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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희/수다만리
2018.04.04 00:33

(333) 박숙희: '펑크의 여왕' 데비 해리의 첫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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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만리 (24) 데비 해리의 첫 뉴욕, 1965

플레이보이 클럽 버니에서 펑크록 그룹 '블론디' 리더로


My First New York

데비 해리 Debbie Harry,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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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가 CBGB 건너편(315 Bowery St.)에 데비 해리에 헌사하는 벽화. 


나의 밴드 '블론디(Blondie)'는 아마도 1966년 말이나 1967년쯤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연대를 기억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내가 플레이보이 클럽(Playboy Club)에서 버니(*플레이보이 버니는 신사들이 드나드는 플레이보이 클럽에 턱시도에 토끼 의상으로 일하는 웨이트레스, 오디션을 거쳐서 선발된다. 1960년 오픈해서 1988년 문을 닫았다. )로 취직하기 전이었다.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나른한 곱슬머리 금발의 고저스 조지(Gorgeous George)를 접대했다. 난 어릴 적 레슬링 팬이었는데, 고져스 조지에게 음료를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1965년 뉴욕으로 이주해서 독립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가족을 떠나 내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 그건 여러 사람들에 적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직업을 찾아야 했다. 아파트를 구해야 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들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콘서트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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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데비 해리는 플레이보이 클럽의 웨이트레스(버니)로 9개월간 일했다.


첫 직장은 가정용품 도매상회의 판매원이었다. 225라 불리우던 빌딩(225 Fifth Ave. *27th St.)에 가게가 있었다. 내 아파트는 이스트빌리지 세인트마크 플레이스(8스트릿), A애브뉴였다. 톰킨스퀘어파크(Tompkins Square Park) 건너편이었다. 그 당시는 공원에서 늘 밴드들이 연주했다. 무척이나 많은 밴드들을 보았는데, 대부분 사라져갔다. 그때 나는 뮤지션이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1977--bw-photography-debbie-harry.jpg 1977년의 데비 해리


잼 세션(*뮤지션들이 비공식적으로 모여 악기를 연주하는 시간)에 가서 음악을 많이 들었고, 때로는 노래를 하기도 했지만 녹음을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 뉴욕에선 대중 앞에서 '해프닝'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오가며, 연주하고, 함께 돌아다니던 때였다. 나는 시장에 두리번거리고도 했고, 교사, 사진가, 화가, 댄서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엄격한 밴드도 유명한 이들도 아니었다. 난 아이디어 자체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무척 결단력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수줍어했다. 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고, 재즈부터 자유 장르, 록그룹까지 여러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아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던 때였다. <Time-Out NY>

 

*Blondie - Heart Of Glass


Blondie1977.jpg Blondie


본명은 안젤라 트렘블(Angela Tremble). 1945년 7월 1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3개월 후 뉴저지 호돈의 선물용품 숍을 운영하는 해리 부부에게 입양되어 데보라 앤 해리(Deborah Ann Harry)로 개명했다. 생모는 유부남과 사이에서 아이를 출산한 후 입양시켰던 것. 네살 때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게됐고, 1980년대 말 생모를 찾았지만, 생모의 거부로 만나지는 못했다. 


고교시절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했고, 학교에선 치어리더로 활동했다. 해켓스타운 센터너리칼리지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해 BBC 라디오 사무실에서 비서를 거쳐 맨해튼 펑크 클럽 '맥스 캔사스 시티(Max's Kansas City)'의 웨이트레스, 뉴저지 유니온시티 디스코데크의 고고댄서, 그리고 플레이보이 버니로도 일했다. 


1968년 포크록 그룹 '윈드 인더 윌로우(The Wind in the Willows)'의 보컬로 앨범을 낸 후 두번째 앨범을 녹음했지만 테이프 분실로 출반되지는 못했다. 1974년 밴드 '스틸레토스(Stilettoes)'에서 노래하면서 '블론디(Blondie)의 기타리스트이자 애인이 될 크리스 스타인(Chris Stein)을 만났다. 이들은 스틸레토스를 떠나 '천사와 뱀(Angel and the Snake)를 결성했다. 멤버는 Gary Valentine, Clem Burke, Debbie Harry, Chris Stein, 그리고 Jimmy Destri. 이후 밴드 이름을 '블론디(Blondie)'라고 바꾼다. 이유는 데보라 해리가 그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해리의 별명이자 만화 제목 '블론디'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당시 해리와 스타인은 바워리스트릿의 월 125달러 아파트에 살았지만, 렌트 내는 것조차 어렵게 살았다. 


*Blondie-Call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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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팬이자 미용실에서 일했던 데비 해리는 탈색 금발로 펑크 록 '블론디'를 이끌었다.


블론디는 데보라 해리의 미모로 화제를 모았다. 마릴린 먼로의 팬이었던 해리는 금발에 펑크 스타일의 패션으로 인기를 얻었다. 사실 뉴저지의 미용실에서 일하던 데비 해리는 머리를 탈색하곤 했다. 열아홉살 경 뉴욕에 이주했을 때 그녀의 머리는 갈색이었다. 하지만, 앤디 워홀의 팝 아트가 풍미하던 시절, 데비 해리도 탈색한 금발을 시그내처로 유지하게 된다. 카메라광인 크리스 스타인은 그녀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렸고, 음악보다도 해리의 매력에 언론은 관심을 보였다. 


블론디는 맨해튼 펑크클럽 맥스 캔사스 시티와 이스트빌리지 콘서트홀 CBGB에서 연주했다. 당시 음악의 메카였던 맥스는 데비 해리가 웨이트레스로 일했던 클럽이기도 하다. 해리는 영화배우 제임스 코번, 록그룹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테이블을 맡은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1979.jpg 1979년 롤링스톤스 표지의 '블론디'

 

1976년 블론디는 데뷔 앨범 '블론디'를 냈고, 2집 '플라스틱 레터'까지도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러나, 세번째 앨범 '패럴럴 라인'의 싱글 '하트 오브 글래스(Heart of Glass)'가 뮤직 비디오, 디스코 열풍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팔리며 뉴웨이브, 펑크록의 수퍼스타가 된다. 1979년 음악잡지 '롤링스톤'의 표지에 실렸으며, 이후 '콜 미(Call Me)' 'The Tide is High' 'Rapture' 등 히트곡을 냈으나, 1982년 그룹은 해산했고, 해리는 스타인의 병을 3년간 간호하며 활동을 중단했다. 1989년 커플은 결별한다. 하지만, 1997년 블론디는 재결합해서 오늘까지 연주해오고 있다.


이후 데비 해리는 영화 '비디오드롬' '헤어스프레이' 등에 출연하며, 솔로로 공연해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에서 금발의 복제인간 프리스역을 제안받았으나 레코드 회사의 반대로 거절했다. 훗날 데보라 해리는 이것이 인생 최고의 후회라고 밝혔다. 데비 해리는 1999년 VH1 록큰롤 사상 위대한 여성 100인 중 12위에 선정됐다. 


*Blondie - One Way Or Another



sukiepark100.jpg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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