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9)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2)
- 홍영혜/빨간 등대(70)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158) 김희자: 맨해튼 랩소디 (Rhapsody in Manhattan)
바람의 메시지 (2) Rhapsody in Manhattan
맨해튼 랩소디
겨우 3달만에 퇴진할 수 밖에 없는 비겁자의 백기에 그가 잘못 던진 시비로 명분을 세워주었기에,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콧대를 높히며 지옥에서 탈출하게 된 줄을, 그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말하지 않았기에 결코 알지 못한다. 지금도 볼일이 있어 맨해튼 빌딩숲을 운전하며 지나가노라면, 결코
마르지 않을 자유를 갈망하는 나의 집시같은 영혼의 심연 속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서글픈 열망의 랩소디가 환청처럼 울려 퍼진다. Wheiza Kim, 위대한 욕망/Lofty dream, 33"×33"×4", Acrylic on wood, mirrors, 2009 벌써 15년이 지난 나의 무모한 꿈을 접은 이야기다. 위대한 야망의 도시, 보이지 않는 이곳저곳에서 숨을 죽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폭탄을 제조하는 곳. 나는 그곳에서 겨우 3개월을 거주하다가 퇴거당했다. 명분상으론 쫓겨난 거였지만, 나는 내 삶을 구제한 '럭키 루저(lucky loser)'라 말하고싶다. 아마도 내가 거기에 더 오래 살았다면, 분명 신디 셔만(Cindy Sherman)의 첫 아시안 정신착란증 여성 모델이 되었을지도 모를 상태로부터 도주한 것이다. 나는 50살이나 되도록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버리지 못하고, 한번 실패한 아픈 이혼 경험으로도 충분히 각성되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너무나도 나이스하게 구애하는 서양 남자에 홀려서 재혼을 했다. 그리고 2년도 넘지못해서 모든 환상은 깨어지고, 서양인의 동양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문화적 차이로 인한 후회 막급한 상황이 되어 가출을 시도했었다. 기왕 가출을 할 바에사 야망을 품고 온 세계의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대쉬하는 화가들의 거주지인 첼시로 전진을 해보기로 용기를 내고, 스튜디오를 찾아 나섰다. 어렵사리 구해진 스튜디오 스페이스는 매우 낡은 아티스트 빌딩 13층에 있었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단지 물을 쓸수있는 시설이 있을뿐, 두 코너가 창문인 모서리 삭막한 콘크리트 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류작가가 계약 시한을 못채우고 본국으로 돌아가며 1년 남은 기한의 스튜디오를 얻게됐다. 그 빌딩은 본래 상업용 빌딩 지역이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 작가가 귀띔을 해주길, 관리인에게 50불 정도의 팁을 달마다 주면 모른 척해준다 했다. 자기의 살림도구들을 처분하며 쓰던 일본식 후통 베드를 선물로 내게 남겨 주었다. 우린 계약건으로 몇번 만나며, 과부 사정 과부만 안다는 말 그대로, 금방 친해졌었고, 그녀가 2년간 사귄 이웃 작가들도 소개시켜주었다. 그녀의 스튜디오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잘라진 손과 발들을 수없이 석고 캐스팅을 하여 은색, 금색, 코발트 블루로 칠하여서 온통 벽과 바닥에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인스톨을 한 방식이 마치 처참한 사고 현장 그 자체 였다. 역시 나의 상상대로 그녀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 후유증을 앓고있는 내 나이 정도의, 그 나라에선 알려진 중견 여류화가였다.
Wheiza Kim, Where one can be free, 23"×12"×4", Acrylic on wood, mirrors, 2001 그녀가 쓰던 베드를 물려받은 탓인지 한달이 지나도록 계속 악몽을 꾸며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불빛이 마치 내방 너머 공중 거실의 스탠드처럼 장식되어 있고, 온갖 빌딩의 불빛만으로도 방에 불을 켤 필요조차 없었다. 오래된 건물이라 벽이 얇아서인지, 아니면 2중 유리창이 아니여서인지, 아랫 길에서 올라오는 소음으로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6월이라 날씨가 창문을 열어놓아야할 정도였는데, 내 자신이 마치 행길이거나, 지하 전철역 터널 속에 누워있는듯 했다. 창문을 닫고, 잠을 청하려면 13층 아래 지하 터널로 지나다니는 전철 소리 진동에 건물이 흔들리는듯 했고, 모든 소음들이 합쳐져서 웅웅거리며, 괴물이 내는 소리같은 에코를 만들어 문틈으로 밀려들어와 내 숨통을 조이듯 했다. 앰뷸런스 소리는 밤내 그치질않고, 지쳐서 잠이들만 하면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나를 깨우곤 했다. 새벽 4시 쯤이면, 탱크 지나가는 소리를 내는 쓰레기차들의 굉음이 시작되면서 자동차 소리들이 차츰 고조되며, 도시는 다시 헉헉되기 시작한다. 해가 뜨도록 잠을 설치며 두달을 지내고 나니, 나는 거의 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할수가 없이 멍해져 버렸다.
Wheiza Kim, Being Miserable, 12" × 22" × 4", Acrylic on wood, mirrors, 2000 나는 본래 소리에 매우 민감하다. 내가 무언가에 집중할 때, 누군가 나를 불러도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놀래며 경기를 일으킨다. 작업을 할 때는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수없이 많은 클래식 음악중 특히 바흐의 곡들을 쉬폰 커튼처럼 두르고서 일을 하는 습관이다. 그러나 소음의 소용돌이 중심인 그곳은 오디오를 아무리 크게 틀어놔도 차들의 소음들로 갈기갈기 찟겼다. 베토벤 심포니 9번 '환희의 송가'는 가장 두꺼운 방음벽 역할을 해주었다. 라벨의 '볼레로'나, 리스트의 '헝가리언 랩소디'는 내 서러움을 달래주었고, 언제나 사랑하는 바하의 첼로곡들은 아무런 나의 힘이 되어주질 못했다. 내 자신이 질산통 속에 넣은 판화용 동판이나, 아연판처럼 드로잉 선을 따라 신경이 부식되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밖에 흘러 내리는 비가 마치 납이 녹아 흐르는 것 같았다. 매일 해질 무렵이 되면, 내 마음은 떠나온 롱아일랜드 집 해변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내 처참함에서 벗어나고, 생을 낭비한다는 느낌을 면하기 위해, 낮에는 첼시의 전시장으로 뭔가를 발견하기위해 싸돌아다니기, 밤에는 다른 화가들과 술과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모든 비인간적인 창조적인 짓거리들을 보며 허영의 시장바닥에서 굴르는 광대들 같았다. Wheiza Kim, 우울함/Gloom, Acrylic on wood, mirrors, 2001 석달이 되도록 작품은 커녕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산란함으로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고, 절망감이 엄습하기 시작하면서 내 지병의 증세가 나를 엄습해왔다. 그 무렵부터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살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매일 밤낮으로 전화를걸어서, 집으로 돌아 와달라고 애걸을 했다. 모든 것 포기하고, 못이기는 체 돌아가고 싶었으나, 1년 계약을 했고, 또 두달치 월세를 미리 냈으니, 어찌 할 수 없이 일년을 이겨 내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나도 여기에서 다른 작가들처럼 주류 미술계의 흐름을 타야하지 않겠는가하는 이겨낼수도 없는 야심으로, 결코 못들어 가겠다고 버텼다. 마침내 남편이 달려와서 밤마다 나를 달랬지만 소용이 없자, 나로 부터 받은 화풀이로 도어맨과 언쟁을 벌렸다. 화가 난 도어맨이 내가 불법으로 거기서 잠을 자면서 보이프렌드와 살고 있다고 리포트를 한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며칠 후 관리 본부에서 퇴거 명령서가 날아왔고, 나는 그 다음 주로 짐을 싸들고 쫓겨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두달치 월세는 자기가 물어주겠노라고 너무도 희희낙낙해했다. 나는 겉으로는 내 꿈을 접게 만든건 너 때문이라고 패악을 부렸지만, 참으로 인생의 역설이란것이 이런 경우구나 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본래 내가 있어야 할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빌딩 숲을 지나며 돌아가는 이삿짐 트럭 속에서, 나 자신을 비웃었다. 너는 결코 맨해튼에서 살아낼 만큼 헤라클레스같은 몸도, 야망의 다이야몬드 칼도 가지지 못한 주제에 감히 어딜 도전을 했는가, 이 바보천치... 겨우 3달만에 퇴진할 수 밖에 없는 비겁자의 백기에 그가 잘못 던진 시비로 명분을 세워주었기에,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콧대를 높히며 지옥에서 탈출하게 된 줄을, 그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말하지 않았기에 결코 알지 못한다. 지금도 볼일이 있어 맨해튼 빌딩숲을 운전하며 지나가노라면, 결코 마르지 않을 자유를 갈망하는 나의 집시같은 영혼의 심연 속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서글픈 열망의 랩소디가 환청처럼 울려 퍼진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