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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 그리고 두 여인 리 크래스너 루스 클리그만

 

어떻게 잭슨 폴락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됐을까?

 

*MoMA에서 잭슨 폴락 컬렉션 회고전(Jackson Pollock: A Collection Survey 1934-1954)이 11월 22일부터 열리고 있다. 

http://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3364180&mid=NYCB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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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크래스너 하우스의 폴락과 크래스너가 쓰던 스튜디오. 마루엔 폴락의 액션 페인팅 흔적이 남아 있다.

 

 

최근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의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센터(Pollock-Krasner House & Study Center)를 방문했다.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선구자 잭슨 폴락(Jackson Pollack)과 그의 아내였던 화가 리 크래스너(Lee Krasner)가 살며 작업하던 집이다. 

 

1945년 빈털털이였던 폴락은 화가 리 크래스너와 맨해튼 교회에서 하객없이 결혼한 후 이스트햄턴으로 이주하게 된다. 

1.56에이커의 부지에 나무로 만든 집을 5000달러에 매입했다.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에게서 2000달러를 빌리고, 은행에서 모기지를 받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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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과 크래스너는 결혼 후 맨해튼을 탈출, 이스트햄턴의 스프링에 보금자리 겸 작업실을 마련했다. http://sb.cc.stonybrook.edu/pkhouse

 

 

2006년 11월 폴락의 'No. 5'(1948)이 1억4000만 달러에 팔리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회화로 기록됐다. 폴락의 작품 가격은 치솟고 있는 중이다.

 

알콜 중독, 우울증, 허드슨강에서 자살시도, 그리고 음주운전으로 44세의 생을 마감하는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폴락-크래스너 하우스와 스튜디오에선 자기파괴적인 천재 화가 폴락과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화가 아내 리 크래스너의 예술혼이 숨쉬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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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에드 해리스가 주연, 감독한 영화 '폴락'. 크래스너 역의 마사 게이 하든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에드 해리스가 주연하고 감독한 영화 ‘폴락(Pollock, 2000)’을 보면서 폴락-크래스너 하우스와 작업실을 재현한 장면들이 실감있게 다가왔다. 

 

그런데, 영화에서 44세의 폴락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동승했다가 살아남았던 애인, 26세의 화가 루스 클리그만(Ruth Kligman)이라는 여인이 궁금해졌다. 영화에서 마지막 20분 전에 나타나는 루스 클리그만 역은 제니퍼 코넬리가 맡았다.

 

그녀는 누구일까? 폴락 사망 후 윌렘 드 쿠닝와 연애했고, 프란츠 클라인과 스튜디오를 나누어 쓰고, 재스퍼 존스에게 청혼하고, 앤디 워홀의 친구였다는 클리그만. 리 크래스너와는 앙숙일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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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스너와 폴락(1949, 왼쪽), 폴락의 애인이었던 무명화가 루스 클리그만은 1956년 폴락 교통사고에서 생존했다.

 

 

‘이유 없는 반항아’ 제임스 딘처럼 요절한 자기파괴주의자 잭슨 폴락과 로댕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카미유 클로델처럼 살았던 리 크래스너, 그리고 스캔달의 화가, 루스 클리그만… 세 화가의 드라마틱한 관계가 다분히 영화적이다. 

 

 

'천재 화가와 두 여인' 시리즈 연재 순서 

 

<1>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1912-1956)

<2>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 (1908-1984)

<3> 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1930-2010)

<4>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

<5> 뉴욕 뮤지엄의 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1912-1956)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중심의 미술사를 미국으로 돌려놓은 인물. 

그림의 본질을 뿌리채 뒤흔들어놓은 화가.

 

애정 결핍, 알콜중독, 우울증으로 허드슨강에 몇 차례 몸을 던졌던 자기파괴주의자. 그의 삶은 빈센트 반 고흐를 닮았고, 그의 비극적 엔딩은 다분히 할리우드 스타 제임스 딘을 연상시킨다.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반항의 화가가 어떻게 미 추상표현주의의 기수이자,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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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은 1912년 와이오밍주 코디의 양목장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폴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아버지 폴락의 성은 원래 맥코이(McCoy)였다. 친부모가 1년 사이로 사망하면서 이웃에 입양되어 성이 폴락이 됐다. 어린 잭슨은 농부이자 토지 측량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그랜드 캐년을 구경했으며 이때 대자연이 예술가적인 감성에 녹아들게 된다. 

 

 

00000000pollock-right-pics2-jpanddad.jpg 아버지와 잭슨 폴락. 그랜드 캐년에서.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잭슨이 8세 때 가정을 버렸다.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치코에서 성장하면서 잭슨은 막내였던 탓에 늘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그리고, 큰 형 찰스를 아버지로 섬겼다. 화가를 꿈꾸던 어머니 영향으로 형 찰스와 샌포드(샌디)가 화가를 꿈꾸었으며, 형들을 따라 잭슨 자신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후에 LA의 미술고교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하지만, 싸우다가 퇴학당한다. 

 

1930년 18세가 된 폴락은 형 찰스와 함께 살며 미술 공부를 하기위해 뉴욕으로 왔다. 1929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개관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이름 폴을 버리고 잭슨 폴락을 쓰게 된다. 

 

폴락은 형의 스승인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에게서 수학하면서 멕시코 출신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의 벽화 작업을 목도한다. 이것이 폴락이 12년 후 대형 작업을 하게된 영감으로 여겨진다. 폴락은 스승 벤튼의 아들 베이비시터로 일하면서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벤튼 가정은 폴락이 갈구했던 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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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ock, Untitled (Western Scene), 1930-33, Oil and crayon on wooden lid of a cigar box, 6 1/2 x 9 1/8 x 2 3/4", The Museum of Modern Art

 

 

193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심한 우울증에 빠졌으며, 형 찰스의 부인과 싸우다가 전시회를 앞둔 형의 그림을 도끼로 찢어 쫒겨나게 된다. 이듬해 역시 화가를 꿈꾸던 작은 형 샌포드가 뉴욕에 와서 그를 돌보게 된다.

 

폴락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미국은 공황기에 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공익미술작품 프로젝트(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s Federal Art Project)였다. 가난한 화가들은 도로, 빌딩 등 건설공사의 벽화 등을 그리면서 돈을 벌었다. 폴락은 주당 20시간 일해서 24달러 86센트를 받았다. 화가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도 PWA에 가담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이즈음 폴락은 인디안 원주민의 모티프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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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시기를 거쳐 40년대 후반 액션 페인팅을 시작하게 된다.

Jackson Pollock, Bird, 1938-41, Oil and sand on canvas, 27 3/4 x 24 1/4", Museum of Modern Art

 

 

하지만, 잭슨 폴락의 음주벽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37년 스물다섯살 때부터 정신치료를 받으면서 인디안 원주민의 상징주의 미술에 흥미를 갖게 됐으며, 1937년 MoMA에서 열린 피카소 전시회에서 실험정신에 크게 감흥을 받는다.

 

폴락이 찰스와 샌디, 두 화가 형들과 이스트빌리지 8스트릿 아파트를 나누어 쓰면서 작업했다. 형들은 잭슨의 고질적인 우울증 치료하기 위해 정신분석을 받게 했다. 폴락은 의사로부터 칼 융의 정신분석학을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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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ock, Sheet of Studies, c. 1939-42), Charcoal and pencil on paper, 11 x 14", The Museum of Modern Art

 

폴락과 크래스너가 만난 것은 1941년. 

리 크래스너는 뉴욕에서 열린 그룹전 ‘프랑스와 미국 회화’전에 초대되었다.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 유럽 회가들과 함께 참가한 그룹전에서 낯선 미국 화가 ‘잭슨 폴락’의 이름을 발견한다. 이후 폴락의 작업실을 예고없이 방문, 그의 에너지 넘치는 캔버스에 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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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의 폴락과 크래스너

 

이즈음 이즈음 뉴욕에서 ‘아트 오브 디스 센추리(Art of This Century)’라는 갤러리를 운영하던 페기 구겐하임(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은 폴락이 구겐하임 목수로 일할 때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 계약을 맺는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페기 구겐하임의 당시 남편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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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잭슨 폴락과 로맨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 폴락은 구겐하임 집의 벽화를 그려주고, 그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는 벽난로에 소변을 보는 망나니짓을 했다.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소장.

 

 

1945년 폴락과 크래스너는 맨해튼 마블 콜리지에이트 교회에서 결혼하고, 맨해튼 스튜디오에서 탈출하기위해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으로 가서 스프링 지역에 자리한 어부의 집을 본다. 페기 구겐하임(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 2000달러를 빌려주어 다운페이를 한 후 매월 용돈을 받아 쓰던 시절이었다. 

 

이즈음 폴락은 대서양 바다와 자연 환경으로 활력을 얻고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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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폴락은 외양간을 고쳐서 작업실로 썼다. 폴락의 작업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스튜디오를 투어할 때는 덧버선을 신어야 한다. 

 

폴락은 "망할놈의 피카소, 그가 모든 걸 해버렸어!"라고 말했다. 그의 화두는 새로운 작업 방식이었다. 

 

1946년 즈음 폴락은 스튜디오에서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를 걸어다니면서 물감을 떨어트리는 '올 오버(all-over)'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물감을 떨구는 작업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계속된다.

 

폴락은 재즈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빌리 할러데이 등의 재즈 연주도 폴락의 즉흥 페인팅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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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과 재즈는 즉흥성에서 닮았다. 그는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빌리 할러데이 등을 즐겨들었다. Pollock-Krasner House

 

 

폴락을 미국의 피카소로 만드는데는 파워 아트딜러와 비평가가 필요했다. 

 

미술계의 큰손 페기 구겐하임의 지원과 함께 유대인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는 유럽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와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잭슨 폴락을 당대 최고의 화가로 평가했다. 폴락을 비롯한 윌렘 드 쿠닝, 한스 호프만, 바넷 뉴만, 클리포드 스틸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모던 아트의 차세대 주자들이라고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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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그린버그                                           잭슨 폴락(왼쪽부터), 클레멘트 그린버그, 헬렌 프랭켄탈러, 리 크래스너, 1952년 경    

 

 

한편, 1946년 페기 구겐하임은 세번째 남편 막스 에른스트가 화가 도로시아 태닝과 외도를 하면서 이혼에 이르게 된다. 구겐하임은 이듬해 베니스로 이주하면서 폴락을 베티 파슨스(Betty Parsons)에 넘겨준다. 

 

파슨스는 폴락에게 구겐하임처럼 매달 용돈을 주는 대신 그림이 팔릴 때마다 지불하기로 한다. 베티 파슨스는 당시 소위 ‘뉴욕학파(New York School)’였던 폴락, 바넷 뉴만,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등을 소개한 갤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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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라이프'지에 대서특필되며 미국의 대표작가로 부상한 잭슨 폴락.

 

 

1949년 파슨스에서 첫 개인전을 앞두고 ‘라이프(Life)’ 잡지가 “이 남자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생존 화가인가”라는 제목으로 4페이지에 대서특필한다. 잭슨 폴락은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된다.

 

1947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은 매진됐고, 폴락은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아방 가르드 화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햄턴의 하우스에 배관과 난방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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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 갤러리의 잭슨 폴락 전시회 게스트북에 남긴 관람자의 비난 문귀도 폴락-크래스너 하우스에서 볼 수 있다.

 

 

명예와 돈을 얻었지만, 폴락의 주변에는 적들이 늘어났다. 

동료 화가들은 폴락을 질시했고,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자기 홍보에 혈안이 된 폴락을  ‘사깃꾼’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생겨난다. 심지어는 스승 토마스 하트 벤튼도 폴락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1950년 파슨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폴락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이 때 전시된 작품 중엔 오늘날 걸작으로 평가되는 ‘Number 4, 1950’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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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의 액션 페인팅 말기 걸작. 2010년 MoMA의 '뉴욕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t New York)전에서.

Jackson Pollock, One: Number 31, 1950, Oil and enamel paint on canvas, 8' 10" x 17' 5 5/8", The Museum of Modern Art

 

 

이에 폴락은 무의식으로부터 생산되는 그림, 물감을 떨구는 기법을 포기하고, 흑백의 그림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다시 깊은 우울증에 빠진 폴락은 맨해튼의 화가들의 아지트 시다 바(Cedar Bar)로 가서 문 닫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면서 싸움으로 마감하기도 했다.

 

폴락의 작품을 사려는 콜렉터들이 늘어나면서 폴락의 스트레스도 심해져 술에 의지하게 된다. 이에 크래스너는 폴락의 어머니를 집으로 불러 폴락을 안정시켰고, 이즈음 걸작 ‘The Deep’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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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A- 포드 자동차 안에서 잭슨 폴락, 1952. Photo: Hans Namuth

 

 

크래스너는 폴락 뒷바라지로 작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른다. 이들의 결혼이 파경 일보 직전에 이르고, 폴락의 건강도 쇠약해졌다. 

이즈음 폴락은 외도를 하기 시작하고, 1956년 즈음엔 그림에서 손을 놓게 된다. 폴락이 루스 클리그만과 연애 중인 걸 알게된 크래스너는 파리로 여행을 떠나고, 그 자리에 클리그만이 옷을 챙겨 들어가 살게 된다.

 

 

 000the-last-pollock_2728930b.jpg Photo: Ruth Felicity Kligman Trust

폴락 최후의 날, 44세 폴락과 26세 무명화가 루스 클리그만.  

 

 

1956년 8월 11일 루스 클리그만은 미용실 리셉셔니스트였던 유대인 친구 에디스 멧처(21)를 초대해 폴락과 함께 술마시러 간다. 그날 밤 만취한 폴락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나무에 충돌하며 50피트 밖으로 튀어나가 즉사한다. 

멧처도 사망했지만, 클리그만은 살아남았다. 루스 클리그만은 이후 ‘죽음의 차 속 소녀(death-car girl)’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

 

잭슨 폴락의 사망 소식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고, '라이프'지는 '반항의 아티스트, 비극적 결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망 기사를 보도했다.

1956년 12월 MoMA에서 잭슨 폴락 추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1967년 다시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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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을 그린리버 묘지에 묻고 있는 중 리 크래스너(왼쪽부터),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프랑스에서 돌아온 크래스너는 폴락을 근처 그린 리버 공동묘지에 묻었다. 장례식엔 추상표현주의를 걷고 있던 화가 친구들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도 왔다. 윌렘 드 쿠닝은 폴락 사망 이후 “이젠 내가 넘버 원이군”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살아남은 루스 클리그만은 이후 4년간 윌렘 드 쿠닝의 연인이 됐다. 드 쿠닝은 그림 한 점에 ‘루스의 조이(Ruth’s Zowie)’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그 쿠닝과 헤어진 후엔 프란츠 클라인과 맨해튼 스튜디오를 나누어썼으며, 클라인 사망 후엔 아파트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크래스너는 폴락의 작품을 뮤지엄에 팔고, 관리하면서 붓을 다시 잡았다. 잭슨의 스튜디오가 크래스너의 작업실이 됐다. 

 

폴락은 헬렌 프랭켄탈러, 프랭크 스텔라, 모리스 루이스 등 색면(Color Field)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해프닝 아티스트 알런 캐프로우, 조각가 리처드 세라, 에바 헤세도 폴락을 영감의 원천으로 꼽고 있다.

 

 

00000000book.jpg1989년 스티븐 나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가 출간한 전기 'Jackson Pollock: An American Saga'는 1991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2000년 에드 해리스가 주연하고 감독한 영화 '폴락(Pollock)'의 원작이 됐다.

 

 

 

잭슨 폴락과 미술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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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프라이빗 세일에서 1억4천만불에 거래된 'No. 5(1948, 왼쪽),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836만 달러에 팔린 'No. 19'(1948)

 

 

잭슨 폴락의 작품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1950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미국관에 전시됐던 'No. 12'(1949)가 2004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1170만 달러 경매됐다. 2012년 뉴욕 크리스티에 나온 'Number 58'(1951)은 2300만 달러에 팔렸다. 이어 지난해 'Number 19'(1948)은 5836만 달러에 팔렸다.

 

잭슨 폴락의 최고가는 경매가 아닌 프라이빗 세일에서 이루어졌다.

2006년 11월 폴락의 'No. 5'(1948)이 1억4000만 달러에 팔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회화로 기록됐다. 이 그림은 1949년 폴락의 찬미자였던 필리핀계 추상화가 알폰소 A. 오쏘리오가 1500달러에 구입한 후 여러 손을 거쳐 할리우드 재벌 데이빗 게펜이 2006년 익명의 콜렉터에게 팔았다.  

 

2006년 6월 크리스티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1907)가 1억3500만 달러에 팔렸으며,  2010년 크리스티에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1932)이 1억650만 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2012년뉴욕 소더비에서 뭉크의 '절규'(1895)가 1억1992만2500달러에 팔리며 경매 신기록을 세웠다. 

 

2011년 카타르 왕족은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2-93)을 2억5000만-3억 달러에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잭슨 폴락은 왜 위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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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ock, One: Number 31, 1950, Oil and enamel paint on canvas, 8' 10" x 17' 5 5/8", The Museum of Modern Art

 

잭슨 폴락의 회화는 순전한 혼돈인가, 무의미의 전형인가? 아니면, 매혹적이며 정신적으로 강렬한가?

 

캔버스를 이젤에서 해방시켜 바닥에 깔고 그 위를 걸어다니며 붓 대신 페인트 통을 뿌리거나, 굳은 붓에 물감을 흘리는 액션 페인팅.  잭슨 폴락이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그림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최전선에 자리매김되었다. 

 

어떻게 잭슨 폴락이 전후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떠올랐을까?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핵무기 소유로 미국은 자부심은 분기탱천해 있었다. 미국의 미술계에서도 피카소와 유럽 중심의 미술로부터 벗어난 자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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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콜중독에 골초였던 잭슨 폴락의 우표가 1999년 발행됐을 때 입에 문 담배는 제거됐다.

 

 

미국에도 피카소가 필요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잭슨 폴락이다. 

 

폴락은 이젤을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붓으로 그리는 대신 물감을 떨어트려 캔버스를 메웠다. 

미술이 대상을 베끼는 것,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화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전환이 됐다. 이로써 미술의 근본인 선과 색, 면으로 돌아간 것이다. 여기서 복사하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화가의 정신상태, 아이디어가 된다.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폴락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켜세웠고, 1949년 8월 라이프 잡지는 폴락을 4페이지로 대서특필하면서 미국 화단의 영웅으로 만들게 된다. 잭슨 폴락은 추상표현주의라는 미국 화단의 ‘이즘’을 창시자가 된 것이다.

 

폴락은 그러나 반영웅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음주벽에 우울증, 폭력 성향, 외도, 그리고 44세로 막을 내린 삶 자체가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처럼 잭슨 폴락을 영원한 미스테리의 프레임에 가두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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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크래스너 하우스의 스튜디오. Studio at Pollack-Krasner House & Study Center  http://sb.cc.stonybrook.edu/pkhouse

 

 

*천재화가와 두 여인 <2> '잭슨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 

 *천재화가와 두 여인 <3> '뉴욕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천재화가와 두 여인 <4>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에드워드 호퍼의 스튜디오 탐방, OHNY

 *미술중독, 섹스중독...페기 구겐하임 다큐 개봉

 *NYCB Gallery <135> 잭슨 폴락의 진화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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