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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박준: 공공의 적
사람과 사막 (8) 우정의 딜레마
공공의 적
Park Joon, Death Valley, California
2009년 한국에서 개인전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인사동의 강갤러리라는 소박한 장소였다. 작지만 1층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초대해준 갤러리 관장의 인격과 작가를 대하는 겸손한 태도가 행복하게 해주었다. 물론 1층이라는 장소가 주는 장점이(그곳을 지나가는 많은 관람객에게 자연스럽게 작품을 노출하고 많은 분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 줄 수 있었던 점) 나를 들뜨게 했고 즐거웠다. 전시한 지 4일째 되는 날 잠시 짬을내어 안동에서 친구 작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갤러리란다! 한 관람객이 작가를 꼭 보고 싶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만나서 이야기 하잖다. 친구와의 즐거운 시간을 끝내야 하는 아쉬움을 팬이 만나자는데 고맙지?! 위로하며 서울로 돌아와서 그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자기를 '유대균'이라는 조각가라고 소개하고는 자기도 사진이라는 장르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부친이 사진을 좋아하고, 많은 사진기를 구입하고, 사진을 찍고 만들기를 좋아한다며 앞으로 좋은 만남을 하잖다. 자기는 조각가지만 여러 개의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어서 가난한 작가들을 도와주고 작품을 구입해주고, 다양한 작가들과의 교제를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 작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기쁨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기 그룹에 사진가가 없으니 그룹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해보자며 큰 작품들을 여러 점 구입해주고, 다음에 또 연락하자며 떠났다.
내 기억에 '유대균'이라는 작가가 뚜렷히 각인되었고, 나는 그가 구세주 같았다. 그는 결코 거만하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따뜻했다. 물론 그의 겉 모습은 화려했다 큰 몸짓에 최고의 패션을 걸치고, 고가의 자동차를 몰고 수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래도 그의 태도는 늘 정중했다. 그후에도 여러번 만나면서 더욱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단지 그가 부자라서가 아니고 진정 겸손한 그의 태도가 좋았다. 전시가 끝나고 뉴욕으로 돌아와서도 자주 E-메일과 전화로 연락하며 교제를 나누었고, 많은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유대균이 즉석에서 나에게 명함을 만들어주었다.
한국에서 온 뉴스를 시청하는 중에 세월호가 팽목항에서 좌초하여 깊은 바다 속에 가라 앉았고, 아직 꽃도 피어보지 못한 수많은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배에서 구조되지 못하고 돌아 오지 못했단다. 너무 슬펐고 힘들었으며 이런 비참한 사고에 우왕좌왕하며 많은 어린 생명을 빼앗아간 정부당국, 해양 관계자, 선장, 선주들에게 분노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대균이라는 이름이 세월호 사건에 등장했다. 뭐지?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유대균 맞아? 큰 충격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그의 모습 맞다. 이런 세상에! 세월호가 소속되어있는 청해진해운이라는 회사의 회장 유병언이 그의 아버지란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 유대균이라는 사람이 공공의 적이 되어 있었다. 매스컴들은 그들의 부도덕함과 범죄사실을 여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나도 분노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좋은 사람을 '공공의 적'이라고 그를 정죄할 수 없었다. 마음으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었다. 지금 그는 영어의 몸이되어 죄값을 치루기위해 힘든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죄값을 치루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난 그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그는 이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물론 그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범죄자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내게 좋은 후원자였고, 친구였다. 공공의 적이지만 나에게는 참 좋은 조각가, 친구로 기억될 것이다. 혹자는 나를 욕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게의치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고민했던 일이다. 물론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털어놔도 무방할까? 고민되었다. 하지만, 난 이제 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아쉬운 것도 없다. 내 마음 가는대로 살고 싶다. 비록 나도 '공공의 적'으로 공격받을지라도!
박준 Park Joon/사진작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해군 제대 후 83년 암울한 정치적인 상황을 피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포토그래픽아트센터스쿨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됐다. 1997년 첫번째 전시 후 카메라 들고, 캘리포니아 데스밸리만 30회 이상 촬영했으며, 7월 뉴욕에서 LA까지 크로스컨트리 여행도 10여회 하면서 ‘로드 러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와이와 US 버진아일랜드만 빼고 전국을 돌았다. 아웃사이더로서 미국의 역사와 역사 속의 사람들로부터 교훈을 배우기 위해 떠난다. 1년에 2번씩은 대륙여행을 하고 있다. 2005년 뉴욕타임스는 생선과 인물을 모델로 작업하는 박씨를 대서특필했다. 그에게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