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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이수임: 30불짜리 결혼 반지
창가의 선인장 (21) 대학동기에서 남편으로
30불짜리 결혼 반지
“나 영주권 좀 해 줄래?” 용기 내어 말했다.
“너 요즈음 영주권 하는데 돈 많이 줘야 해”라고 응수하는 게 아닌가.
“나 곧 비자가 끝난단 말이야. 얼마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주 신이 났다.
Soo Im Lee, 30-dollar wedding ring, 2008, 9 x 11.5 inches
비자가 끝나가고 있었다. 1984년 1월 28일이 되면 미국 체류 비자가 만료된다. 학교는 졸업했는데 직장은 구하지 못하고, 노처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학까지 보낸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민이 많다.
인생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바뀌게 된다. 런드로맷에서 빨래를 하며 미술잡지를 보고 있는데 한국 사람인 듯한 중년 남자가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사람이세요?”하고는 내가 보던 책을 들여다보며 “혹시 미술 공부하세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인연으로 나의 비자 문제가 해결될 줄이야! 알고 보니 대학 선배였다. “애인 있어? 장가 못 간 후배가 있는데 어때?” 주말에 자기 집으로 오란다. 유학 생활에 찌들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완할 수 있는 옷을 꺼내 이리저리 입어 보지만 마땅한 게 없다.
수줍어서 쭈빗쭈빗하며 선배의 아파트에 들어서는데 “야! 너 여기에 어떻게 왔어?"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자세히 보니 대학교 4학년 때 이민 간 동기 동창이다. “너 아직 시집 못 갔니?” “그러는 너는?” 하며 쳐다보니 '나야 남잔데 아직 늦지 않았다.'는 느긋한 표정이다. 대학 시절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서로가 말 한마디 해본 적도 없는 사이였는데.
동기 동창은 영주권도 있고 남자라 느긋하지만, 나는 비자가 끝나면 서울에 돌아가야 했다. 혼기를 놓친 딸 때문에 걱정하실 부모를 볼 생각을 하니 조급했다. 그나마 부모 멀리 살아야 효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영주권 좀 해 줄래?” 용기 내어 말했다. “너 요즈음 영주권 하는데 돈 많이 줘야 해”라고 응수하는 게 아닌가. “나 곧 비자가 끝난단 말이야. 얼마면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주 신이 났다.
급한 내가 차이나타운에 있는 보석상으로 갔다. 내 반지는 30불, 동기 것은 50불을 주고 샀다. 비자가 끝나기 하루 전날, 택시에 동기를 태우고 친구 서너 명과 함께 시청으로 달렸다. 주례가 1분 45초 만에 뭐라 뭐라하며 끝내는 것을 “다시, 다시” 하며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이 혼인서약은 끝났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 실락기에서 친구들과 빽알을 곁들인 점심을 먹으며 떠든 후 지하철 입구에서였다. “이제 됐니?” 하며 묻는 동기에게 “그래 됐다.” 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로, 나는 나의 아파트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L.A. 사시는 동기의 아버지가 한번 만나 보고 싶다며 비행기 표를 보내주셨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정식 결혼식도 해주고, 다이아 반지도 해 주겠단다. “저 죄송한데요. 다이아 반지는 필요 없고요, 반지 대신 돈으로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니 사색이 되며 “왜 그러는데?” 하셨다. “그 돈으로 생활 기반을 잡고 싶습니다.”
결혼 생활 31년째, 나는 아직도 다이아 반지가 없다. 남편은 일 년에 한 번씩은 커다란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사 주겠다며 성화지만, 난 이 30불짜리 몇 금인지도 모르는 반지가 좋다.
나이가 드니 둘 다 손가락이 굵어져서 반지가 빠지지도 않는다. 가끔은 살찐 남편의 손가락에 묻혀 버린 가느다란 반지를 자르자고 조른다. "손가락 다치겠어." “무슨 소릴하는 거야. 괜찮아, 이 귀중한 반지를.” 남편은 흐믓한 표정으로 반지를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