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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한혜진: 가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에피소드 & 오브제 (10) 매디슨 카운티 다리의 연인들
가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그건 가을 날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따가운 가을 햇볕 속에 한적한 시골길, 풋먼지를 일으키며 그 길로 들어서는 트럭 한 대. 자신의 시선에 잡히는 움직이는 물체에 반응하며 일어서는 중년여자. 도움을 구하는 나그네의 요청에 동승을 허락하는 여자.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당도한 두 사람. 남자는 사진을 찍고, 여자는 서성이면서도 그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숨어서 카메라의 앵글을 엿본다.
나는 감지한다. 저 카메라의 렌즈에 잡히고 싶다는 그녀의 잠재된 욕망을.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장면이다. 중년의 나이란 그런 나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는 나이라고. 한국영화 ‘정사’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동생의 약혼자인 이정재가 언니인 이미숙을 만나서 하는 말.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하라고.” “조금만 지나면 아무도 당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중년이 되었다는 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젊음이 가지던 충만감이란 어쩌면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아니었을까? 젊음이란 그 시선들 속에서, 내가 원인이 되어 불러 일으키는 만족과 나와 함께 있음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아니었을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순수하고 다정스런 애무의 순간들을 만끽하며, 짧지만 달콤했던 내 마음 속의 토로와 소통이 가능했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을까?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태와 자주 마주하게 되는 중년의 여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영화 속의 여자는 그 허한 구석을 메우려는 시도에 용감해진다. 자신의 영역 속으로 우연히 들어온 한 남자. 그 시선 속에서 그녀는 머물고 싶어진다. 마침 남편과 아이들은 부재 중이다. 멀리 떠나고 없다. 저 너머에 피신해 있던 다른 모습의 그녀가 와서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트럭을 타고 가면서 남자는 이란 말을 한다. “아이오와의 흙냄새가 좋다.” “ 왠지 싱그럽고 풋풋하다”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끌린다. 나흘간의 사랑으로 끝났지만, 그 여운은 시간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여자는 이 사랑을 유산으로 남긴다. 자신에게 솔직했던 한 순간을, 사랑으로 아름다웠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사랑이란 한 사람의 필름 속에 찍힌 음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영화 속의 남자는 다리 풍경 사진을 찍으러 그 곳에 왔다가 카메라 가득히 사랑을 담아 갔다. 그의 시선 속에서 한 여자는 사랑을 느꼈고, 사랑을 했고, 아름다운 순간을 보낼 수 있었다.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 (1995)
가을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묻고 싶어 진다. 이 세상의 나무와 꽃들이 결혼 예복으로 갈아 입고 새들의 축가 속에서 사랑을 꿈꾸는 봄에는 짐짓 모른척하며 그 대열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용기가 없다. 그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달라고 하면서 편지나 쓰려 하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답다고 내숭을 떨어 가면서 정처없이 나서보려고만 하지 않는가. 고개를 떨구고서.
영화를 보고 나니 가을빛은 모두가 무한한 조명이며 운치있는 정경은 자연이 만들어준 완벽한 세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찍는 사람과 피사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가을은 그런 기다림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저 아름다운 조명 속에서 누군가의 앵글에 잡히는 피사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다시 잠시라도 머물고 싶다. 호의적인 눈길 속에서 빛나는 피사체가 되어 보는 순간을 다시 갖고 싶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영화 속 트럭 한 대가 일으키는 묘한 감흥처럼,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가을 속으로 한번 나서보지 않겠냐고, 사랑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 곳에서 쭈볏거리지 말고 사랑의 사진을 찍으라고. 긴 여운으로 남을 그런 사랑을 해 보라고 부추긴다. 무거워진 아줌마의 엉덩이를 은근히 들썩거리게 만든다. 나는 고민한다.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키고 한참을 바깥만 내다보고 있을지, 마지막을 불태우는 가을 잎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야할 지를..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