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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김희자: 내 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I
바람의 메시지 (9) 자유인과 행복
내 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Wheiza Kim, Contemplation/관조, 80"x24"x4", acrylic on natural wood, 2010
나는 삼십 중반이 되었을 무렵 사는 것이 너무도 허망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무의미와 사람은 왜 사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절을 보냈었다. 그 시절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던 헤르만 헤세의 글들과 니체를 그 시절 내가 매우 좋아했던 전혜린의 글들을 통해 만났다. 헤세의 자연과 더불어 작은 기쁨을 깊이 생각하며 느낄 줄 아는 삶의 자세로, 니체가 제시하는 운명애(Amor fati)적 삶으로 초인사상을 따르며 살다보면, 저절로 나를 넘어의 나를 만나고, 생의 의미와 가치가 생기려니 하는 열망을 가지고서 몇해 열심히 그들의 책을 섭렵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마도너무나 치열하게 살다가 어떤 절벽에 서게 됐는지는 알수 없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 했기에 앞장서서 가던 이를 잃고서, 나는 한동안 휘청거렸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가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의 삼십후반의 멘토였던 거구나 싶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것이 가치로울 인생에 대한 정답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해답없는 질문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방황했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많은 책들을 읽고 탐구하면서, 신프로이드 학파인 에릭 프롬을 만나게 됐다. 그의 책 “선과 정신분석, 그리고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는 프로이드는 인간의 정신병리학적 문제들을 끄집어 내어 나열만 하고 있을 뿐 답을 주지 못함을 지적하며, 그 해답은 선불교의 종지와 수행 방법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이드를 받게 됐다. 그는 일본의 선종 템플에서오랫 동안 불경을 공부하며, 명상, 묵언, 참선수행을 했노라고 했다. 나는 그얘기를 접하고서, 전류가 흐르듯 공감을 했다. 동양인이며 한국인으로써,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할 동양 사상의 원류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이 너무도 모순이라고 느껴졌다.
Wheiza Kim, Into the fog/알 수 없는..., 48"x14"x3", acrylic on natural wood, 2015
대학에 가서도 동양미술사 속의 그 많은 불교미술이 무었을 말하려는 것인지 깊히 가치로운 생각을 품어도 본일이 없었다. 가슴에 와 닿지않고, 건성으로 보아온 동양예술들이 내겐 그냥 지리한 전통 속에 뭍혀있는 그 무엇일 뿐이었다. 정신의 본질적 엑기스로 무엇에도 결코 희석되어져도 변질되지않고 동양인의 유전자 속에 흐르고 있을 의식이 깨어날 어떤 빌미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깊디 깊게 서양식 가치관의 흙으로 메꾸어져 버린거다. 마치 유물을 발굴하듯이 동양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파내어 보아야했다.
일제통치 시대를 겪으면서 문화말살 정책 속에서,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감 위에, 한국동란의 완벽한 폐허 속에서, 전통과 주체적 정체성의 불모사회가 되버렸고, 그속에서 교육받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이어 전달된 어설픈 서양 실용주의 교육의 병폐가 내 모든 뇌리 속에 입력된 것을 알게 됐다. 서양 의 미학과 예술론의 합리성과 쌓아가기가 미덕인 플러스적 가치 척도로 비우는 것이 미덕인 마이너스적인 동양 예술정신인,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 더중요한 두 미학을 어떻게 해야 내 작품 속에서 화합이 가능할 수 있을까? 라는 숙제가 나 자신에게 주어졌다. 그림을 보고, 그리고, 하고 싶어하며, 그러한 마음을 내는 나는 누구인가?그 주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의 해답을 얻기위해선 필연적으로 나를 움직이는 주인인 내 마음이 무언가를 먼저알려면 선불교의 경전공부부터 먼저 해야한다는 에릭 프롬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지구의 꼭지점이라는 히말라야로부터 흘러내려 서양과 동양으로 펴져내린 인간 정신의 엣센스가 흙으로 메꾸어진게 아니었다. 깊디깊은 지하 계곡으로 스며들어 나에게까지 도달되어 흐르는 석간수처럼 청정한 사유는 내가 아지 못했을뿐, 내 생의 전반에 걸쳐 피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선불교의 종지인 반야심경과 금강경 공부를 하고 서양심리학보다도 더 세부적이고 깊은 체계를 가진, 인간의 마음을 다룬 불교의 인식철학인 유식학에 대한 독학을 시작했다. 한문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터라 지독하게 어려운 공부라는 것을 알았기에 수많은 해설책을 아무리 이것저것 읽어보아도, 혼자서 하기엔 불가능한 공부였다. 서양 사상가들이 주장하던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심오한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는 길이며 수행 철학일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Wheiza Kim, Lonly journey/고독한 여정, 36"x14"x3", acrylic on natural wood, 2003
나는 출가를 할 수는 없었기에 인연이 닿은 은둔자이신 선승께 과정지학을 청하여서 승낙을 얻었다. 그후 꽤 오랜 해, 절간의 정원을 지나 다니며 공부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은 내 평생의 가장 가치로운 행운이었다. 그러면서 부터 그림을 그리는 일도 훨씬 일취월장하는듯한 느낌으로 늘 환희심이 났고, 내가 무엇을 그리려고 했었고, 그에 대한 자신감이 뚜렸해졌다. 몇해 동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었기에 놓았던 붓을 다시 잡고 내가 그리고자 하는 메시지와 뚜렷한 의도를 표현하면서 개인전도 열고, 공모전에도 몇번 응모를 했다. 소위 작가로서 세상에 등용을 하려면 통과 례를 밟기위해서 였다. 그러나, 매번 입선으로 그치는지라 낙망하며 상복을 지질이도 못타고난 것을 비관하며 속이 몹시 상했었다. 관계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상을 받는 것은 다 뒷거래가 있어야 하는 일이라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아지 못하던 나로선 화를 참을 수가 없엇다.
하루는 스님께 그 분노심을 말씀 드렸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그것 참 잘된 일이구먼, 콧구멍 없는 소가 절로 되었으니”. 나는 도무지 어리둥절했다. 콧구멍 없는 소란 코에 코뚜레 구멍이 없으니, 콧뚜레를 낄 수가 없어 아무도 어디로도 끌고 다닐 수가 없다함이다. 소라는 동물은 경속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을 비유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 공모전에 상이라도 받았다면, 그 공모전의 의도에 코가 꿰여 박수를 받으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얼마간은 좋은 기분으로 어깨춤을 출지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원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길로 끌려다니기가 십상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본질이 수행과 같아서, 자신의 마음뿌리인 아뢰야식과 만나서 집중하고 철저한 자기 내면을 응시하려는 최상승의 길을 택한 것과같다. 어째서 남의 의지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짓을 부러워하는 지 내 어리석음을 질책해 주셨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창피한 속물이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Wheiza Kim, Lucid/황홀, 24"x12"X3", acrylic on natural wood, 2006
유식학을 공부한 후 인간의 심상을 기준으로 관조하며 그림을 그리겠다고 초발심을 낸 작가가 탐욕의 명예에 집착하여 자신의 코뚜레를 들이대며, 나를 제발 좀 끌고가줘하며, 어떤 무리에 속하지 못한다고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으니, 말과 생각, 마음과 행위가 일체되지 못한 채 따로따로 있었음이 여실히 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불교 초기 경전 수타니 파타에서 나오는 구절인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헛된 욕망을 비우고,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으로 늘 삶을 관조하며 살아야 하는 정신이 바로 예술가와 수행자의 길이라는 가르침을 한번 더 가슴에 깊이깊이 새기며,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경쟁 공모전에 얼굴 내밀기를 접었다. 그리고 선불교적 사유방법으로 나의 생과 작품세계를 일구어 나왔다.
P.S. 나는 어느 절에 나가는 불교신자도 아니다. 그러나 선불교가 무언가에 대해 내 경험을 설명하고싶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발생 내지는 변질되긴 했겠지만, 어떤 무엇도 막막한 처참한 시대를 겪으며, 불교의 본래 모습이 아닌, 세속의 나약한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빌고, 빌어주기 수단으로 슬픈 일이지만 대부분의 전통 절들이 왜곡 변형되어버려서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특히나, 불교의 모든 행색이 미신으로 몰아 부쳐져버린 예수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본래 달마선사의 종지를 지키는 선불교는 인간의 의식을 개혁시켜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수있는 긍정적이고, 최상의 대자유의 길을 가르치는 자기수행 공부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사에 남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불교의 영향을 입었으며, 인문학뿐 아니라, 요즈음 양자 물리학이나 천체 과학이론 학자들 조차 마지막 해답의 흰트를 불교의 우주관에서 찾아내고 있다. 선불교의 사유의 체계는 모든 동서문화의 깊은 뿌리임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