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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
2016.02.15 22:54

(161) 이영주: 프랭크 스텔라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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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촌뜨기의 일기 (30)



 



30-schenck_whitney_2014_09_17_dsc_9261_1140Photograph by Timothy Schenck.jpg Photo: Timothy Schenck



운타운의 새 휘트니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은 둘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지척입니다. 그런 연유로 작년에 새로 오픈하자마자 갔는데, 소장품 전시를 마련한 새 휘트니는 이전까지의 휘트니에 대한 제 선입견을 깡그리 지워주었습니다. 살아있는 작가를 소개하면서 격년제로 세계 신인작가들의 등용문인 비엔날레를 여는 휘트니가 20?21세기 ‘미국’ 미술가들의 작품 1만8000여점을 소장했다고는 하지만, 비로소 그 귀한 소장품들을 보면서 새삼 미국 현대미술의 예술적 깊이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편적으로 보아오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나 뉴욕현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보던 미국 미술품들과는 다른 품격과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고, 새삼 미국의 그 풍부한 문화유산들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제가 이끌고 있는 문화클럽 회원들과의 2016년 첫나들이는 휘트니의 첫 번째 기획전인 ‘프랭크 스텔라 전’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 )는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는 현존한 대가입니다. 보스턴 교외의 말덴에서 태어나 프린스턴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사학도였답니다. 예술적 기질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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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Stella, Flowering Structure: Amabel, stainless steel, 900x900x900cm, 1997  Photo: POSCO Art Museum



텔라는 우리 한국인들에겐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 건물 앞에 세워진 ‘아마벨(Amabel)’이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처음 이 작품이 세워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흉측한 고철 덩어리라면서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제작한 작품에 실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흉물스럽다고 주변을 나무들로 가려 놓았을 정도입니다. 이 작품은 프랭크 스텔라가 비행기사고로 죽은 친구의 딸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비행기의 잔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 이름도 ‘꽃이 피는 구조물’이었는데, 그 소녀의 이름을 따서 ‘아마벨’이라 명명한 것이랍니다. 프랭크 스텔라는 이 작품을 통해 20세기 물질문명 사회가 만들어낸 야만을 폭로하고 있다지만, 사실 우리 범인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온 스텔라는 줄무늬 그림으로 미국 미술계에 폭탄 아닌 폭탄을 터뜨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다음 해인 1959년에 그룹전으로 MoMA에서 데뷔해  터뜨렸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물론 16명의 그룹전이긴 했으나 신인으로선 대단한 성공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1970년엔 MoMA에서 33세에 최연소로 회고전을 열었을 정도로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달려온 드문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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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스텔라를 1960년대 주류였던 추상표현주의를 모더니즘으로 전환하고 미니멀리즘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하지만, 사실 제게 프랭크 스텔라는 난해한 작가입니다. 그동안 제가 봐온 그의 그림은 초기작인 줄무늬 작품들 연작 뿐이어서, 도대체 그런 원근법 학습같은 줄무늬나 각도기 같은 그림들이 왜 위대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저희는 알재단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계시는 김지혜 박사를 모셨습니다. 김 박사는 스텔라가 평생을 “회화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작가라고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회화의 본질을 파들어가서 구현해낸 것이 그런 줄무늬였다는 것입니다. 알듯도 하고 모를듯도 했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보니 그냥 무작정 보고 또 봤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의 물감이 우리가 사용하는 주택용 페인트였다는 사실도 놀라웠습니다. 기존의 회화 질서에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 그가 작품 도안에 맞춰 캔버스를 제작한 거나 구멍을 뚫거나 했던 파격도 당연한 귀결로 이해되었습니다. 


전시장은 그의 작업의 시작인 줄무늬 시리즈부터 회화의 분해 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 등으로까지 작업이 확대되어 조형물에 회화를 곁들여 진화해가는 모습, 현재의 작업이 다 망라되어 시대별로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물론 작품이 이해된 것은 아닙니다. 아, 그가 이렇게 변화되어 갔구나, 하는 이해일 뿐입니다. 30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피카소 박물관에 갔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봤던 피카소 작품은 교과서에 실렸던 몇 작품 뿐이었습니다. 문외한인 제가 보기엔 기괴하기만 했던 그의 작품이 왜 위대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기작부터 전시된 그의 모든 작품을 보면서 그가 왜 위대한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박사의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고민했는지 상상하면서 작품을 보니 아지랑이처럼 이해의 눈이 조금씩 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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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회화가 반드시 캔버스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거로 생각해서 조형물에 회화를 입힌 작업도 공감하기 만만치 않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새’그림인데, 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뭔지 모를 다채로운 색상의 추상화거나 조형물 회화입니다. 설명에 따르면 그 새가 곳곳을 날아다니는 여정이나 만난 장소들이거나 라니. 그런 느낌을 미술에 무지한 저같은 관객으로선 이해불가입니다. 평생 독서광이란 그는 그의 작품 속에 문학 작품이며 세계 각국의 전통 설화나 토속 신앙, 구전동화들을 녹여내고, 음악까지도 형상화시켰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한걸음 그에 대한 이해가 가까워졌고. 그런 스텔라의 서정성이 그런대로 납득이 되기도 했습니다. 스텔라에 이르러 추상회화가 비로소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니 말입니다. 


전시를 보고난 후, 한 블록 떨어진 갠스부르트 마켓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피자도 먹으면서 서로의 감동을 나누니 어렵기 짝이 없던 프랭크 스텔라가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갠스부르트 마켓은 뮤지엄 인근답게 실내가 자연친화적으로 디자인되었고, 커다란 테이블과 앤틱스런 테이블과 의자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가 멋스럽습니다. 작년에 새로 생긴 곳인데, 블루네 집과 가까우니 제가 혼자 가끔 와서 베트남 커리도 사 먹고, 차도 마시고, 스시도 먹고 하는 곳입니다. 


얘기를 나누며 커피향에 몸이 나른해지면서 그동안 쌓인 나태한 일상의 찌꺼기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머리 속이 명료해졌습니다. 새로운 꿈을 꿀만큼 신도 났습니다. 빨리 나도 무엇인가 하고 싶은 열정이 되살아났습니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프랭크 스텔라였지만, 그래도 스텔라는 우리들에게 멋지고 매우 유익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영주000new100.jpg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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