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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스테파니 S. 리: 한여름 낮의 꿈
흔들리며 피는 꽃 (27) 귀족과 하인 사이
한여름 낮의 꿈
Old Westbury Gardens Photo: Stephanie S. Lee
마음이 바쁘다. 누가 무얼 하라고 채근하는 것도 아니고 매여있는 직장이 있는것도 아닌데 시간에 쫓기듯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다보면 하루가 훌쩍 가고 일주일이, 한달이, 일년이 금새 가버린다.
요즘의 나는 나무를 기르느라 숲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올라온 새순들이 나무인지 잡초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죽이지 않겠다고 물주느라 분주하게 지내는 것 같다.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잘한 일들을 하고나면 정작 하고싶은 일을 할 힘은 남아있지 않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들이지만 결국 내가 해야만 하는 잡일들을 해치우며 정작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에너지와 시간을 죄다 소진시키는 동안 인생이 다 흘러가 버리는 것 같은 억울한 기분이다.
간섭과 관심은 무엇이 다른지, 욕심을 부리는 것과 최선을 다하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딱히 최선을 다 한적도 없는것 같은데 포기하는 법을 잘 모르는 우둔한 머리는 일상을 살면서 자꾸 먼 곳을 생각한다. 마음은 벌써 저쪽에 뛰어가 있는데 발이 더디게 움직여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듯 무언가가 영 답답하다. 한창 씨앗을 심고 키워야 하는 바쁜 시기의 중년이라 그런가… 아니면 나의 삶이 간소하지 못한 탓일까…
Old Westbury Gardens
집은 정리를 하고 또 해도 어지럽고, 시장은 매일같이 보는데도 냉장고가 차지 않는다. 케첩을 사고 나면 마요네즈가 떨어지고 식용유를 채워놓으면 우유병이 비어있다. 몇시간 들여 마침내 깨끗하게 마무리 된 부엌은 몇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설거지 감으로 가득 차고, 저녁에 해야지… 했던 일들은 그 설거지 감에 밀려 또 내일로 미뤄진다.
미뤄놓은 일들이 가슴에 남아 편히 자지못해 피곤한 몸을 일으키며 다시 또 하루가 시작 된다. ‘완벽한 상태란 없다. 그저 닥치는대로 최선을 다해 해 나가자. 생각하지 말고 실행 하자.’ 하며 다짐을 해보지만 지친 몸이 이제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줄이자. 비워내자. 덜어내자!’ 하다가도 ‘이것 하나만’, ‘이번 한번만’ 하며 소중한 시간이 또 흘러간다.
얼마전 들린 올드 웨스버리 가든에서 땡볕 아래 여러사람 죽어나며 길러냈을 아름다운 꽃들을 우아하게 감상하다, 그시대 사람들은 어떤면에서 지금보다는 좀 더 단순한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귀족으로 태어났을지 하녀로 태어났을지는 모를일이나, 귀족이었다면 일상의 일들에서 자유로워 형이상학적인 일들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았겠고, 하인이었으면 제 운명이 이미 정해져 헛된 꿈 꾸지 않고 일상에 매진할 수 있어 마음이 편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Old Westbury Gardens
이 집의 주인은 요리사가 맛있게 해준 밥을 장인이 만든 그릇에 담아 격식을 갖추며 먹고, 하인이 깨끗하게 치워놓은 책상에 앉아 정원사가 일년을 땀흘려 꽃피운 정원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채 흙 뭍지 않은 고운 손으로 편지를 쓰고 시를 쓰며 문학과 예술에 자신을 오롯이 바칠 수 있었겠지… 정원사는 정원사 대로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제 소명을 다해 나무와 꽃을 돌보며 일생을 바치는게 당연했을테고, 해마다 활짝 핀 꽃을 보며 보람있지 않았을까…
“포기란 부조리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좀 덜 불행해 질 수 있는 유효한 기술인지도 모릅니다.”
출발점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으면 되는것을… 귀족이 되고싶은 하인의 마음으로 꽃이 피길 기다리는 나는 내가 뽑은 풀이 잡초인지 꽃나무인지도 몰라 불안하고, 심었던 씨앗에서 싹이 날지 썩고 있을지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 하며 제 속을 태운다.
삶의 여유와 느긋함은 체력과 비례할 줄 알았는데 체력이 저하될 수록 마음이 더 급해지니 이것 참 큰일이다.
Old Westbury Gardens
https://www.oldwestburygarden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