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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이영주: 열무김치를 담그며
뉴욕 촌뜨기의 일기 (23)
열무김치를 담그며
양념은 밀가루 풀을 쑤어서 마늘과 양파, 사과를 함께 갈아 약간의 고춧가루만 넣어 핑크 모드로 만들었습니다. 버무릴 때 어슷썰기로 썬 파와 빨간 고추를 동그랗게 썰어 색깔로 넣었습니다. 열무김치엔 생강을 넣지 않아야 하는 게 열무김치의 팁입니다.
Photo: Young-Joo Rhee
요즘 한국은 셰프들의 전성시대입니다. 수많은 TV에서 경쟁적으로 수많은 요리 프로를 하고 있고, 인기 셰프들은 잘 나가는 연예인 부럽지 않은 스타 중의 스타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프로는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셰프들이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냉장고 주인이 원하는 요리를 15분 동안에 만들어주는 긴장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아무리 유명한 세프라고 해도 생방송에 나와서 15분이란 시간에 재료를 손질해서 음식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까지 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 나오는 셰프는 손을 벌벌 떨기도 하고, 내공이 대단한 셰프도 칼질하다가 손을 베는 실수를 하는, 어찌 보면 참 무서운 프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발한 착상으로 15분 안에 자기만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외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공자는 천하의 가장 기쁜 일로 음식을 먹는 것과 먹는 것과 남녀가 사랑 나누는 일을 꼽았습니다. 임어당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쁨을 주는 것 중 첫째가 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배가 비어 있으면 머리도 빈다는 발자크의 말도, 군대도 먹어야 진군한다는 나폴레옹의 말도, 새로운 요리의 발견이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간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는 브리야 사바랭의 말도 모두 절대적으로 공감됩니다. 이쯤 되면 ‘태초에 요리가 있었다. 불로 익힌 요리 덕분에 인류가 탄생했다.’는 리차드 랭엄 교수의 말이 실감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물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침팬지 생태 연구로 인류의 진화 생물학을 개척한 리차드 랭엄 교수는 불로 익힌 요리 덕분에 인류가 탄생했다고 주장하니 말입니다. 그만큼 요리는 인류와 절대절명의 관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요리 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느냐고. 민망한 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정성이에요. 대접할 사람들에게 내 정성을 모두 다해 만듭니다.”
사실 온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과 대충대충 만든 음식은 모양새에 있어서나 맛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대충 하다 보면 간도 잘 안 맞고, 태우거나 오버 쿡 하기 십상입니다. 재료 손질부터 양념, 조리, 접시에 내서 서빙하기까지 정성을 들이면 알맞은 간에, 알맞은 익힘에, 모양새도 흐트러지지 않아 미스코리아 보다 더 섹시한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요즘 ‘천황의 요리사’란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무엇 한 가지 진중하게 못하는 집안의 골칫덩어리 둘째 아들이 주인공입니다. 그 말썽쟁이가 어느 날, 군 부대에 가서 요리하는 것을 보면서 ‘요리’라는 신세계를 발견하고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희망으로 무작정 동경에 간 그는 형님의 도움으로 화족들만 드나드는 고급 레스토랑에 취직합니다. 초짜니까 설거지 담당인데, 주방 막내는 저녁 시간 끝난 후에 부엌 청소는 물론 사용한 냄비며 후라이팬까지 깨끗이 닦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도 저녁과 마찬가지로 씻어 놓았던 식기와 냄비, 후라이팬을 똑같이 씻어야 합니다. 하루는 꾀를 피워 하지 않았다가 주방장이 귀신같이 잡아내는 바람에 둘째는 혼비백산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그가 기특했는지 주방장은 어느 날 저녁 그를 따로 불러 “요리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니?”, 하고 묻습니다.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성이다. 간도 아니고 재료도 아니다. 정성, 즉 마음이다.”고 말합니다.
Photo: Young-Joo Rhee
마침 시장 보러 갔다가 연한 열무가 있기에 잔뜩 사왔습니다. TV를 켜서 다운해 놓았던 드라마들을 건성 보며 편안한 마음으로 열무 한 개 한 개를 천천히 다듬었습니다. 작은 고추만큼 자란 머리 부분이 아까워서 귀찮지만 껍질을 벗기고 반으로 갈라 집어 넣었습니다. 소금물에 절이고 깨끗이 씻어서 준비해놓은 양념에 버무려 김치통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양념은 밀가루 풀을 쑤어서 마늘과 양파, 사과를 함께 갈아 약간의 고춧가루만 넣어 핑크 모드로 만들었습니다. 버무릴 때 어슷썰기로 썬 파와 빨간 고추를 동그랗게 썰어 색깔로 넣었습니다. 열무김치엔 생강을 넣지 않아야 하는 게 열무김치의 팁입니다. 열무가 약간 쌉싸름하기 때문에 생강을 넣으면 그 쓴 맛이 더 살아나므로 옛어른들은 슬기롭게 생강을 빼고 담았던 것입니다. 멸치국물을 내어 매실효소도 타서 국물을 부으면 열무김치 담그기는 끝입니다.
저는 열무김치 냉면을 정말 많이 좋아해서 벌써 몇 번째 열무김치를 담는 것인지 모릅니다. 처음 열무냉면 얘기를 했을 때 딸들은 “난 열무김치 별로야.”하더니, 냉면을 먹고 나선 “와아, 엄마! 열무김치가 세상에서 젤 맛있어요.”하며 수선을 피웁니다.
열무김치를 담그면서 ‘요리는 정성이다.’라는 주방장의 말을 새삼 곱씹어 보았습니다. 리처드 랭엄 교수가 ”우리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 바로 불을 이용해서 요리를 해먹는 것이다. 요리해서 식생활을 해결하는 동물이 인간 말고 누가 있느냐.”면서, 불을 사용해 요리를 만들어 먹을 줄 알던 인류가 진화해서 오늘의 문화 동물이 됐다는 학설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우리의 생명이 달린 요리이니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의 생명줄을 소홀히 함에 다를 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사람을 정말 좋아합니다.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관계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방법도 그렇게 정성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아름다운 요리처럼 멋진 인생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요리가 즉 우리의 생존이니 말입니다.
비록 유명인이 되거나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딸들과 손자 녀석이 맛있게 먹고 있으니 제 삶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점심에 손자 블루는 제가 부쳐준 부추 호박전과 돼지 갈비 두 대를 게 눈 감추듯 끝냈습니다. 무조건 행복합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