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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스테파니 S. 리: 단지 뉴욕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흔들리며 피는 꽃 (36) 친구 끊기의 효과
단지 뉴욕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Modern Wish & Venerable Wish, Stephaine S. Lee, 2015, Color & gold pigments,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31˝ x 25˝ x 1 ¾˝
밤 9시 30분. 하루종일 이어진 수업을 마치고 뭐 놓친 전화는 없나… 폰을 확인하니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서 메세지가 왔다. 왠일이지? 반가워라! 피곤한 하교길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나 하며 가야겠다… 하고 메세지를 열어보니 이런, 쇼핑 부탁이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세일을 해서 아들 옷을 사려고 하는데 해외 카드가 안되서 내 카드로 결제하면 안되겠냐고, 아주 미안해 하며 물어보긴 했지만 속상하다. 이 친구는 이럴 친구가 아닌데… 일년만에 이렇게 불쑥 연락해서 이런 부탁할 친구가아닌데… 이 친구마저 이렇게 소원해지고 마는 걸까… 씁쓸하다.
타국생활을 하다보니 한국의 것이 그립고 동창이 반가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동창이 반갑지가않다. 잘 해주고, 욕 먹고, 원수되는 일이 더 많아서 이제 학교 때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아닌 동창이라는 이름의 타인들이 무서워졌다. 슬픈 일이다.
뉴욕에 산다는 이유로 평소엔 왕래도 없다가 불쑥 연락해 레스토랑이며 호텔정보를 물어와도 전화번호부 노릇, 숙식제공에 가이드까지 그동안 참 많이도 해줬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명품에 빠진 동창의 숱한 구매대행 부탁에다, 방학 때면 자식 영어 학교며 숙소며 차 렌탈까지 내 시간 쪼개가며 알아주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나도 지쳤다.
이런 부탁을 받아도 예전의 나 같으면 그냥 선물로라도 사서 보내줬을테지만, 이번에는 미안하다고 거절했다. 거절해 놓고도 그동안 친하지도 않은 동창들 부탁은 다 들어줘놓고 정작 친한 친구 아들 옷 사줄 힘은 남아있지 않구나 싶어 마음이 안좋다. 사실 예전엔 혼자라 시간도 자유로웠고, 직장생활 하며 내 돈 벌어썼지만 이제는 나도 남편 돈 받아 쓰는 처지인데다, 애 키우느라 시간도 없다. 내가 여유가 없어보니 그 동안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한테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헤프게 쓰고 살았는지 참으로 후회가 된다.
한쪽이 아무리 잘 해줘도 좋은 소리 못듣는 관계가 시댁과 며느리 사이 말고 또 있다는 걸 많은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들인 후에야 깨달았다. 한쪽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당연하고, 한쪽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당하고 무례하다. 일방적인데다 시기와 질투와 말이 많아 아무리 해줘도 끝에는 꼭 틀어지고 마는 관계.
지금에 와 돌아보니 나에겐 며느리라는 자리와 동창이라는 위치가 심리적으로 비슷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역할이 주어지면 힘 닿는 한 뭐든 다 해줘야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나름 최선을 다 했건만 서로가 최선을 다 해주는 선순환이 될 수 없는 구조라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상처와 화만 쌓였다. 남은 남인 거고,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다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 도 아니고, 내가 전교생 모두랑 친구 하며 지낼 수도 없는건데 예전엔 그래야 하는 건 줄 알았던 것 같다.
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 앗아가고 지저분하게 끝나는 동창이라는 얄팍한 관계. 그깟 SNS 댓글들이 다 뭐라고… 사이버 상으로 살갑게 구는것을 착각하고 친구인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정작 친한 친구들은 그런 부탁들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 우리 가족들이 와도 그렇게 정성들여 해주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이런 관계들을 끊어버리고 나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알지 못하는 이와 친구되는 것도 쉽지만, 알던 이와 작별하는 것도 인터넷 세상에선 얼마나 편리한가. 친구 끊기 버튼 하나면 바이바이.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일도 서로 어색하게 얼굴을 붉힐 일도 없다.
처음이 힘들었지 요즘은 애초에 아니다 싶으면 얼른 끊는다. 전전긍긍하며 고민하고 못 끊다가 큰 맘먹고 친구끊기에 차단까지 하면서 연관된 친구들까지 정리했더니 처음엔 좀 불안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개운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더라. 끊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이 걱정을 했었는데, 나의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 정말이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독한 마음 먹고 버튼 하나 누르면 거슬리던 사진들을 보지 않아도 될 자유가 생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찝찝한 기분과도 손쉽게 안녕이다. 뉴스피드에서 뜨는 사진들을 안볼 수가 없는 나도 싫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에게도 내 일상의 사사로운 사진들이 매일같이 보일텐데 서로 괴로울 것 아니겠는가.
자꾸 이렇게 끊어 버릇하다가 습관이 되지 않을런지 걱정이되긴 하지만, 어차피 넓은 인맥 관리할 수 있는 여력도 안되고, 대충 두루두루 인간관계맺는 성격도 못되는지라 넓고 얕은 관계보단 좁고 깊은 관계가 좋다.
요즘 내가 즐겨보는 ‘미스티’ 라는 드라마에도 나오더만, “잘나가는 사람 주변엔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그의 성공에 같이 편승하고 싶은 사람, 그가 잘 안되길 바라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 그런데 양쪽 다 알고보면 그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진 않아” 라고. 그렇다. 허울만 좋은 ‘좋아요’ 나 ‘하트’따위 필요없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들일 시간도 모자란다.
P.S. 어쨌든 이 자리를 빌어 선언하건데, 저는 더 이상 쇼핑 구매대행 안합니다. 쇼핑은 스스로 하세요. 호텔이며 식당은 인터넷이 저보다 훨씬 잘 압니다. 전 뉴욕의 호텔에서 자 본 적도 없을 뿐더러, 밥도 퀸즈에 있는 한식당에 더 자주 갑니다. 마음은 저희 집에서 계시라고 하고 싶지만 저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숙박은 곤란합니다. 그러니 제가 한국가면 그러하듯 서로 맛집에서 만나서 밥이나 한끼 합시다. 맛있는 밥 한끼는 기쁜 마음으로 사드리겠습니다.
그림도 좋지만... 글을 읽으면 작가님 참 멋진분이시구나...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