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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
2015.10.28 21:53

(126) 이영주: 그대, 30세기를 생각해 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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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촌뜨기의 일기 (26)



그대, 30세기를 생각해 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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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한국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달항아리 연작 '25가지의 소망' 앞에서 강익중 작가. 



마 전, 호리카 모임에서 화가 강익중을 만났습니다. 아시다시피 회원이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작은 모임입니다. ‘호리카 클럽’은 강익중 식으로 말하자면 ‘홀로이거나 이별하고 돌아온...”이들의 모임으로, 강익중은 그날 그렇게 말했다가 회원들로부터 세차게 항의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곧 “홀로이거나 이별하고 돌아온 퀸카들”이라고 정정해서 용서는 받았습니다. 하하.  


여자들 모임에서 홀로 남성이었던 강익중은 그날, 그러나 기죽는 일도 없이 그야말로 유장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결코 달변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에선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졌습니다. 그의 말 중에서 제일 좋은 말이 “나는 사람을 만나면 질문을 많이 해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수많은 글로벌 유명 인사들과 만나 그는 질문을 던지고 그들은 대답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제겐 위인전 몇 권을 읽은 것보다 더 유익해서 오랜만에 큰 대오(大悟)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디자이너 올리비에 데스켄스는 이 세상은 95%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과 5%의 문제를 푸는 사람들로 구분합니다. 벨기에의 젊은 디자이너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벌써 꿰뚫고 있습니다. 힐러리에게 왜 정치를 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녀의 머리엔 미국이 아니라 이미 ‘세계’로 꽉 차 있었습니다. 클린턴이나 힐러리는 이미 고등학교 학생 시절부터 인턴으로 국회위원들과 국가 정책을 세우는 일에 참여한 뼈 속까지 정치인들입니다. 뉴스위크 회장은 기자로 출발해서 회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머릿 속에 정직, 조국, 우주, 세계가 꽉 차 있습니다. 기자 출신인 제가 새겨들어야 할 덕목이었습니다.


프루덴셜 사장의 평상심 얘기도 범상치 않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자기 얼굴을 비추듯 마음을 들여다 본다고 합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은 평상심을 그렇게 노력해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굴지 회사의 대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미국 식당계의 젊은 피 앤서니 보뎅의 꿈은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매일 세계에서 8백만의 어린이들이 굶고 있습니다.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사람의 머리에도 이렇게 지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두 분 다 세상을 뜨신지 오래지만, 김환기 화백의 부인인 김향안 선생은 생시에 강익중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강익중은 그분께 세 가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아침 먹기 입니다. 건강해야 예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의 첫 번째 덕목도 건강입니다. 둘째는 팁 많이 주기 입니다. 사실 팁에 인색한 사람은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팁에 인색한 사람들이 갑질은 제대로 합니다. 셋째, “기회와 유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입니다. “어떻게 구별해요?”, 라고 여쭈니까 “네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 보다는 민족에 옳은지 세계에 옳은지, 그리고 역사에 옳은지를 보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행운의 네 잎 클로바를 찾는다며 행복(세 잎 클로바)을 짓밟는다’는 속담이 네덜란드에 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 사는 할머니 강익중 콜렉터가 해준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행복한 줄도 모르고 그저 행운이라는 네잎클로버 찾기에 골몰하느라 스스로의 행복을 짓밟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의 어머니였는지 장모님이었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가는 사람과는 절대 사귀지 말라고 했다는 말도 마음에 새겨둘만 했습니다.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의 가슴은 결코 따뜻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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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코네티컷 스탬포드의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강익중. 사진: 김옥기 Okkee Kim



날 이야기의 백미는 백남준 선생의 말씀이었습니다. 강익중과 처음 만났을 때 백남준 선생이 물었습니다. “30세기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때가 20세기 말이었으니 강익중은 “21세기 말씀하십니까?”하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천 년 후의 30세기.”라고 백남준 선생이 정정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강익중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백남준 선생님은 ‘낮에 별을 보는 무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에엣? 30세기?”, 갑자기 세상이 어떻게 된 것 같았습니다. 과연 백남준 선생이 시사하신 진의가 무엇인지 계속 열심히 생각해볼 작정입니다.  


강익중의 결론은 결국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최고가 된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엔 세계 평화가, 우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인식은 천 년 전과 오늘, 천년 후를 평행선 상에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순수 당당’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가슴이 다 설레었습니다. 순진과 순수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수'를 보고 두는 사람이 아니라 '판'을 보고 두는 사람들이 결국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빼앗고 돈을 빼앗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기여하고, 연결하고, 세상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할 땐 외경의 마음까지 솟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 모두는 강익중의 말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 친구인 명선씨가 강익중의 베스트 프렌드라서 가끔 그의 집에 가긴 했지만,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앉아 긴 얘기를 나눈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소박하고 겸손해서 만나면 그냥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가 유명한 아티스트라고 특별히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워낙 순박한 그의 인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그와 그토록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백남준 선생 이래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습니다. 강익중 팬클럽이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제가 아니라도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세계적 아티스트입니다. 그의 작업실을 겸한 차이나타운의 펜트하우스는 글로벌 모든 명사들의 한국 사랑방이 된지 오랩니다. 그와 같은 뉴욕 하늘 아래 산다는 일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이쯤에서 저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 30세기를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이영주000new100.jpg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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