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9)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2)
- 홍영혜/빨간 등대(70)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304) 이영주: 붉은 산, 동그리와 구멍들 -레드락 캐년 여행기-
뉴욕 촌뜨기의 일기 (45)
붉은 산, 동그리와 구멍들
-레드락 캐년 여행기-
글: 이영주/ 사진: 이명선(Melissa Lee)
산은 언제나 인간을 전율시킵니다. 계절의 변화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모하는 산의 얼굴은 그래서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산의 얼굴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뉴욕의 산들은 활엽수들이 많아서 가을이면 누가누가 단풍이 예쁜가 시합이라도 여는 것처럼 그 색깔들이 유려하기 그지없습니다. 몬태나의 산들은 길게 쭉쭉 뻗은 침엽수가 주종입니다. 키 큰 침엽수 밑으로 활엽수들이 지지대처럼 서서 그림을 완성해줍니다. 여름이면 활엽수들 사이로 온갖 들꽃들의 화려한 페스티발이 보는 사람을 매혹합니다.
9월에 갔던 네바다 주와 유타 주의 산들은 보편적인 산에 대한 저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비틀어 주었습니다. 산이라면 숲이 우선 떠오를 정도로 울창한 밀림부터 상상하는데, 이곳의 산들은 그 색채와 형상이 여태까지 봤던 산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시작은 라스베가스에서 20마일 떨어진 레드락 캐년(Red Rock Canyon)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억년 전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레드락 캐년은 네바다 주의 국립공원입니다. 광활한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안의 19만5천8백19에이커를 끌어안고 있는 레드락 캐년은 붉은 바위가 산을 이루고 있는 진기한 모습입니다. 약 1억8천~1억9천만 년 전, 주라기에 미 대륙 서남부를 대부분 차지했던 사막의 모래언덕이 융기하고 이 과정에서 퇴적물이 암석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 축을 이루는 흰색과 회색의 대부분인 석회석과 백운석은 약 5억 년 전 바다였던 고생대에 2억5천년의 세월에 걸쳐 바다 밑에서 형성된 것이라는데, 몇 억년이라는 말이 참으로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오래 전 아프리카의 남아연방에 갔을 때 희망봉 앞 바다 절벽들이 50억년 동안 비바람과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져서 이루어진 것이란 설명을 들으면서 몇 십 억년이라는 말이 너무 멀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더랬는데, 레드락 캐년이 5억년이니 4억년이니 하니까 비로소 현실감이 생겼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체감되었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붉은 산의 색깔은 마치 붉은 색 무지개처럼, 짙고 옅은 붉은 색깔의 변주곡이 무척 다양합니다. 붉은 색이 안단테로 이어지다가 알레그로로 색의 농도가 다양하게 바뀌기도 하고, 그 안에 돌연변이처럼 흰색이나 회색이 스타카토로 뛰어들기도 해서 마치 위대한 추상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같습니다.
레드락 캐년 산의 특징은 둥글둥글한 모습입니다. 방송인 한상진씨는 전 아나운서였던 아내 김소영씨를 얼굴이 동글동글하다고 해서 ‘동글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던데, 레드락 캐년의 모습은 크고 작은 그 동글이를 포개놓은 것처럼 둥글둥글한 모습이 익살스러웠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하느님이 여기다 똥을 누셨군.”, 하는 바람에 “맞아, 맞아. 하느님이나 이렇게 거대한 똥을 누실 수 있지.” 하며 깔깔 대다가 “그렇게 말하면 하느님한테 불경죄로 걸려. 하느님 똥 대신 하늘 똥으로 하자.”면서 우리는 레드락 캐년을 하늘의 똥으로 명명해버렸습니다.
레드락 캐년의 붉은 아즈텍 사암에서 시작된 탄성은 ‘불의 계곡(Valley of Fire)’에 이르면 절정에 이릅니다. 라스베가스에서 동북쪽으로 50마일 정도 떨어진 불의 계곡은 1935년, 네바다 주 최초의 주립공원이 되었습니다. ‘트랜스 포머’, ‘토탈 리콜’ 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 불의 계곡은 커다란 구멍들이 뚫린 바위가 인상적입니다. 모래밭 한쪽 크게 뚫린 바위 구멍에 들어가서 에스더와 에밀리가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아주 멋지게 나왔습니다.
생긴 모양이 벌집 같다고 해서 벌집(Bee hives)이란 별명이 붙은 바위들도 있고, 아치락(Arch rock)은 아치가 너무 작아서 사실 실망했습니다. 유명한 것은 암각화(Petroglyph) 입니다. 남아연방의 암각화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20가지’에 들어 있어서 남아연방에 갔을 때 그것을 보러 박물관에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암각화는 ‘아트라틀 락(Atlatl Rock)으로 올라가서 봐야했는데(아트라틀은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창을 의미합니다), 인디언들이 이 높은 바위를 목표로 누가 창을 더 높이 던지는지 겨루었던 장소였답니다. 지금은 철제 계단을 만들어서 그곳까지 올라갑니다. 거기에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가 있습니다. 남아연방 것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집, 사람, 동물, 나무들이 있는 그림에서 인디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산의 진미는 트레킹을 해야 맛볼 수 있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서 불의 계곡 모습을 얼마간은 내려다보며 숨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색깔의 나이테 같은 바위의 신비한 문양들과 각양각색의 바위 형태를 보니 더더욱 몸이 들썩여서 다음에 다시 와서 반드시 제대로 된 트레킹을 하자고 미리 다짐을 했습니다. 유명한 코끼리 코 바위는 시간이 넉넉지 못해 다음으로 미뤘지만, 동쪽 켠 저 멀리 산 사이로 보이는 미드호수(Lake Mead)가 특별 출연해주는 바람에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개성이 다른 산들과 호수의 조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풍경에 우리들의 감성은 하늘 높이 나르고 날아올라 터질 듯 부풀었습니다. 역시 산은 물과 함께 해야 그 존재가 더 빛납니다.
*이번 여행은 우리 싱글클럽 ‘호리카’의 멀리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완성시켜 주었습니다. 네바다와 유타의 산이 너무 좋아서 그곳에 집을 얻어 한 달 동안 살면서 가고 또 가고 한 그녀 덕분에 짧은 기간에 단 일분의 낭비 없이 완벽한 명산 순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더가 운전을 도왔고, 에밀리가 총무를 맡아 알뜰하게 살림을 책임지는 등, 서로의 협력이 무엇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국립공원 카드로 국립공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저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하. (참고로, 시니어 국립공원카드는 한번 만들면 평생동안 국내 모든 국립공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이명선 Melissa Lee/freelancer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대학원 미술교육학 전공, 사진 부전공. 항상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과 사진을 찍으면서 무심코 지날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