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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그녀의 드레스 어깨 끈이 유발한 스캔달

'메트뮤지엄의 모나리자' 사전트의 '마담 X'는 누구인가?



존 싱거 사전트와 친구들  Sargent: Portraits of Artists and Friends

June 30-Oct. 4, 2015@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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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노이에 갈러리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의 '진주 귀고리를 단 소녀'가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뮤지엄의 센터피스라면,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모나리자는 누구일까?


메트의 미국미술 소장품 중 '모나리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존 싱거 사전트의 '마담 X의 초상'이 될 것이다. 

6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메트뮤지엄에서 열리는 특별전 '사전트: 예술가들과 친구들(Sargent: Portraits of Artists and Friends)'에 전시 중인 90여점의 인물화 중에서도 센터피스 단연 '마담 X'다.


1884년 파리 살롱에서 미술계와 사교계를 경악시키며, 스캔달이 된 그림. 존 싱거 사전트를 런던으로 '피신'시키고, 마침내 흘러내린 그녀의 드레스 어깨 끈을 수정하게 만든 그 그림 속의 마담 X는 누구일까?



Madame_X_(Madame_Pierre_Gautreau),_John_Singer_Sargent,_1884_(unfree_frame_crop).jpg 마담X의 초상화(디테일)



마담 X는 당대의 킴 카다시안이었다. 

본명 버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 1859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여덟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남북전쟁을 피해 어머니와 파리로 이주한다. 그리고,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피에르 고트로와 결혼해 사교계를 누볐다. 모래시계같은 몸매에 패션 센스가 뛰어난 부인. 창백한 피부에 라벤다 스킨 크림과 파우더로 분칠하고, 머리와 눈썹도 염색할 정도의 메이크업 기술이 뛰어난 사교계의 명사였다. 그리고, 바람끼로 유명한 상류사회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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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30세의 존 싱거 사전트                                        Samuel Jean Pozzi, 1881



1881년 파리에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은 사전트도 마담 고트로에 당연히 관심을 갖게된다. 사전트는 '사교계의 여왕' 마담 고트로를 그려서 파리 미술계의 사다리에 오를 계획을 세운다. 초상화를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트가 모델로 초청한 것이다.


사전트는 1981년 파리의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바람둥이로 소문난 '닥터 포찌(Dr. Pozzi)'를 전신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탈리아계 산부인과 사무엘 장 포찌(Samuel Jean Pozzi,1846-1918)는 골동품과 코인 컬렉터이자 바람둥이로 소문나 있었다. 마담 고트로는 그의 정부 중 하나였다. 사전트는 포찌의 바람끼를 표현하기 위해 빨간색 가운에 빨간 커튼을 배경으로 전신을 그렸다. 카리스마, 우아함과 섹시함을 갖춘 포찌를 완성한 후 자신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조그만 파티를 열자 포찌의 애인이었던 마담 고트로가 나타났다.


사전트와 세살 적은 고트로는 파리에 살고 있는 미국인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게다가 사전트의 스튜디오는 고트로의 집에서 몇 블럭 떨어져 있었다. 수많은 파리 화가들의 러브콜을 거절해온 고트로는 1883년 마침내 사전트의 모델이 되기로 동의한다. 



000Sargent-on-couch_Madam_X-study.jpg 메트뮤지엄 소장 마담 고트로 스케치



사전트는 고트로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연필, 수채화, 유화로 30여점의 스케치를 했다. 

그중 한점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뮤지엄이 소장한 "마담 고트로 건배하다(Madame Gautreau Drinking a Toast, 1882-83). 메트뮤지엄은 소파에 널부러진 마담 고트로 드로잉을, 하버드뮤지엄은 수채화를 스케치를 소장하고 있다. 



Madame_Gautreau_by_John_Singer_Sargent_circa_1883.jpeg 하버드뮤지엄 소장 마담 X 수채화, 1983



한편, 런던의 테이트가 소장한 오리지널에 가장 가까운 마담 고트로 드로잉에는 왼쪽 끈이 없는 상태다. 사전트가 어깨 끈의 위치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마담 고트로는 미모였지만, 골치아픈 모델이었다. 딸 양육, 사교 모임, 손님 접대에 분주했던 마담은 포즈를 취하는 것을 지루해해서 사전트가 "그릴 수 없는 미인, 가망없는 마담 고트로의 게으름"이라고 불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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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인 여인 마담 X. Madame Gautreau Drinking a Toast, 1882-83, Isabella Stewart Gardener Museum



늘 그러하듯 사전트는 의상과 배경을 상의했다. 

사전트는 흰 드레스를 좋아하지만 고트로의 창백한 피부를 돋보일 수 있는 검은색 새틴 드레스를 권했다. 새틴 드레스의 끈은 마치 샤넬 백처럼 보석이 박힌 스트랩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둥그런 테이블 옆에 세워 프로필을 그렸다. 



000Study_of_Mme_Gautreau_by_John_Singer_Sargent_c1884.jpg 마담 고트로 습작에는 왼쪽 끈이 없다. 테이트 런던 소장품.     



완성된 마담 고트로 초상화는 테이블에 손을 기대며 옆으로 서서 도도한 성격에 몸매와 프로필이 강조되었다. 

게다가 드레스의 오른쪽 어깨 끈이 내려가서 유혹적이며, 에로틱한 느낌을 풍겼던 것. 사전트는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명수다. 바람둥이 사교계의 유부녀 마담 고트로의 어깨끈을 흘러내리게 하면서 그녀의 끼를 천명한 것이다. 고트로는 사전트가 그리는 과정을 보면서 걸작이라고 믿었다.



000Photo_of_Madame_X.JPG 파리 살롱에 나온 오리지널 'Portrait de Mme ***'(1884)



마침내 1884년 파리 살롱에 나온 고트로 초상화 "마담 ***의 초상(Portrait de Mme ***)"에 대해 미술계와 사교계는 일제히 경악했다. "그런 호러; '살아 있는 육체보다 죽은 육체를 닮았다'는 평까지 혹평이 이어지며 스캔달이 된다. 살롱에서는 그림을 철수하라고 종용했지만, 사전트는 거부했다.


파리가 경악한 것은 모델이 실물이었기 때문이다. 마네와 앵그르가 누드 여인을 그렸을 때도 경악하지 않았던 파리였지만, 실존하는 사교계 여인의 어깨에 흘러내린 끈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교계와 미술계의 위선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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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사전트의 파리 스튜디오에 걸린 마담 고트로의 초상.



스캔달 후 사전트는 혹평의 화살을 피해 런던으로 떠났고, 고트로는 휴양지 브리타니로 숨어버렸다. 파리에선 악명높았지만, 오히려 영국과 미국에서 사전트의 명성은 높아지게 된다. 


사전트는 영국으로 이주한 후 작가들과 교류하는 한편, 파리의 스튜디오에 고트로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몇년 후 사전트는 덧칠해서 어깨 끈을 올려 그렸다. 그리고, 제목을 '마담 X(Madame X)'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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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트가 수정한 어깨끈(왼쪽).



1911년 고트로의 외동딸은 33세에 사망하고, 고트로는 1915년 56세로 생을 마감한다. 이듬해 사전트는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마담 X'를 팔았다. 이때 사전트는 "내가 그린 것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담 고트로의 초상은 이후 '마담 X'로 불리우게 된다. 2004년 데보라 데이비스가 소설 '스트랩리스(Strapless)'를 냈으며, 지오이아 딜베르토의 소설 '마는 마담 X: 소설(I Am Madame X: A Novel)'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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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줄리안 무어가 파리판 '보그' 커버에 마담 X로 변신했다. 마담 X의 스토리를 다룬 소설 2권.


*The Artists Project: Kehinde Wiley on John Singer Sargent <Video>

http://artistproject.metmuseum.org/1/kehinde-wiley


 

☞ John Singer Sargent(1856. 피렌체–1925, 런던)  


IMG_4504-300-2.jpg  자화상

당대 대표적인 초상화가. 베니스, 티롤, 중동, 몬타나, 메인, 플로리다 등 세계를 여행하며 유화 900여점, 수채화 2000여점을 남겼다.

미국인 안과의사인 아버지 피츠 윌리엄과 어머니 마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다.  누이가 두살 때 사망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신경쇠약에 시달리자, 치유를 위해 해외에서 살게 된다. 사전트 부부는 파리에 집을 두고,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위스의 휴양지에서 보냈다. 

존 싱거 사전트는 185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필라델피아로 돌아가고, 어머니와 존, 그리고 4명의 동생이 함께 해외에서 살았지만, 이중 두 아이만 어린 시절을 넘기며 살아남았다.

그는 정식 학교교육을 받지 않고,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의 홈 스쿨링을 받았다. 어린 사전트는 스케치북을 들고 유럽의 뮤지엄, 교회를 돌면서 성장했다. 


433px-John_Singer_Sargent_-_Morning_Walk1888-privatecollection.jpg 모네의 영향을 받은 Morning Walk, 1888, 개인소장

여행을 통해 미술, 음악, 문학에 조예가 깊고, 불어, 이탈리아, 독일어에 능통한 청년으로 자란다. 르네상스 화가 미켈란젤로,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존경하며 화가를 꿈꾸었고,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학교 재조정 사정으로 파리로 이주해 카롤러스-듀랑으로부터 초상화를 배웠다. 이후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수학한다.
1874년 스타 미술학도로 떠오르면서 드가, 로댕, 모네, 휘슬러를 만났다. 이후 스페인으로 가서 거장 벨라스케즈의 그림을 연구하고 거장의 테크닉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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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거 사전트는 1884년 파리 살롱에 드레스 왼쪽끈이 흘러내린 ‘마담 X의 초상(Portrait of Madame X/Madame Pierre Gautreau)’를 출품해 스캔달을 일으키며 거센 혹평을 받는다. 이에 사전트는 파리를 도피, 런던으로 예술적인 망명을 했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이 소장한 이 초상화는 사전트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영국의 시골에서 묻혀서 풍경화를 그리며 지내던 사전트는 1885년 지베르니의 클로드 모네를 방문했다. 모네와의 만남 이후 인상주의 테크닉을 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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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D. 로커펠러, 1917                                                     센트럴파크의 조경건축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1895

 
1887년엔 뉴욕과 보스턴을 방문한다.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초상화 등 20여명의 초상화를 위임받았다. 사전트가 첫 개인전을 연 곳은 보스턴이었다. 이후 사전트는 초상화가로 유명해져, 미국에서 런던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사전트는 무려 2000여점의 수채화를 그렸다. 위임받고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실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풍경을 그렸다. 

이곳저곳 여행하며 수채화를 그리는 시간이 그에겐 스트레스 해소 타임이었다. 사전트는 자연, 건축, 외국인, 산 등을 그렸으며, 그중 베니스 곤돌라를 소재로 한 풍경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베두인, 어부들을 그렸으며, 말년에는 메인, 플로리다와 몬타나 등지에서 가족, 친구, 정원, 분수대 등 수채화를 그렸다.


09.838_PS6_428H.jpg 베니스의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트 교회, 1904


1909년 사전트는 뉴욕에서 86점의 수채화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이중 83점은 브루클린뮤지엄에서 구입했다.
사전트는 1922년 뉴욕 그랜드센트럴 내 아트갤러리를 오픈했으며, 그랜드센트럴미술학교도 창립했다. 1924년 이 갤러리에서 사전트의 회고전이 열렸다.

사전트는 이듬해 4월 14일 영국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동성연애자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프랑스 화가 폴 엘류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의 스케치가 거실에 죽을 때까지 걸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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