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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김희자: 과정, 흔적, 사라짐의 예술
바람의 메시지 (14) 대지미술(Earth Art)
과정, 흔적, 사라짐의 예술
Photo: Wheiza Kim
내가 사는 롱아일랜드 사운드의 자갈 모래 해변을 반 마일정도 걷노라면, 1차대전이 끝나고서 살은듯이 죽어 누워있는 크나큰 목선 3척이 있다. 허망함를 채우기라도 할 양으로, 빈 몸둥이에 자갈을 체우고서 뱃 머리를 수평선을 향한 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듯 준비된 채 굳어버린 모습이 100여년이 되어간다고 전해진다. 군수물자들을 운반해주던 수송선이었다고도 하고, 해군 훈련용 동력선이었다고도 한다. 길이가 30미터는 족히 넘을 몸체가 무수히 만났을 태풍과 파도에 부러지고 깨져서, 검은 골격만 남아있다. 부식된 큰 쇠못들이 삭아서 얽혀진 모습이 마치 무덤에서 삐져나온 뼈들 같기도하다. 그 모습이 마치 광활한 해변가에 펼쳐지는 어떤 공연 무대로 보인다. 하늘과 바다, 자갈돌 사이로 파도가 부딪히며 작은 모래틈 사이로 속삭이듯 흐르고, 갈매기들이 뭔가를 화답하듯 한 긴여음이 배경 음악으로 펼쳐지며 해그름에는 긴그림자를 두르고선 더욱 서사시적인 어떤 특별한 감동을 준다. 기약없는 명령을 기다리며 굳어 버린 세 전우가 나란히 누워서 파도의 목소리로 무용담을 들려주는 듯한 바람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세월 속에 버려진대로 생주이멸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기위한 대지미술(Earth Art/Land Art) 작품이라 불러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사계절 내내 다른 날씨 변화와, 해류의 들고 남에 따라 숨었다간 나타나고, 또 사라지곤하는 장면이 흐르는 시간에 따라 소멸되어 감을 보여 주려는 대지미술 작품 그대로다.
몇십년 전 이집트의 카이로로 여행을 갔을 때 피라미드 군집 속에서의 오디오 쇼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또한 일종의 훌륭한 대지아트라고 분류하여 충분한 이벤트였다. 광활한 사막에 피라미드들이 서있고 수억년의 밤이 검은 커튼을 두르면 가까이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인들의 칼 모양의 초생달이 떠오르고, 칠흑같은 무대 세팅을 끝낸 사막의 우주 극장에 어딘가 먼 허공으로 부터 말발굽 소리들과 함께 전쟁터의 함성이 울려오고, 신화 속의 왕들의 목소리와 음악으로 전설을 얘기해준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온 영혼들이 내 손을 잡고 우주를 유영하는듯 황홀경으로 가이드해 갔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 기대 없이, 그냥 밤 사막 구경이려니 하며 따라 나섰던 터이라서 더욱 선입견 없는 무아경으로 몰입되었던것이 아닐까도 생각이 들었지만, 내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이었다. 사실 수십년도 더 된 옛시절이라 어두운 사막의 피라미드에 있는 어둑한 라이트와 가끔 비추는 써치라이트 정도의 효과 밖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스토리를 숨겨 묻어둔 이곳 저곳의 오디오 스피커의 음향효과가 공간 차이에 의해 멀고 가까웁게 듣는 이로 하여금 시공감각을 확장하여서, 광대한 우주 속에 있는듯 느끼게 해주었었다.
Photo: Wheiza Kim
아마도 지금 이 시대라면, 분명 홀로그램을 제작하여 허공에 비춰서 더욱 상상력을 고조시킬 어떤 효과적 장치를 했을꺼다. 그러나, 웅장한 심포니일수록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들어야 더욱 울림이 커짐을 실감할 수 있었고, 시각적 이미지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무덤들로 충분히 장관이었다. 나는 그 경험을 가졌던 이후로, 가끔 나도 어떻게 내 작품을 통해 그러한 감동을 만들어 타인에게 전할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했었다. 아마도 그 감동의 잠재의식이 나의 인스톨레이션 작품인 "인드라의 망(Indra's Net)”을 출산시켰을꺼라 여겨진다. 피라미드 형태의 삼각 입체텐트 구조로 , 깊이 쪽의 면에 삼각형 캔바스에 그림을 그려서 세변에 거울을 잇대었다. 설치 각도에 의해 반사된 이미지지가 또 반사가 되어 무한대가 되도록 장치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일들이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끝없이 연결 관계로 존재되어진다는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 방법을 선택한거다. 작품 자체가 거대한 만화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의 구조물 인데, 그 이미지의 에코속에서 엑스타시를 느끼도록할 의도였다. 내가 존경하는 도날드 쿠스핏(Donald Kuspit)이라는 미국 평론가는 그 구조 속에 들어가서의 자신이 마치 무중력 상태로 떠있는듯 현기증을 느낄정도였다고 경탄을 하며, 어떤 승화된 영혼의 경험을 했노라고, 그의 리뷰에서 표현해주었다.
나는 어릴적에도 그러했지만, 최근 까지도 각종 연을 만들어서 연날리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것은 연날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우주공간을 향한 매우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대지아트 개념의 열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지아트라 불리는 스펙타클한 작품에 관한 정보를 가진 후부터는 늘 작업의 크기에 대한 질투심과 함께 나로선 이룰 수 없는 장대함에 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미니멀 아트가 등장될 무렵, 처음에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즉 가난한 미술이라는 뜻대로 가난한 화가들이 캔바스를 떠나, 자연과 인공의 관계 속에서 그 과정을 보여주고자 흙을 전시장으로 끌여 들인 일에서 발전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적인 수많은 미디어를 동원하고, 천문학적 경비를 들이는 거대한 이벤트로 변질되었다. 어쨋거나, 그들이 말하는 작업의 과정과 흔적그리고 사라짐의 무상함을 연출한 작업들을 보며, 최대한의 힘을 다해 만든 어떤 결과물을 철거하고, 본래 없음의 상태로 환원하기 행위는, 무(nothing)를 향한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보여 준다.
Wheiza Kim, Indra"s net, 369"x144"x108", 1996, Acrylic on canvas, fabric, mirrors, and aluminum framework
크리스토(Christo)와 잔느 클로드(Jeanne-Claude)의 도시마다에 거대한 건물과 다리를 천으로 덮어서 싸매기, 마이애미의 작은 섬에 야광 핑크천을 둘러 관객마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서부터,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결국은 자연으로 환원될 것을 알면서 만든 나선형 방파제 작업들을 영상 비디오를 통해 보면서 항상 경탄을 했다. 그런 겨울 어느날, 크리스토의 센트럴파크에 설치된 7500개의 스칼렛 칼라의 "The Gates"라는 커튼같은 설치미술을 가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붐비는 관람객들로 어떤 어뮤즈먼트 놀이터에 온 것 같았을뿐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쩌면, 고요한 새벽 아무도 없는 그 공원엘 걷고 있었다면, 침묵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부드럽게 펄럭이는 헝겊의 날개짓에 감응되어 어떤 메시지를 전해 받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만 앉고서 돌아 왔었다. 나중에 작가의 TV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로는, 뉴욕시로부터 수없이 리젝트를 당하며, 26년을 준비하여서 2주일 설치했다가, 한달간 해체를 했다는 그 공허한 해프닝에 대해 그가 부여한 의미는 "마치 어린시절의 추억처럼 아무리 소중한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였다.
대지미술이라는 쟝르는 우선에 작품 소유가 불가능하고, 스펙터클함을 연출함으로써, 숭고(sublime)의 미를 모든 관객과 함께 공감하는것일뿐, 물질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반문명적인 문화현상과 뒤섞여, 자연이 미술관이며 작품이 자연인 역설을 이루어내는 의도가 내겐 참으로 흥미롭다. 그 작가들의 예술행위가 마치 티벳의 승려들이 몇달 몇일을 열심히 색모래로 만다라를 그린후 미련없이 지워버리는, 진정한 무소유와 마음의 자유를 획득하기위해 집착을 여이기를 수행하는 것같이 생각됐다. 대지미술 작가들은 작가와 작품이 분리된 상태에서 작품을 이해하길 바라지 않으며, 작업의 진행 속에서 타자를 통해 자아를 인식 해가는 과정을 표현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간 자체가 작업이며, 관람이 함께하는 호흡으로 시공을 넘어 함께 소통하기를 실천한다. 나는 그들의 광활한 자연과의 교류와 고차원적 자유정신에의 대화를 늘 부러움과 존경을 보낸다. 그들이 각종 영상매체들을 동원하여 세상사람의 이목을 끌기위한 기위한 목적이 결코 순수한 무위가 아닌 유명세를 위한 의도가 최종 목표인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을 놓지 못했으나, 소통과 전달을 위한 수단임에는 분명하다는걸 인정은 한다.
Photo: Wheiza Kim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사하라 사막, 안데스 산맥등의 대초원에 크지도 않은 작은 돌무덤이나 많드는 우스운 인간의 흔적 남기기 등은, 단지 답답한 스튜디오를 튀쳐나오려는 작가의 변명에 불과한 것아닐까 하고 생각도 됐었다. 그러나, 걷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여러 행위로 황무지나 공원의 잔디밭을 명상적 걸음걸이로 걸어서 길 만들기 등에 서서히 설득되어서 긍정적 감동으로 닿아 왔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만드는 허공에 그려지는 드로잉, 반복을 통한 깨어있는 의식인 행위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간극 사이에서 스치듯 만나지는 각성, 선승들이 말하는 깨어있는 정신의 뜻을 그의 작업 행위를 통해 알아챌 수 있엇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미술은 종교적 수행이나 순례길 위의 순례자의 행위와 일치하는 엄숙한 그 무었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