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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한혜진: 겨울 손님
에피소드 & 오브제 (23) 눈 덮힌 세상의 마력
겨울 손님
눈이 내리면 도리어 사람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감동이란 다시 말하면, 눈이 그리움을 통하여 외로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장치가 됨을 의미한다.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리고, 다시 보게
만드는 마력, 세상은 깨끗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하는 역할을 눈이 아닌 무엇이 해낼 수 있단 말인가. Photo: Hye Jin Han 온다고 하던 손님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가을이 있다면, 봄이 오는 곳이라면 의당히 그 사이에 겨울이 손님처럼 다녀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경험으로 이를 알고 있다. 마치 생일을 기대하는 아이가 케잌의 촛불끄기를 머릿속에 그리듯이, 사람들은 겨울이 가져다줄 세찬 추위와 함께 눈오는 날을 선물처럼 기대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겨울은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내심을 다시 한번 시험하듯, 아직도 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쇼핑몰 전면에 걸려있던 그 휘황한 장식도 볼품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그날은 더 그런 느낌이었다. 반소매를 입을 정도의 낮 기온에 미처 두터운 겉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열대 휴양지에 도착한 관광객처럼, 후끈한 날씨 속의 전나무 장식은 아주 난처하게 보였다. 그렇게 2015년 12월은 지나갔다. 끝내는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은희경 저)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났다. 도시의 사냥꾼이 되어버린 소설의 주인공은 눈이 내리던 순백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고향에도 이제는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자조적인 말처럼,눈이 없는 겨울이란 우리에게도 심상치 않은 기후의 이상징후를 의심케 하였다. ‘지구의 온난화’가 원인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앨 고어가 자신의 저서에서 말했던 이 ‘불편한 진실’이 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은 실로 불안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명터전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므로… 저 하늘 위로 올라가서 본다면, 파란색을 띤 수정알처럼 보인다는 지구는 체온유지를 못하고 고열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미 동부지방에도 겨울이 당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생각은 간단치않은 문제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춥다고는 하지만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줄 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동토의 제국에서 온 사신처럼 그렇게 겨울은 우리 있는 곳을 다녀간다. 그들의 행차는 때론 강풍과 눈보라를 동반하지만, 결국은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순백의 눈발에 우리는 곧잘 감동한다. 눈이 내리면 도리어 사람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감동이란 다시 말하면, 눈이 그리움을 통하여 외로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장치가 됨을 의미한다.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리고, 다시 보게 만드는 마력, 세상은 깨끗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하는 역할을 눈이 아닌 무엇이 해 낼 수 있단 말인가. 하얀 이불을 덮고 잠드는 세상, 평화는 모든 곤한 잠 속에 깃든다. 그런 잠을 자고나야 대지도 순조롭게 꿈을 잉태할 것인즉, 눈 내린 겨울밤의 아늑함이 사뭇 그리워진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자라처럼 목을 움추린 채, 겨울 손님을 위해 마중을 나가리라. 늦게나마 와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리라. 우리 모두는 당신을 기다렸다고,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고.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처럼 웃으리라. 자신을 찾아와준 오마 사리프, 약속이라 하지는 않았지만 약속이 되어 나타난 보고싶은 얼굴, 그가 몰고온 시베리아의 설원과 함께 겨울 속에서 행복했던 여인이되어 사랑의 기쁨에 젖어보리라. Doctor Zhivago (1965) 찬바람이 불 것이다. 헐벗은 나무들도 진저리를 칠테고 우리는 더 두껍게 옷을 입고 집을 나설 것이다. 물은 얼어붙어 당분간 바다로의 순례를 멈출 것이며,기회를 만난듯, 아이들은 얼음을 지칠 것이다. 목도리를 여며주는 연인들의 손길에서, 서로는 이미 사랑을 알아차릴 것이며, 흰 눈 위에 내딛는 첫 발자국이 다시 한번 각오를 새기는 일이 될 것임을 믿는다. 흰 입김을 불며, 아침을 나서고 싶다. 서릿발같은 겨울 아침의 얼굴과 마주하고 싶다. 겨울이 손님되어 묵고 가는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리라. 밤은 더 깊어지리라. 계절이란 어차피 떠나보낼 연인과 다를 바 없지만, 같이한 황홀한 시간 만큼은 고이 간직하리라. 이런 바램에 부응하듯, 지난 주말 폭설이 내려주었다. 26인치라는 역대 2위라는 기록을 남기며 요란하게 뉴욕을 뒤덮었다. 손님이 온거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눈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지금 그 뒷치닥거리에 애를 쓰고 있다. 그래도 다시금 알게 된 것이 있다. 눈이 내리는 동안 누구한테나 엄연하게 부과 되었던 강제적인 불가항력 속에서, 새삼 맘대로 나다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 건지를.. 그리고, 글쓰기라는 틈바구니를 만들며 탈출구를 찾고 있는 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사실을...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