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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5.11.02 13:25

(127) 한혜진: 가을 소나타 Autumn So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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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 (18) 가을 영화는 슬프다 



가을 소나타 Autumn Sonata


18가을소나타4.jpg 브루클린 식물원


을 길을 걸어 본다.  가을의 행보는 모든 지난 것과의 대면이다.  이미 길을 떠난 철새들의 행방이 묘연하고, 그들의 지저귐도 기억의 반추 속에서나 들려온다.  대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거리며 와닿는 마른 이파리들이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독보적인 기능인 감정이입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가을,  거리엔 황금 낙엽이 깔리고 이른 저녁시간이면 벌써 땅거미가 밀려드는 계절, 마종기 시인의 시 한편이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제목이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뭉클한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선사하는 질감을 우리 피부가 느끼기 때문이리라.  서로 부르고 있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지금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있는 나무와 이파리들은 지난 세월 행복한 동거를 했던 것이겠지…라고.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사람은 서로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존재이다.  즉,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자신을 알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가족,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딸이라는 숙명적인 관계가 서로에게 고통뿐인 불행한 동거였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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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Autumn Sonata, 1978)에서 리브 울만(왼쪽)과 잉그리드 버그만.


*Autumn Sonata - 예고편 <YouTube>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제목은 ‘가을 소나타’.  제목에 이끌려서 비디오로 만나볼 수 있었다.  잉그마르 버그만(베르히만)이라는 스웨덴의 명감독과 잉그리드 버그만, 리브 울만이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삼박자가 빚어내는 짧은 단편 소설같은 영화였다. 차를 타고 가을길을 달려오는 엄마(잉그리드 버그만), 7년만에 이루어진 딸(리브 울만)과의 만남을 위해서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며 반가운 포옹을 끝낸 그들은, 엄마가 거처할 방으로 서둘러 올라간다.  쉴새없이 늘어놓는 엄마의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예감하게 된다.  


엄마의 표정을 살피던 딸은 담담히 병에 걸린 동생이 함께 살고 있음을 알린다. 엄마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죽기보다 싫은 일을 만난 듯, 괴로워한다. 하지만, 동생의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엄마는 마치 연기를 하듯, 가식적인 웃음과 함께 인자하고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보인다. 딸은 어릴 적, 늘 마음과는 다른 가식적 표현을 하던 엄마의 모습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방으로 돌아온 엄마는 딸의 의도적인 충격요법을 눈치채지만, 저녁식사를 위해서 새빨간 드레스를 골라입으며, 우아한 여성, 세련된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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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엄마와 딸, 7년 만의 재회.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가을 소나타' 중에서.



화의 본론은 그 다음부터이다.  자연스럽게 엄마를 과거 불행했던 동거의 현장검증으로 이끄는 일이 일어난다.  악몽을 꾸다가 밤중에 깨어난 엄마와 같이 있게 된 딸은 체한 음식물을 토해내듯 말을 쏟아낸다.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어릴 적 엄마는 내곁에 있어주지 않았어요. 항상 연주여행을 다니고, 집에 있을 때에도 연습하느라고 바빴지요. 나는 항상 외로웠지요. 엄마는 예쁘고 좋은 냄새가 났어요. 그러나, 그건 낯설음이었어요. 나는 항상 엄마 앞에서는 초라했지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못했어요. 그것은 항상 나에게 장애물이 되었어요.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었다면,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격정적인 감정을 나에게 퍼부어댔으며,  비뚤어진 정서적 불구를 나에게 전수해주었어요.”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으며 흔들린다. 그리고 얘길한다. 너의 증오심이 놀랍다고. 너무 이기적이고 어린애같았던 엄마를 용서하라고.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딸은 엄마를 용서하지 않는다. 엄마만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은 댓가를 혹독히 치른 셈이다. 



18가을소나타2.jpg

브루클린 식물원



영화는 축복이 되어야할 엄마와 딸이라는 연결고리가 풀어낼 수 없는 매듭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은 이렇게 느끼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는다. 쫓기듯 떠나버린 엄마에게 띄운 딸의 편지를 통해서 따뜻한 담요 한장을 덮어주듯우리의 마음을 다독인다.  “엄마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군요. 엄마에게 사랑을 주기보다는 많은 요구를 했던 것.  용서를 빌어요.  모든 것이 너무 늦은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걸 알아요. 우리에겐 사랑을 표현할 많은 기회가 있지요. 포기안할래요. 절대로 늦은 건 아니니까요.”  이 가을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지 않은지 귀기울여 봐야겠다. 사람은 슬픔에 더 민감한 피조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영화는 슬프다. 그리고, 용서는 늘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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