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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이영주: 4월 마지막 날의 데이트
뉴욕 촌뜨기의 일기 (21)
4월 마지막 날의 데이트
글: 이영주/ 사진: 이명선 Melissa Lee
4월 마지막 날, 친구 명선씨와 함께 잉글우드에 있는 네이쳐 센터(Flat Rock Brook Nature Center)로 산책을 갔습니다.
가끔 명선씨와 가서 운동 삼아 산책하는 곳입니다.
Photo: Melissa Lee
미국에 사는 가장 큰 좋은 점의 하나는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 바로 인근에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는 없지만 포트리에도 허드슨 강가를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흙길이 있고, 낚시도 즐길 수 있습니다. 베어마운틴 줄기랄까, 해리만 파크 산들로 이어지는 트레일이 이곳부터 시작되니 말입니다.
잉글우드 네이쳐 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15분만 운전해 가면 계곡과 숲이 어우러진 아담한 산이 있고, 거기에 네이쳐센터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어린이 놀이터도 있어서 가족들이 즐겨찾는 곳입니다. 플랫록브룩 계곡을 따라 숲속으로 쭉 나 있는 산책길은 어린아이들도 함께 걸을 수 있을만큼 잘 만들어졌고, 트레일들도 완만해서 무리가 없습니다. 트레일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러 개가 되어서 하고싶은 만큼 숲길을 하이킹할 수 있습니다.
플랫록브룩 계곡은 여름이면 개구리와 올챙이들로 가득 찬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땐 놀이터 옆의 호수에서 밤톨만한 머리통의 올챙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제 손바닥만한 살찐 두꺼비가 한 마리 물에 잠긴 낙엽들 위에 앉아 있었는데, 색깔이 완전 보호색이어서 못보고 지나칠 뻔 한 것을 눈썰미 좋은 명선씨가 발견했습니다. 올챙이 머리가 밤톨만큼 큰 걸 보고 놀랐는데, 두꺼비 몸집을 보니 그 크기가 이해되었습니다.
한국서 보던 것들 보다 정말 컸습니다. 부러진 나무 가지 위에서는 햇볕을 즐기는 거북이들까지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누가 갖다 넣었는지 오렌지색 금붕어들도 제법 많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입구에서 노란 표지를 따라 걷다가 네이쳐 센터를 경유해 다시 빨간 표지 트레일을 걸었습니다. 산책로까지 걸으니 제법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 밑으로는 색색의 들꽃들이 펼쳐져 눈도 호사시켜 주었습니다. 명선씨는 그 귀여운 들꽃들을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저는 혹시 냉이나 쑥을 찾을까 하여 눈을 부릅떴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봄 미각의 여왕은 단연 쑥과 냉이입니다. 봄똥도 산뜻하고 두릅이며 달래, 씀바귀도 봄소식을 전해주지만, 쑥과 냉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쑥과 냉이의 독특한 향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생명감을 우리에게 은총처럼 쏟아 부어줍니다. 쑥절편은 보기만 해도 그 싱싱한 초록빛에 자르르 흐르는 윤기로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입니다. 냉이 된장찌개를 한 입 떠 넣으면 온 입 속에 퍼지는 냉이 향이 첫사랑보다 더 정답습니다.
냉이가 그저 흔하디흔한 들풀로만 알고 있었는데, 원래는 유럽이 원산지라고 하며 전 세계에 2백 여 종이 분포되어 있고, 한국에서만 자라는 것도 20 여 종이 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서양에선 냉이 열매가 역삼각형인 것을 두고 마치 목동들이 지갑 대신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목동의 지갑(Shepherd’s Purse)’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봄마다 그리운 것이 그 향기 짙은 쑥과 냉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식품점에 냉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아 울릉도에서 온 냉이를 냉동해서 팔고 있기에 사왔습니다. 울릉도에서 왔다니까 눈이 번쩍 띄어 사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해마다 냉이찌개를 끓여보지만 늘 실패해서 이번엔 마음을 먹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우선 멸치에 다시마, 표고버섯, 양파를 넣고 끓여 멸치국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썰어서 마늘과 생강, 레드와인, 후추, 소금으로 양념을 해서 한 두 시간 숙성시켰습니다. 냄비에 참기름을 넉넉히 둘러서 양념한 돼지고기를 익을 때까지 달달 볶은 후 감자와 양파도 넣고 더 볶았습니다. 거기에 준비한 멸치국물을 붓고 된장과 고추장을 풀었습니다. 된장찌개라도 고추장을 조금 섞어야 맛이 삽니다. 그렇게 끓이다가 호박도 썰어 넣어 호박이 익으면 마지막으로 냉이와 두부를 넣고 한소끔 끓여 상에 내는 것입니다. 상에 낼 때는 붉은 고추와 파란 파로 찌개 위에 곤지연지를 찍으니 눈까지 즐거워 식욕이 배가됩니다. 냉이찌개를 부지런히 떠먹으며 딸들은 “향이 좋아. 너무 맛있어!”를 연창했습니다.
찌개 성공의 포인트는 냉이를 먹기 직전에 넣어 살짝만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냉이의 그 상큼한 향이 죽지 않습니다. 제가 실패했던 건 늘 푹푹 끓인 게 원인이었음을 비로소 터득했습니다.
얘기가 또 음식이야기로 빠졌습니다. 제가 이렇습니다.
4월의 마지막 날은 명선씨와의 산책으로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하루의 일기가 되었습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은 4월이라, 또 T. S. 엘리어트가 ‘황무지’란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해서 우리는 4월이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엘리어트의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생명을 움틔우는 축복과 은총의 달임을 자연 속에서 새삼 깨닫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