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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필 황: 나는 어쩌다가 뉴욕의 택시 드라이버가 됐나?(상)
택시 블루스 <2> 칸 영화제 대상을 꿈꾸었지만...
나는 어쩌다가 뉴욕의 택시 드라이버가 됐나? <상>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내가 미국에 살게 될 것도, 언론사 기자를 하게 될 것도, 택시 운전을 하게 될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계획하지 않았건만 일은 이렇게 흘러왔다. 내 인생철학인 물 흐르는 대로 살아온 결과다.
1998년 필자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는 대통령, 과학자 등과 같은 막연한 장래희망 말고 구체적으로 내가 꿈꿨던 단 하나의 직업과 인생이 있었다. 바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그 꿈을 꿨다. 그래서 대학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열심히 했다. KBS의 88올림픽 방송보조요원 아르바이트 자리도 단편영화 실습을 위해 반납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라 주머니가 늘 가벼웠지만 나는 대학생 시절 단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해 본적이 없다.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서른 정도에는 칸 영화제 대상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천재도 아니었다. 졸업 후 영상관련 일을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충무로 연출부 입성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중간에 영화가 엎어졌다.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곽지균 감독의 연출부에도 있었는데 당시 보고 겪은 일들로 인해 영화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1997년 네팔. 에베레스트 트래킹 도중 고산지대에 사는 야크를 만지고 있다.
결국 나는 영화판을 떠나 일반 기업에 다녔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당시 인기 있었던 PC통신 천리안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마음 한켠이 늘 허전했다. 그 즈음 친구들과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으레 배낭을 메고 출근해 퇴근 후 바로 산으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을 산에서 달랬다.
산을 다니다보니 히말라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히말라야로 향했다. 중국까지 배를 타고 건너가 육로로 티벳까지 갔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네팔, 인도, 파키스탄 등지로 이어져 일년 가량 걸렸다. 그 이전까지 나는 한국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었다.
1998년 남인도 고아(Goa) 카페 주인과 함께.
인도 여행은 힘들었다.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문화와 습성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고 끈적끈적한 사람들의 태도. 나는 때로 이성의 끈을 놓쳐버리고 미친 듯이 화를 내기도 했다. 석 달이 지나니 적응이 됐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인도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히말라야가 좋아 떠난 여행이었지만 막바지에는 인도 성지를 찾아다녔다. 순례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아쉬람에서 묵기도 했다. 인도에서 몇 번의 영적 체험을 통해 나를 보호하고 이끄는 신적인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
서울에 돌아오니 정신세계원에 취업이 됐다. 당시 나는 인도에 돌아갈 생각을 하며 종로의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천리안의 한 동호회의 시삽이 정신세계원의 구인광고를 전체메일로 보냈다. 흥미가 일어 자기소개서를 써서 보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했다.
1998년 남인도 여행 중.
정신세계원은 소설 ‘단(丹)’으로 유명해진 정신세계사의 송순현 사장이 출판사를 동업하던 친구에게 넘기고 차린 사설 교육기관이다. 동서고금의 정신세계 관련 지식과 수련법을 가르쳤다. 명상, 요가, 선도, 기공, 수행, 최면, 전생퇴행, NLP, 신과학, 뉴에이지, 종교, 무속, 뇌과학, 마인드컨트롤, 점성학, 타로카드, 자연건강법 등 다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정신세계원에서 나는 온갖 정신세계 관련 지식을 습득하고 수행했다. 나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자 배움터였다.
나중에는 뇌과학에 대해 강의도 했다. 당시 정신세계원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니어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자연스레 온갖 기인과 도인들이 찾아들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 시기 나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2000년 정신세계원 근무 시절. 월간 정신세계 창간호를 들고 있다.
그러나 정신세계원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처해 결국 문을 닫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러한 지식을 굳이 정신세계원에 오지 않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이후 한국정신과학연구소장 박병운 박사가 운영하는 벤처기업 브레인테크에 몸을 담았다. 브레인테크는 ‘뉴로하모니’라는 뉴로피드백 훈련기기를 만들어 파는 회사였다. 이곳에 다니는 동안 미국에서 온 김반아 박사를 만나게 됐다. 자신의 가족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영화를 전공한 것을 아는 송순현 원장의 소개였다. 김반아 박사는 하바드대 교육학 박사 출신이지만 영화에는 문외한이었다.
나는 김반아 박사를 만나 영화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해줬다. 몇 주후 미국으로 돌아간 김반아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영화 연출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계속>
1960년대 막바지 대구에서 태어나 자라고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486세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독립영화, 광고, 기업홍보 영상, TV 다큐멘터리, 충무로 극영화 등 영상관련 일을 주로 했다. 서른살 즈음 약 1년간의 인도여행을 계기로 정신세계에 눈뜨게 된 이후 정신세계원에서 일하며 동서고금의 정신세계 관련 지식을 섭렵했다. 2007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차 미국에 왔다가 벤처기업에 취업,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2010년부터 뉴욕라디오코리아 보도국 기자로 활동했으며, 2013년 여름부터 옐로캡 드라이버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