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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김희자: 작가의 의도와 비평가의 오해
바람의 메시지 (3) 표현과 공감에 대하여
작가의 의도와
비평가의 오해
Wheiza Kim, ???, 22"x22"x3", Acrylic on wood, mirrors, 2014 10만년간 인류가 살아온 아날로그 시대를 빠져나와 디지털 세계로 진입했다는 지구 위 여기, 오늘 맨해튼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사람들이 초스피드의 하이 테크놀로지 정보 속에서 살고 있다. 두뇌 속 세계는 마치 매트릭스의 상황 속에서 지낼지라도, 아직도 몸은 아날로그 모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 폭설로 인한 눈더미가 녹아 만들고있는 흑탕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침판지도 할 요령을 피며 21세기의 지성인들의 길거리 퍼포밍을 감상하며, 나도 토끼춤을 추며 뒤를 따라 가고 있다. 언젠가 자기부상 열차처럼 부상하는 구두가 발명될테지만, 인간이 몸과 마음을 가졌기에 갖고있 근본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을테지... 한 평론가가 내 작품의 의도에 대해 나와 꼭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나의 전시장으로 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대로 평론가 맘대로 쓰게하지 뭘 그러냐'고 큐레이터에게 말을 해도, 내 작품의 구조가 전혀 본 일 없는 요상한 형태라서 인터뷰 없이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버틴다는 거다. 그가 세상 일에 노련해지지 못한 풋내기인지, 진정한 평론가인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높이 알아주는 평론가일수록 견고한 자신의 미학적 프레임이 있어서 그 프레임에 어떠한 작가의 작품도 껴넣으며 (술탄?의 악날한 재판)처럼, 그 프레임 밖으로 발이 나오면, 발을 자르고, 손이 나오면 손을 자르는 식의 평론을 한다는 사실을 흔히 접해왔었다. 그들은 마치 어떤작품이 세상에 드러날 어떤 이즘의 명분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아마 그 이유는 작가들에게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작업 철학이나 컨셉의 부재 상태에서 단지 자기만족에 기인하면서 남다른 신기함을 만들어 뒤통수를 치고, 신문에 이름을 드날려서 타인의 감동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치 명분 창조는 평론가의 몫 인양하는 작가들도 꽤 많이 보아왔다. 글쎄 세상의 많은 작품들이 일단 작가의 손에서 떠나면, 누구의 귀에 걸던 코에 걸던 해석하기 나름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작가의 의도는 알고나서 평가내지는 재창조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Wheiza Kim, Detail of ???, 22"x22"x3", Acrylic on wood, mirrors, 2014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과연 그에게 나의 복잡다단한 생각의 깊은 뿌리를 어찌 설명을 해주어야 알아듣게 해줄까 궁리를 했다. 한 작가가 그리도 복잡하고 긴 시간 고심한 작품앞에 사람들은 과연 몇초나 머무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부질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쓸데없는 말 다 고만 두자'하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이미 그가 와 있었다. 내 작품 속에 열려진 구멍 속을 요리조리 미소를 띠며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보였다. 그는 '???'라는 작품 제목의 작품에 숨겨 그려진, 데미안 허스트의 600만불짜리 다이아몬드로 덮은 해골을 디려다보고 킬킬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재미있어 하며 인사를 나누고, 곧 질문 공세를 해대기 시작했다. Maurits Cornelis Escher, Möbius Strip II 작품을 따내어서 입체로 한 이런 경우를 본 일이 없는데 의도가 뭐냐. 무얼 말하려는 거냐. 나는 그 사람에게 내 컨셉을 말하려면 너무나 길고, 혹시 그가 동양인의 인식철학에 대해 알리도 없고 해서, 서양의 과학이나 수학에서 쓰는 조금은 난해한도상인 뫼비우스의 띠 구조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곧 머리를 끄덕이며, 눈이 반짝였다. 판화와 드로잉작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에 개미가 그려진 드로잉을 기억한다는 거다. 주로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표현할 때 비유 이미지로 많이 사용된다. 나는 그 이미지 구조를 차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의 생각은 어떤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른다는 동양의 인식철학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지각하는 행위가 제 8식이라 부르는 무의식(unconsciousness:서양 심리학에서 말하는 잠재의식 subconsciouseness과는 다른 개념)에 저장되어지는데, 그때의 상황이 그대로가 아닌 반사, 왜곡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엉뚱한 무엇으로 저장되어 진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이 되는 작용처럼.
Wheiza Kim, Detail of ???, 22"x22"x3", Acrylic on wood, mirrors, 2014 여하튼 내 작품제목 '???'에서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언가가 풍덩 빠지며 튕기는 물방울과 파문이다. '뭐가 빠졌지'라는 질문과 함께, 아래 홈 셰이프 홀을 통해 거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거울을 들여다 보면 그림 속으로 포함된 자신의 얼굴을 흘깃 먼저 보게 되고, 곧 그림 표면의 안쪽 뒷면에 그려진 이미지가 거울에 비추어져서,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을을 보게 되며, 미소와 함께 왼쪽,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며, 자기 얼굴을 다시 한번 보게된다. 알 수 없는 질문으로 눈을 떼는 그 행위 속에서 내 작품은 완성된다. 바로 그 1분도 않되는 동안의 시각과 의식의 흐름이 거울에 의해 반사되며 만드는 눈의 동선을 뫼비우스 띠의 구조적 상태를 빌어야 설명이 가능했다. Escher의 그림은 평면 위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입체화했을 따름이다. 내가 파문이 퍼지는 나무결을 발견했을 때, 무었인가가 풍덩소리를 내며 빠지는 것을 연상했을 때,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듯 웃고있는 다이아몬드 해골이 떠올랐다. 예술의 진정성은 사라지고 자본만이 살찌우는 미술시장의 마피아같은 집단이 하는 짓거리들을 매우 경멸하고 있던 터에, 그것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쳐넣어버리고 싶었다. 깊은 어둠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볼 수 없게 하고 싶은 잠재의식이 발동됐던 거다. 혹시 그가 알면 고소(sue)하지 않겠냐며, 깔깔대며 웃었다. 하여간에 내 박스 입체 작품들은 유머와 역설을 담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소근대며 "네 생각은 어때?"하고 묻는 것이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세상 이야기들과 내 환영을 누군가와 함께 공감하려는 나의 세상에 대한 말걸기이다. 인간의식의 뿌리 작용이 얼마나 복잡하던, 21세기가 어디를 향해 흘러가던, 인간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고있는 한,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며 살아가기일 테니까.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