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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
2015.12.07 11:44

(140) 이영주: 안젤라의 '호빗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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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촌뜨기의 일기 (29)


   

안젤라의 ‘호빗 하우스’



IMG_2042.JPG Hobbit House 사진:안마리아



춘기 시절 꿈의 도시는 파리였습니다. ‘프랑스’라든가 ‘파리’라는 어감이 주는 로맨틱한 느낌이 ‘미국’ 혹은 ‘뉴욕’이란 말보다 멋있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뭐든 꿈꾸는 나이니까 멋있는 게 좋았습니다. 지금 뉴욕에 살면서도 제가 몇 번이나 헤집고 다녔던 파리 시내의 골목골목들이 눈에 선한 걸 보면 약간 허영끼 날리던 꿈이 아직도 제 안에 살아 있나봅니다.


1979년, 처음으로 런던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크니 캐리지(Hackney Carriage)’라고도 불리는 ‘블랙 캡’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탔던 택시와 똑같은 왜건형의 택시는 지붕도 높고, 실내도 넓어서 짐을 실어도 자리가 널널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까만색 택시 ‘블랙 캡’은 영국의 자랑으로, 이 택시를 운전하려면 엄격한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하고, 자동차도 칠이 벗겨지거나 얼룩이 없도록 항상 청결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런던 블랙 캡을 너무 좋아하니까 동행했던 신부님이 그 천진한 모습이 우스웠던지 진정한 영국의 명차는 ‘롤스로이스’라고 소개해주셨습니다. 롤스로이스를 본 저는 곧 롤스로이스에 빠졌습니다. 자동차에 문외한인 제가 롤스로이스를 좋아한 것은 롤스로이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콘, 즉 자동차 앞에 달린 ‘환희의 여신상(Spirit of Ecstasy)’ 때문이었습니다. 유명 조각가인 찰스 로빈슨 사익스(Charles Robinson Sykes)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리스 신화 속 여신 니케(Nike)의 신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이 엠블럼은 승천하는 천사처럼 날개를 올리고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 조각품을 봤을 때부터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터무니없는 꿈이지만, 그래도 저는 아직도 제 드림 카는 롤스로이스라며 허언을 쉬지 않습니다. 



rolls1.jpg  rolls-royce-emblem.jpg

런던의 블랙캡(왼쪽)과 롤스로이스 엠블렘.



‘드림 하우스’에 대한 꿈도 저는 철부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빨강머리 앤’이었는지 어떤 책이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데, 주인공이 자기가 살 집을 고를 때 첫 번째 조건이 ‘매직이 있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요술이 있다! 동화적인 그 말에 반한 저는 이 담에 집을 사게 되면 반드시 ‘돌’로 지은 매직이 있는 집을 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유럽의 돌로 지은 집들이 좋았습니다. 


결혼하기 전엔 집이 부모님의 선택이었고, 결혼 후엔 남편과 시어머니의 선택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의지로 집을 사게 된 건 미국에 와서 였습니다. 드디어 요술하우스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수 십 채의 집을 복덕방과 다녔으나 가진 돈에 맞는 집을 막상 찾으니 요술은커녕 기함을 할 정도로 집들이 엉망이었습니다. 나와 있는 돌집도 없었습니다. 겨우 찾아낸 것이 올드 태팬의 벽돌집이었습니다. 반은 벽돌, 반은 목재를 쓴 집이었고, 앞마당이 무척 넓고 키 큰 참나무들이 있어서 제법 산장 같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크지 않은 뒷마당 뒤는 작은 야산이라서 봄에는 토끼들도 나오고, 그럭저럭 50% 정도의 매직은 있다고 영문도 모르는 딸들에게까지 설득시켰습니다. 정남향이라 겨울에도 리빙룸으로 따뜻한 햇살이 넘치는 그 집에서 세 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희 네 모녀는 요술을 만들어가며 옹기종기 즐겁게 지냈습니다. 



IMG_2022.JPG French Chateau 사진: 이영주



태나에 사는 막내가 새로 집을 샀다고 해서 기대가 컸습니다. 막내는 그동안 사위가 3년에 걸쳐서 지은 소꿉장난 같은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본채는 세를 주고, 넓은 차고 자리에 자기들이 살 집을 지은 것입니다. 1층이 부엌과 다이닝 룸, 리빙룸의 복합 공간이고, 2층이 침실이었습니다. 지하는 말 그대로 창고로 썼습니다. 화장실의 프라이버시도 없고, 샤워뿐인 욕실의 샤워꼭지를 트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모든 게 너무 협소하고 불편한 것 투성인데도 자기 것은 무조건 좋아하는 막내는 “난 우리 집이 너무 좋아.” 하면서 혼자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집을 산 것입니다. 큰집을 샀다 길래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릅니다. 엄마방도 있어서 아무 때나 오고 싶을 때 와서 마음껏 있으라는 말도 귀에 달콤했습니다. 


큰집이라기에 모던하고 멋진 집을 기대했던 저는 땅 밑으로 낮게 앉은 집 외양부터가 낯설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리빙룸도 작고, 부엌도 작고, 전혀 럭셔리한 구석이 없이 소박한 농가처럼 고색창연한 집이었습니다. “난 이 집이 너무너무 좋아요. 엄마는 왜 만족하질 못해요?”하고 막내는 웃었지만, 첫날은 저으기 불편한 심기로 집을 만났습니다. 그나마 운동장처럼 넓은 메인 베드룸과 뒷마당이 마음을 진정시켜줬습니다.


새로 산 막내의 집은 1940년, 몬태나 주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디자인해서 화학과 교수를 위해서 지은 ‘스토리 북 하우스’ 세 집 중의 하나인 ‘호빗 하우스(Hobbit House)’라고 합니다. 원래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교수는 대학교의 기금을 받아 자신이 늘 꿈꾸던 집, ‘Log Cabin’, ‘French Chateau’, ‘Hobbit House’ 등, 얘기책을 주제로 한 집을 지었습니다. 막내의 호빗 하우스에서 그 교수는 살았고, 같이 붙어 있던 French Chateau 에 부인의 친정어머니가 살았다고 합니다. Log Cabin 은 French Chateau 맞은편에 있습니다. 



IMG_2023.JPG Log Cabin 사진:이영주



런데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집이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하루하루 지날수록 집안 구석구석이 오래 살았던 집처럼 익숙했습니다. 영국 아르누보 타일로 장식된 울퉁불퉁한 돌 벽난로며 같은 스타일의 벽에 붙은 등, 게스트 화장실의 돌 벽도 은근히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집이 앤틱 같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모던하고 기능적인 집이 아니라 고풍스런 옛집에 매력을 느끼는 막내가 멋을 아는구나, 싶어서 그런 딸이 새삼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교수가 살았던 이 집에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인 막내가 살게 된 것도 요술 같은 인연이지 싶었습니다. 처음 지었을 땐 지붕이 잔디지붕이었다고, 막내는 언제고 돈이 생기면 다시 잔디지붕으로 바꿀 것이라고 야무진 꿈을 꾸고 있기도 합니다.   



IMG_2030.JPG 눈꽃 핀 뒷마당



그러고 보니 제 꿈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에 살고 싶었는데 뉴욕에 살고 있고, 롤스로이스를 타고 싶은데 그건 말도 안 되는 꿈이라 혼다도 황송하게 타고 있습니다. 뒤는 숲이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언덕 위의 돌집에서 살고 싶었는데, 조지워싱턴 브릿지가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요술이 있는 집’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물론 이제 나이가 들어서야 남들보다 뒤늦게 노인아파트로 갈 차비를 하고 있지만, 노인아파트면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꿈을 꾸고 있고, 살아 있는 동안 그 꿈은 계속 될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어떤 공간이라도 마음에 들게 꾸미고, 매일매일 자기만의 요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실은 진정한 아름다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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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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