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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김희자: 윤무하는 회한
바람의 메시지 (4) 살아남은 자의 의문
윤무하는 회한
공허를 보는 눈/The Eye Viewing Emptiness, 80x110, Acrylic on shaped canvas, 1993
나는 겨울이면, 꼼짝않고 내 서재에서 창밖의 겨울을 음미하며, 작업 구상드로잉이나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즐기라는 지혜를 실천(?)하면서 추위와 게으름이 함께 변명을 뭉친다. 을씨년스런 작업실에 들어가기도 싫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철새처럼 어딘가 따뜻한 곳으로 떠났기에 생기는 상대적 울화증이 오르기도 하다. 따뜻한 곳 어딘가로 한두달씩 여행을 떠난 이웃집들을 가끔 케어해주는 일은 하지만,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기대는 포기한지 오래 되었다. 이웃들은 어떻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겠느냐, 부정적인 상상을 하는 사람에게만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시비걸어 싸워도 보지만, 몇십년 전에 당한적이 있는 겨울 수도관 동파로 인한 이해하고싶지 않는 트라우마성 원칙을 고수하는 그에겐 당할 재간이 없다.
지금처럼 함박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도 의문뿐인 회한이 윤무를 하며 가슴 속에 쌓인다. 더듬어보니, 벌써 4년이란 햇수가 훌쩍 지나가 버린 일이 되었다. 그 해엔 너무나 삭막한 겨울에 지쳐서, 혼자라도 맨해튼에서 떠나는 노르웨이 크루즈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음미해보려 키웨스트로라도 일주일 떠나고 싶다라는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갈 친구를 물색하던 중, 시티에 나가면 언제나 그녀의 사무실에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면 전화로 두어시간씩 지꺼려 댈 수 있는 같은 코드의 친구가 떠올랐다. 거의 삼십년 동안을 만나면 그지없이 반갑지만, 구태여 보지 않아도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는 관계로, 가장 좋은 친구관계라 정의되는...
그녀가 사무실을 닫은 후, 거의 해가 바뀌도록 서로 연락없이 지냈다. 내가 너무나 무심했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어서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이 됐다. 그 친구라면, 어딜가도 서로 마음에 부담이 되지않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전화를 해도 불통이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을까 하고서, 이곳 저곳 알만한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했다.
내가 접한 소식은 그녀가 두어달 전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거다. 나는 한국 신문이나 TV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살다보니 그 뉴스를 접하지 못했다. 지인들에게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혹시 아냐고 물어도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생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의식과 목표를 가지고, 매우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영특하고 강한 여성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였지만, 나에게 미국서 살아가기를 코치하던, 뉴욕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야망이 크고, 열심히 앞만 보며 나아 가던그녀가 자살을 했다는 걸 나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용서하소서, 13 x13x3. acrylic on wood, 2004
그녀는 왜 자살을 한걸까? 왜 내게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떠난걸까? 한동안 나를 어지럽히는 의문을 풀기위해, 여러번 그녀의 대학강사인 외국인 남편을 만나려고 아파트로 학교로 다니다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겨우 학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나는 인사랄 것도 없이 대뜸 그에게, 내 친구가 왜 자살을 했냐는지 알고싶다 했더니, 그는 매우 냉랭한 목소리로, "It's her problem. I didn't do any thing to her.~~~~~ please don't ask me why.~~~~~~” 몇마디를 더 하구선 돌아서서 가버렸다.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가끔 인사는 하고 지난 사이인데, 전혀 알지 못하는 책임추궁을 하러온 사람을 따돌리듯 하는 그의 지치고, 차가운 표정 앞에 더 이상 무슨 말도 더 건내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자신도 피해자인데, 한국 사람들은 마치 그가 가해자라도 되는듯 추궁하는 질문들에 대답하기도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인생 문제일 뿐 이라는 걸 매우 강조했다.
하느님보다 높은 분, 13x13x3, acrylic on wood, mirror
그가 한 말에서 온 쇼크 때문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이, 내리는 눈송이와 함께 윤무를 하며, 알파벳이 되어서 땅 위에 뿌려졌다. 나는 책을 읽듯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생은 자기가 결정해야겠지. 그러나 결혼이란 무었이고, 30여년을 부부로 산다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까? 부부라면 일심동체여야 한다는, 내 세대 한국 여자들의 세뇌되어진 선입견이 문제인가? 하기사, 내 남편 역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건 네 문제라고 무우 짜르듯 하는 통에 얼마나 수없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가. 서양인들에게 너와 나라는 독립적이여야하는 관계 속에 결혼이라는 것은 아무런 접착제가 되어주지 못하는건지? 그녀는 짧지않은 결혼에서 누구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식도 만들지 않았었다. 아이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그녀 역시 서양 사고방식으로 살아서인지, 못할 얘기가 없이 다했어도, 프라이버시를 지켜야하는 얘긴 결코하질 않았고, 나 역시 물어본 일이 없다.
도대체 왜 ? 삶에 대한 무의미? 남편으로부터 권태와 소외감? 사회적 배신감? 혹은 일을 대행 해준자들로 부터 당한, 경제적인 짐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녀는 매우 쾌활하고 화통하지만, 곧잘 한국의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을 일컬어 사기꾼들이라고 욕설을 퍼붓곤했었다. 그해 여름, 어떤 공연을 대행하여 진행을 해주었는데, 서울의 유명한 문화관계자 들이 마땅히 지불해야하는 작지않은 경비를 그녀의 크레딧 카드로 지불하게 한 후 갚지않아서 그녀의 크레딧이 크게 상했다고 했다. 너무나도 계획적이였던 그들과 싸우다 소송을 걸긴 했지만, 승산이 없어 보인다는 얘길 했었다. 어쩔 수 없이 미정부의 어떤 프로젝트에서 밤일을 하며 그녀의 표현대로 땜빵을 하느라 많이 지쳐있었다. 그 일과 연관되어 남편과 자주 싸운다는 얘기도 했었다.
어머니어머니, 13x13x3, acrylic on wood, mirror
그녀는 이민에 성공적이지 못한 가정의 여성들을 위한 사회복지 일도 하고 있었는데, 이민온 여자들의 행로라는 자기 나름의 듣고 본 경험에서 비롯된 거의 단정적이라 할만한 얘기들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나 역시 이민자의 설움을 너무도 깊이 느끼고 알았기에 그 얘기들을 한번도 발표한 일은 없지만, 마치 그림일기 처럼 그렸었다. 자기 부모도 일종의 정치 망명자지만, 대부분은 자식 핑계를 대며, 주로 40대 후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조국을 떠나는데, 마치 몇십년 된 늙은 나무를 이식하듯 가지 치고, 뿌리를 추림하여 태평양을 건너 다른 환경조건에 이식을 시키는 과정을 이민이라고 표현했다. 성공적 이식은 불과 몇 그루일뿐 ,물과 토양에 적응되기까지 15년에서 20년 이상 걸리는데, 죽을 때까지도 향수병으로 시들시들하며 먹고살기 바빠서 한국에서 부모가 돌아가셨다해도 가보지도 못해, 서러움만 가슴속에 삭히며 향수병 환자로 산다. 그 와중에 어떤이들은, 자식들 역시 문화 적응이 잘되지 않아서 목을 매달거나, 마약으로 폐인이 된 다음에사 알게 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며, 과연 얼마나 되는 이민자들이 제데로 사람답게 살아 가는가 싶다는 얘길 하곤했다. 그녀의 참담한 이민자들의 얘기는 지금도 마치 내 상처처럼 남아 있다.
오랜만에 점심이나 함께 하자고 하여 약속한 식당에 나타난 그 친구 눈주위에 숫검덩이를 바르고 나타났다. 매우 허약해 보이고 지친듯한 목소리로 자기도 이젠 인간사에 지쳐서 하느님이나 믿어보려 종교를 갖게됐다 했다. 부활절? 이라던가 팜 데이라 하던가?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성당에서 바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외국인 카톨릭 신부와 함께 이북과 관련된 어떤일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말할 수 없는 특급 비밀이라며, 나중에 말하겠다 했다. 그날 만남이 나와의 소식이 두절되기전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항상 내게 이민와서 외로움 때문에, 광신도가 되는 몇몇 여자 친구들의 얘기와 흔히 하느님보다 더 위인양 군림하는 목회자들과 사랑에 빠져서 양쪽다 파멸에 이르는 얘기를 하며 비아냥대곤 했었다.
과연 그 친구가 빠진 덫도 그것이었을까? 한국 속담에 흉보며 닮는다 하던? 설마, 그리도 시시한 3류는 아닐 꺼라고 믿고 싶었다. 그 해박한 철학을 논하던 실존주의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마치 치열하게 삶을 살던 전혜린이 삶에 대한 집착과 열정을 이겨내지 못해 저지른 자살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었다. 그녀는 옛날에 항상 전혜린을 은근히 닮고싶은 삶의 모델처럼 얘기 하곤 했었다. 설마 자살까지 닮을건 아닐테지 라고 농담을 건내면, you never know ~~라면서 깔깔 웃어대곤했었다. 전혜린의 삶의 멘토였던 헤르만 헤세에 대해 많은 얘길 나누곤 하며 실존주의 철학과 21세기로 관통하는사상의 계보를 줄줄히 꿰며, 자주 내게 강의를 하던 그녀였다. 온갖 추측을 하며, 설마 이북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긴건 아니였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해답을 들을수 없는 질문들이 눈 내리던 교정에서 만난 그녀의 남편의 말들과 함께 윤무를 하며 마음 속을 맴돈다. 누구나의 각자 문제일뿐, 서로 터치해서도 할 수도 없는 각자의 인생을 그는 지금 잘 운행하고 있을까 ? 그녀와 늘 얘기하던 실존적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해답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며 살고 있기에, 그녀에게 죽음이 해답이더냐고 꿈에라도 만나면 묻고싶다. 본래 있지도 않은 해답을 위해 얼마나 지독한 번뇌로 살아 왔었나 싶을 따름이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