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2013.03.06 04:21
(23) 펜실베니아주 리하이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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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클라인이 300불 받고 그린 벽화가 펜실베니아주 리하이튼(Lehighton)의 어느 부대 연회장에 걸려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클라인이 고향에서 맥주도 얻어 마시면서 오일에 맥주를 섞어 그렸다는 벽화를 보러 가는 길, 한때 레저타운이었던 짐 토프 타운과 와이너리 방문도 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클라인이 동양 서예보다는 석탄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23) 리하이 밸리(Lehigh Valley): 프란츠 클라인 벽화를 찾아서
리하이튼 미 341부대의 풍경 벽화
2013년 3월 펜실베이니아의 친구 어머니댁을 방문했다. 어머니의 75세 생신을 축하하면서 아들은 울프 칸(Wolf Kahn, 1924- )의 파스텔조 풍 판화 ‘Down in the Valley(2006)’를 선물했다. 다음 날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 펜주의 리하이밸리(Lehigh Valley)를 둘러보게 됐다. 사실 화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1962). 때문이었다.
탄광촌인 리하이밸리엔 와이너리도 제법 있을 뿐 아니라 한때 휴양지로 스위스의 레저타운을 연상시키는 짐 토프(Jim Thorpe)라는 마을도 있다. 디트로이트가 1920년대 자동차 도시로서 황금기를 누렸던 것처럼, 리하이밸리도 한때 광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빈 타운이었다.
Pennsylvania Landscape(1948-49)
마침 그해 뉴욕타임스의 3월 1일자엔 미술비평가 로버타 스미스가 쓴 프란츠 클라인의 전시 ‘석탄과 강철(Coal and Steel)’ 리뷰가 실렸다. 버룩칼리지의 시드니미쉬킨갤러리(Sidney Mishkin Gallery)에서 거의 끝나가는 클라인의 전시를 소개한 글이다. 그 중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1946년 클라인은 펜실베니아의 모든 풍경을 지금도 남아있는 리하이튼의 미314 부대(American Legion Post 314)를 위한 14피트의 벽화에 모았다. 그러나, 갤러리에서 소개되는 작품은 복사판이지만, 그래도 보는 게 어딘가. 아마도 그 작품은 WPA(정부미술프로젝트) 산하의 어떤 벽화보다 나을 것이다.”
리하이톤의 베테랑군인 클럽 ‘미 314 부대’에 있다는 벽화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마크 로츠코, 윌렘 드 쿠닝, 필립 거스톤도 미니멀리즘이나 추상표현주의에 들어가기 전 풋풋한 구상화 시절이 있지 않았나?
흑백 추상표현주의 그림으로 획을 그은 프란츠 클라인의 풍경화가 궁금했다. 한국전,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 용사들이 모여 회의하고, 자녀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술을 마시는 연회장에 그림이 걸려있다니…
Franz Klein, Chief (Train) (1942)
리하이밸리 와이너리 & 짐 토프 타운
피너클릿지 와이너리. SP
부대로 전화를 하니 오후 3시 30분까지 회의 중이라 연회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리하이밸리에서 3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피너클 릿지(Pinnacle Ridge)와 갈렌 글렌 와이너리(Galen Glen Winery)에서 시음하고 레조트타운 짐 토프(Jim Thorpe)를 둘러 보았다. 독일의 대표와인 리슬링을 만들고 있는 갈렌 글렌은 윈터마운틴이라는 산꼭대기에 자리해 있었다. 폭풍의 언덕처럼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같은 포도라도 지질(테루아)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더니, 갈렌 글렌 와이너리는 독일 모젤 지역과 지질이 유사해 훌륭한 리슬링을 생산하고 있었다.
갈렌글렌 와이너리에 전시된 리슬링의 토양 샘플.
펜주와인협회에서는 이 지역 와이너리 8곳을 돌며 시음하는 패키지 ‘리하이밸리 와인 트레일’($35)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롱아일랜드나 핑거레이크 와이너리처럼 밀집되어있지 않고, 분산되어 흥에 취해 있기 어려운 것이 흠이다.
리하이톤에 이웃한 짐 토프(Jim Thorpe)는 전설적인 스포츠맨의 이름을 딴 마을이다. 짐 토프는 인디언 원주민 스포츠맨으로 1912년 올림픽 5종경기, 10종경기 금메달을 딴 철인. 당시 광산업으로 부유했던 이 마을의 기업인이 짐 토프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건축양식이나 극장을 보면, 한때 번성하던 타운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전엔 오페라하우스도 있었지만, 지금은 퇴락해서 왕년 팝 그룹이나 모창 밴드의 콘서트홀이 되었다.
짐 토프 다운타운
또, 아름다운 빅토리안 양식의 주택들은 뉴욕의 벼룩시장에 나올만한 오래됐지만, 조잡한 물건들을 파는 골동품 가게들로 운영하고 있다.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가 보름도 더 남았는데, 집집마다 녹색 클로버 장식이 크리스마스를 방불케했다. 아이리쉬가 많은 타운인듯 했다.
Photo: American Legion Post 314
마침내 찾아간 미314부대 건물. 대낮에 베테랑들이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재정담당 해리가 우리를 반겨준다. 벽화가 있는 라운지로 들어갔다. 결혼식 리셉션에 딱 좋을 법한 대형 연회장(Banquet Hall)이 있었다.
연회장의 중앙의 바 뒤 벽에 프란츠 클라인의 컬러풀한 마을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컴컴한 바에는 바텐더가 만지다가만듯한 위스키, 보드카, 럼 병들 뒤에 널려있다. ‘위스키나 맥주를 흘리면‘ ‘담배 연기가 찌들면 어쩌나?’…
다행히 벽화 앞 유리벽이 술로부터 클라인의 그림을 보호하고 있었다. 베테랑 해리는 벽화를 비추는 조명을 올리기 위해 한참 스위치를 찾았다. 그런데, 형광 전등 두개 중 하나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고장난 것.
갑작스런 방문객을 맞은 해리는 전등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무안한지 “아마도 클라인이 차가운 맥주 몇 잔을 받고 그렸을지도 모르는 그림이다”라 껄껄 웃었다. 그리고, “얼마 전 미술관 사람들이 방문해서 사진을 찍어갔다”고 말했다. 그 복사판이 펜주 알렌타운뮤지엄에서 시작되어 뉴욕 시드니미쉬킨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것임이 분명했다.
300불 받고 그려준 연회장 벽화
'Leghighton'(1946) Photo: Times News.
1946년 프란츠 클라인은 자신이 성장한 리하이톤에 머무르면서 14ftX6ft 크기의 대형 벽화 ‘리하이톤(Lehighton)’을 그리게 된다. 단돈 300달러를 받고 리하이튼의 풍경을 컬러풀하게 그려 미 314부대(American Legion Post #314)의 연회장에 걸리게 됐다. 클라인은 오일에 맥주를 섞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수명을 다한 형광등 때문에, 그리고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담배와 시가 연기, 먼지, 알코올 기운이 흡착되어서 인지 그림은 좀 찌들어 보였다. 하지만, 클라인의 라하이톤 벽화는 커쉬너와 라이오넬 피요닝거의 컬러풀하고 명랑한 풍경화처럼, 이동하 소설의 ‘장난감 도시’를 읽으면서 연상할 수 있는 향수어린 그림이었다.
이곳을 찾느라 GPS를 썼더니 아이폰 배터리가 떨어져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플랜 B로 카메라를 가져갔어야하는데...
미쉬킨 갤러리의 복사 사진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Palmerton, PA(1941)
"내 그림의 영감은 서예가 아니라 석탄"
검으나 선, 희나 여백
스튜디오에서 프란츠 클라인
그러면,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버룩칼리지의 미쉬킨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프란츠 클라인의 ‘석탄과 강철(Coal and Steel)’전으로 가본다. 왜 석탄이고, 강철일까?
클라인은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는 기운찬 획의 흑백 추상화로 이름을 날렸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일본 서예의 영향을 받았냐?"고 물었지만, 클라인은 언제나 "No."라고 대답했다.
클라인의 검은 획은 서예가 아니라 그가 태어나서 자란 펜실베이니아 광산촌의 철로와 검댕이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검은색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자, 7살 때 자살로 마감한 아버지에 대한 미스터리의 블랙홀일지도 모른다.
프란츠 클라인 자화상, 1946
여기서 프란츠 클라인의 생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프란츠 조세프 클라인(Franz Jozef Kline)은 1910년 펜실베이니아주 윌케스-바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집 주인이었으나 프란츠가 7살 때 자살했다. 돈 문제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엄마 앤 로우 클라인은 영국에서 17살 때 펜주로 이민와 베들레헴의 세인트루크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다. 엄마는 재혼했지만, 프란츠는 백인 고아들이 다니는 필라델피아의 지라드칼리지에 입학한다. 클라인은 트라우마가 가득했을 이 시절에 대해서 평생을 함구했다.
리하이톤에서 자라면서 석탄을 실어날르는 증기기관차와 철로, 다리, 터널 등에 매료된 클라인은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밝힐 수는 없었다. 당시 화가가 된다는 것은 자살행위로 간주됐다. 사람들이 생존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던 때였다.
Four Studies, 1946
클라인은 보스턴대학교 미대에 진학, 2년간 다니다가 런던으로 가서 허털리미술학교(Heatherly’s School of Fine Arts in England)를 다녔다. 여기서 미술 수업에 모델로 온 발레리나 엘리자베스를 만나 결혼했다. 필라델피아미술아카데미와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가르쳤지만, 전업작가가 되기위해 강단에서 내려갔다.
윌렘 드 쿠닝 만나 추상으로
1938년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정착한 이후 클라인은 다운타운 시다 바(Cedar bar)에서 윌렘 드 쿠닝, 잭슨 폴락, 마크 로츠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냈다. 색깔을 줄이고, 선을 강화하는, 흰 캔버스에 검은 획으로 힘차게 그린 흑백 추상화였다.
클라인은 "난 검은 선을 그리듯이, 하얀 선으로도 그린다. 하얀색도 검은색만큼 중요하다" 고 밝혔다. 여백을 강조하는 동양화와 서예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의 뉴욕 첫 개인전이 열린 때는 1956년, 시드니재니스갤러리였다. 전시에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초대했다.
Pennsylvania Street Scene (Pennsylvania Mining Town), 1947
뉴욕에 정착한 이후에도 클라인은 최소한 1달에 두 번씩은 고향 리하이톤에 내려갔다. 가난한 화가였기에 고향에서 음식값이나 이발료 대신 그림을 그려주던 시절이 있었다. 미 341부대의 벽화가 ‘차가운 맥주 몇 잔’의 대가는 아니었지만.
클라인은 1962년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로버트 라우셴버그, 사이 트웜블리, 마크 디 수베로 등이 클라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클라인은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윌렘 드 쿠닝•마크 로스코보다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런데, 2012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957년작 ‘무제(Untitled)’가 무려 3600만 달러에 팔리면서 재평가됐다. 이전 그의 작품 최고가는 2005년 크리스티에서 640만 달러에 팔린 ‘까마귀 댄서(Crow Dancer, 1958)’였다.
2012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600만 달러에 팔린 프란츠 클라인의 '무제'(1957).
뉴욕 주요 뮤지엄 소장 프란츠 클라인 작품
Chief, 1950. MoMA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