고 나서 저녁엔 소파에 누워 인터넷으로 오늘의 뉴스를 들쳐보고, 다운해 놓았던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엄마, 점심에 포식했으니 저녁은 떡볶이 해먹을까?”, 라던 막내는 부지런히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열심히 일해서 “쟤는 떡볶이 하나 만들면서 왜 저렇게 바쁘지?”, 하면서 혼자 쿡- 웃음이 터졌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저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누워 나는 영화보고, 딸은 나를 위해 열심히 쿡을 한다. 아! 이보다 더한 행복이 이 세상에 있으려나?” 스스로 감동에 젖어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마음의 책갈피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막내는 떡볶이만 한 것이 아니라 옥수수를 삶고, 슈거스냅피까지 볶아 상을 예쁘게 차려 놓았습니다. 빨강과 그린, 노랑의 삼원색 예쁜 식탁이었습니다.
참, 닭장 이야기가 빠졌습니다. 마당 안 밭 끄트머리 쪽엔 사위가 지은 번듯한 닭장이 있습니다. 밭쪽으로 비료 만드는 컴포넌트도 만들어 놓아 그곳에서 닭똥과 채소, 생선 찌꺼기 등을 일년동안 썩혀서 밭의 비료로 쓰므로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막내는 늘 열 두 마리 정도의 닭을 키웁니다. 계란을 먹기 위한 닭들입니다. 그만큼 기르면 하루에 계란을 7~8개씩을 낳습니다. 너무 많아서 미처 못 먹으니까 친구들도 계란이 필요하면 마음대로 가져갑니다.
얼마 전엔 충격적인 비보가 있었습니다. 닭장을 열어놓고 막내는 학교에 가고, 사위가 5분 정도 집을 비운 사이, 개가 마당 안으로 들어와 닭장의 닭을 11마리나 물어 죽인 것입니다. 막내네 집은 현관을 빼고는 삼면의 문들이 자석으로 되어 있어서 밀면 그냥 열립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닭장 문을 닫으면 먹이 저장통으로 막아 놓기 때문에 열 수가 없지만 열어 놓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는데, 개가 들어가자 마침 문이 닫혀서 그 닭장 안에서 11마리가 처참하게 살해된 것입니다. 비보를 들은 친구들이 두 마리, 세 마리씩 주고 해서 다시 닭이 9마리로 늘어났지만, 아직은 서로 낯설어서 그런지 계란을 하루에 한 개 밖에 낳지 않았습니다. 어제 처음 2개 낳았습니다. 닭장 입구에 걸린 박제 동물의 머리는 몇 년 전에 사위가 잡은 앤털롭의 머리입니다.
막내는 바이얼리니스트이자 대학교 교수입니다. 말하자면 아티스트인데, 닭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마당의 잔디까지 본인이 직접 깎습니다. 밭을 가지고 있으면 이곳은 너무 건조한 지역이라 매일 물을 줘야 합니다. 기다란 호스를 들고 마당 안팎으로 물을 주자면 물만 주는데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막내의 손을 보면 결코 바이얼리니스트의 손이 아닙니다. 노동자 손입니다. 그래도 막내는 너무 행복해합니다.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제가 소파에 누워 저를 위해 요리하는 딸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 자연 속에서 거의 매일 주변 트레일을 하이킹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농사 짓고, 요리하는 아티스트로 행복을 느끼는 막내. 설령 재벌이 아니어도, 권력이 없어도 이런 게 사람 사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행복이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몬타나의 촌뜨기 막내가 제게 인생을 배워줍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