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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이수임: 사과 드립니다
창가의 선인장 (61) 안개 낀 남자
사과 드립니다
잠을 잔 것인지, 자지 않고 눈만 감았다가 뜬 것이지 알 수 없는 몽롱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후배가 술 마시고 나이 든 분에게 실수한 다음 날, 사과 한 상자를 들고 찾아가서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옛일을 생각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토플을 보고 유학은 왔지만, 전공을 바로 시작하기에는 부족해 전공과 영어 수업을 병행하던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 집으로 가려는데 동양 남자가 ‘한국분이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나이가 나보다 꽤 많은 듯한 점잖은 분이다. 한국 남자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하거니와 함께 수업 듣는 사이라 달라는 전화번호를 줬다.
영어수업만 듣는다며 이어지는 그의 사연은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와 퀸즈에서 장사하며, 건물 사고, 자리 잡느라 결혼이 늦어졌다고 했다.
브루클린에 있는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 쉽세이드 베이 바닷가 식당, 맨해튼 5애브뉴 고급 식당 등 비싸고 좋은 곳으로 안내하며 나에게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데이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그분에게 전화했더니 외국인 여자가 받는 게 아닌가! 순간 ‘이게 뭐지!’ 하는 느낌으로 멈칫했다.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라는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신분문제 해결로 외국인과 결혼하고 향수를 달래려고 한국 여자를 찾는 경우?
미국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없어 만나기가 두려웠다. 대학동창 모임에 간다는데 함께 가자는 말도 없고 점점 의심이 들어 슬슬 피했다.
어느 날, 학교 근처 스탠드 바에 앉아 이야기하던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몇 번을 만났다고, 상대방에 대해 뭘 안다고 결혼을? 사람은 점잖고, 잘해주는데 결혼하기에는 삼촌같은 느낌이 드는데다 더 알아가기도 두렵고 비싼 식당에서 얻어먹을 수만도 없고... 한참을 망설이다 "죄송합니다. 실은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쥐어짜듯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몹시 실망하는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어찌할 줄 몰랐던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유부남과의 만남이다. ‘어느 남자가 나 유부남이요.’ 하고 떠들겠느냐마는 백그라운드가 짙은 안개에 잠긴 듯 불투명한 남자는 유부남일 확률이 높다. 유부남을 만난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쳐서 내 것으로 하겠다는 도둑 심보다. 또한, 여러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그의 부인과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 특히나 친정엄마를.
그는 어떤 의미에서 진심으로 나를 결혼 상대로 대했을지도 모르고, 친정 아버지 바람으로 상처를 받은 내가 과잉 반응을 해서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혹시 제가 오해했다면, 사과가 곁들인 그림과 지면으로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