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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김희자: 진주 조개가 모래알을 품듯이
바람의 메시지 (30) 펄 벅 하우스를 찾아서
진주 조개가 모래알을 품듯이
펄 벅 하우스(왼쪽부터) Photo: Pearl S. Buck International. 화장대 앞의 배우같은 두번째 남편 Richard Walch, 펄 벅의 묘. Photo: Wheiza Kim
봄이면 언제나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떠난 아이를 기다리는 에미의 간절한 기다림 같다. 때아닌 폭설과 함께 폭풍이 지나가니 행여 길을 잃지나 않았나하고 서성거리며 하늘의 눈치만 보며 지낸 삼월부터 사월 사이. 이윽고 포동포동한 봄의 손이 등 뒤로 와선 눈을 가리며 살짝 업힌다. 너무도 그리웠던지라 뺨을 비벼대니 꽃망울 터지는 향과 소리가 온통 잔디밭 스프링쿨러마냥 솟아 퍼진다. 삼월이 끝날 무렵부터 마음은 이미 나물캐러 나간 봄처녀들이 되어 스마트폰 속의 채팅 친구들의 봄 그림과 사진, 노래, 연주가 수없이 흘러 다녔으나 봄꽃들이 피어나니 이젠 무심해질 때도 됐나보다할 무렵, 마음만은 늙음에서 제외받은 은발머리 소녀들의 들뜬 마음은 핑퐁을 치듯했다.
결국은 필라델피아에사는 친구의 가이드로 필라 북부, 벅스카운티에있는 펄 벅 하우스(Pearl Buck's House)가 있는 Green Hill Farm으로 소풍을 가기로 결정하고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뭉쳤다. 알고보니 Buckinghamshirer의 준말로의 Buck's County이었는데, 그 이름이 펄 벅이 살았었기에 생긴 것이라 우기는 넌센스까지 지어내며, 사춘기 중반에 읽었을 펄 벅의 대지에 대한 아슴한 기억들을 풀어 내었다. 단연 메뚜기떼였고,어떤 친구는 주인공 오란이 살구를 먹은 후 그 씨를 땅에 묻어서 자란 나무에 만개한 구름같던 꽃에 대해, 또 중국 여인들의 전족에 대해, 어떤 친구는 본처와 첩들이 어떻게 한집에서 살수가 있었을까 등등의 얘기들을 하며 마냥 낄낄거리며 재미있어 했다.
가는 길을 하이웨이를 피하고 아직 흐드러진 꽃들은 없으나 파릇파릇한 잎들이 자욱한 시닉 루트인 지방도로를 택하여 바쁠 것 없이 그 지역의 앤틱샵, 그리고 주말 플리마켓들을 구경하자는 친구의 제안에 모두 신이 났었다. 만약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더라면 큰 걸 놓쳤을 뻔했다고 느껴 졌던 참으로 특별한 것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기야, 살면서 보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 테지만, 우연 속에서 소중한 것을 보고 얻을 기회를 갖는 것은 행운이라 해야 하지 않는지. 특별하게 느껴지는 빈티지 감성을 자극하는 앤틱 공예소품들이 무언가 색다르고 많은 얘기를 건내오며 마음을 찌르르하게 했었다.
한 친구 질문이 "서양 사람들은 왜 무서운 해골들을 실내에 장식품으로 두고 좋아하는 걸까? 이해가 안가" 라는 말에, 잘 알진 못하지만, 내 경험으로 유추한다면, 극악스레 용맹스러운 스페인이나 그들이 점령했던 남미 등지에서 본듯했다. 다분히 종교적인 생과 사에 대한 상징물로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잊지말고 현재를 신나고 열심히 살라는게 아닐까고 유추를 해보며 중세 유럽귀족들의 초상화 속의 실내 배경속에 가끔 장식으로 있던 해골들이 기억이 났다.
앤틱샵의 공예품(왼쪽)과 펄 벅을 연상케하는 목각 인형. Photo: Wheiza Kim
그리고, 다른 곳에서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매우 엑조틱한 공예 조각상들이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소곳한 백인여성들의 모습으로 조용한 미소 속에 가득한 자만과 체념이 믹스되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용도가 있어서 인지, 살펴봐도 아무 의도가 있어 보이지 않는 치마부분의 자른 나무 막대기로 처리한 방법이 매우 흥미로웠다. 인형들의 얼굴에 마치 백인 여성사가 깃든듯한 각각 다른 표정에 눈을 뗄 수가 없었지만, 떠나야 해서 급한 마음에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어떤 조각은 마치 마음의 상처들을 곰씹으며 살아낸 펄 벅 여사를 모델로 하여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자아내게도 했다.
이렇게 많은 얘기를 내게 건내며 가슴에 와닿으니, 대단스럽지 않은 그 공예품을 만든 이들은 지금 나에겐 미술사에 등장하는 어떤 위대한 조각가 못지않다 여겨졌다. 나는 언제나 시각예술의 진수는 말과 글을 제거하고 형과 색으로 누군가의 가슴을 후비듯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의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나 작고 큰 돌덩어리에서도 우리는 감동을 하고, 풀 포기 나무 한그루 구름 한점에도 의미를 얻고, 한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발견한다는 시인의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인생에서 첫소설을 만나 읽은 것이 '대지'였고, 사춘기적 가장 인상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면 그 소설을 영화화한 36미리 흑백영화(The Good Earth, 1937)였다. 나는 학교 때 몰래 영화구경가기를 매우 좋아했었는데, 그 영화는 공식적으로 언니의 권유에 엄마와 함께 세 모녀가 훌쩍대며 본 영화이다. 영화관을 나온 두 여인이 껴안고서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이 무언지 알 수 없는 어떤 인생의 비밀을 보는듯 물끄러미 보고있던 십대 소녀 모습이 한폭의 블랙화이트 드로잉처럼 클로즈 업이 되는 적이 더러 있다. 언니는 엄마의 설움을 깊이 공감해서 일테고, 엄마는 그 영화의 줄거리가 자신의 얘기이었기에 그러했을 꺼다. 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여자라 불리는 숙명성은 저항할수 없는 걸까 라는 질문을 어렴풋한 숙제로 안는 계기가 되었었다.
사춘기를 넘어서며 엄마의 삶을 매우 객관적으로 시니컬한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고, 나는 엄마처럼 항상 양보하고 져주고, 선택에서도 나쁜 것만이 자기 것으로 알며, 남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면서 절대 살지 않겠다 결심하며, 이기적인 마음 내기를 연습하곤 했다. 그러나, 결코 숙명은 비켜가지 못하고 나 역시 한치 다르지 않은 엄마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을 때는 이미 불혹을 넘어 선 나이였다. 피로 내려진 여자로의 천성과 상처는 마치 내리는 비가 은연 중에 홈을 파놓아 깊은 가슴앓이를 하며 자의식과 전쟁을 치루며 살아갔다.
영화 '대지'(1937)
내 엄마는 펄 벅이 입양하여 기른 6명의 아이 두배가 될, 한명 모자라는 한다즌이었다. 나는 어릴 적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자존심이 상하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이있다. 엄마가 형제 모두를 데리고 어딘가 나들이 소풍을 가면 사람들이 “무슨 고아원에서 왔느냐”고 묻던 말이 지금도 가슴을 할퀼 때가 있다. 글쎄 그 시절에도 양부모가 함께 피크닉을 가는 가족들이 많았을 테지만, 내 아버지는 아이를 생산만 했지 아무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고, 대지 속의 왕룽이나 그 중국인들 처럼 첩이 몇인지 알 수 없는 남자였을 뿐이다. 그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엄마가 아들을 낳지못해 칠거지악이라는 유교적 법에 따라 할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에게 바람을 마음대로 피울 수 있는 허가를 내 준 상황이었다.
그에 더하여 전쟁 후 피난통에 홀로된 여성들의 멍에를 나눈 꼴이 되었다 해야 맞을 꺼다. 부와 정력을 과시하는 남성성을 발휘할 당위성를 부여받은 시대적 여건을 피할 수가 없었다고 변명을 해주던 엄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눈물을 삼키는 날들이 많았고, 우린 그 엄마를 몰래 지켜보며 자랐다. 물론 한집에 살은 첩도 있었고, 첩들에게서 낳은 죄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여 기른 터이라 고아원을 차릴 숫자가 되버린거다. 우리 엄마의 삶은 펄벅 소설 밖의 실존 인물이었다.
엄마 자신의 여자라 불리는 숙명에 대한 저주가 우리들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딸인 우리에겐 알게 모르게 , 삶의 갈레길마다에서 늘 작동되었다. 여자도 배우면 세상 어떤 남자보다 못할 께 하나도 없다라는 구호로 시어머니와 갖은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시대를 거스르고 몰래몰래 딸 다섯을 모두 유명 대학으로 보내서 전문직을 갖도록 하여 엄마의 한을 밀어붙쳤다. 입양한 아이들과 아버지로 인해 온갖 시련들을 겪으며 마음고생 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볼 짬이 없이살다가 결국은 쉰이란 나이에 자궁암이 온몸으로 전이되어 뼈와 가죽만 남은 미이라같은 모습으로 가셨다. 내가 결혼하여 시집살이와 남편 문제로 고통스러울 때마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무슨 의미였을까를 자세하게 물어볼 틈도 없이 떠나버리신 거다.
나는 내 결혼 생활이 너무나 불행스러울 때마다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곤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한 예술가로 살고 싶었는데, 왜 여자는 꼭 결혼을 해야만 하고, 한번 집을 떠나면 귀신이 되어도 돌아와선 안된다던 너무도 처절하고 섭섭한 말로 녀식의 등에 비수를 꽂듯 떠밀어 쫒아내었던 딸년으로 태어난 저주를 잊을 수가 없다.
펄 벅에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대지'(1931, 왼쪽부터), 1932년경의 펄 벅 Photo: Arnold Genthe, 1938년 스톡홀름에서 구스타프 5세 스웨덴국왕으로부터 노벨상을 받고 있는 펄 벅.
펄 벅의 여성으로의 삶도 거부하고 뱉어낼 수 없는 숙명인줄 알았기에 진주조개가 모래알을 품어 진주를 만들어내듯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여 선택해갔을 꺼다. 그녀는 광신적인 교조주의 선교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갖은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 것에 대해, 어머니의 초상에서는 얘기하면서도 자신의 자서전 'My Several World'에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또한, 두 남편들도 어떤 의미의 존재였는지, 이름 자들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첫 남편으로 부터 얻은 지체아를 한개의 진주의 모래씨로 승화하여 '자라지 않은 아이'의소설을 썼지만, 남편의 차거운 무관심과 사랑 없이 홀로 키우며, 가슴앓이를 무섭게 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기어코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와서 두번째 남편을 만나서 서로 사랑했고 서로의 결핍을 보완하며 행복했을 법도 한데, 왜 그에 대해서도 한 줄도 말한 바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미스테리인 것 같다.
하바드를 나온 배우같이 잘 생긴 그는 펄 벅의 능력을 높이 사서 늘 고무해주며 책도 출판해주었다한다. 출판사를 운영한 부자이기도 해서 결격될 것이 없는 멋진 신사남편이었다고 전해지지만 펄 벅에겐 무었이 모자라는 남자였을까. 여자의 일생에서 남자가 차지하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었노라고 자기 일생을 회고하면서도 일언반구도 않은 거다. 그 질문은 내 엄마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나 혼자서 묻고 답하다가 끝낼 미완의 답안지일 걸 지금 나이가 되니 알 것도 같다. 나에게도 입양한 딸 하나가 있어 친절히 삶을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이젠 다 끝나버린 얘기다.
전시된 그녀의 생활 소품과 미술작품들을 보며 그녀의 미적 감각이나 무엇을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 유난하게 내 가슴을 섬뜩하게한 것이 있었는데, 중국 여인의 십센티 남짓할 쬐그만 전족 신발이었다. 얘기나 글 속에선 읽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구경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천년을 이어 내려왔다는 소위 상류사회 여인들의 고통이 실핏줄같은 비단실로 비명소리가 들릴듯한 꽃수로 놓여진 신발. 돈과 권세있는 남자들의 성노리개로의 역할을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이고, 노예적 삶을 통해서라도 오용락을 누리며 호화롭게 살아 보겠다는 여인들의 부끄러운 욕망이 엉키고 짓이겼을 발이 담겨졌던 신발을 보았다. 언젠가 그 흉칙한 발을 어느 짐승의 발인가 라고 고발한 여성 인권운동가의 사진을 보며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중국여인의 전족 신발(Chánzú)
펄 벅은 그 물건을 약자로의 받는 고통에 대한 아픔과 시련을 되새기기 위해 곁에 두었다고 한다. 그녀가 평생을 바친 약한 소수자 편에 서서 사회운동과 글의 주제였던 여성의 인권, 성불평등, 인종차별, 전쟁고아 등의 문제는, 결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조건일 뿐임에 세상 사람 모두가 이해와사랑으로 보살펴야 함을 강조하며, 자신의 인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거다. 특히 혼혈아들은 추악한 전쟁이 만든 죄임에도, 아무도 돌보려하지 않은 채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생명들이기에, 그녀는 혼과성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행복과 새 생명을 연결한 인류애적 공헌이라 해야 할거다.
그녀는 자신이 중국에서 태어난 후 반평생을 살며 그들의 문화적 뿌리인 철학과 사상을 어릴적부터 완벽한 중국어로 익히며 자신이 중국인인줄 착각을 하며 살았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서른다섯살 즈음에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하며 온가족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몰살을 당하는 위기를 맞으며 그 착각이 깨어졌다고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East Wind: West Wind)'에서 말했다.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한 제국주의주의적인 서양을 비판한 죄로, 미국에 돌아와서도 보수층의 백인 주류작가들로부터 의도적인 비판과 시련을 받아야 했다.
남성 평론가들이 단지 여자들의 북클럽에서나 읽히는 글들을, 인권 운동가로의 퓰리처상을 넘고 노벨상까지 받게된 것에 대해 너무 과한 평가를 받고있다고 질투의 힐난들을 퍼부었다 한다. 중국에서 푸른 눈에 금발이기에 당했던 왕따 생활을 미국에 와서도 고립을 당하며 어느 곳에서도 이방인이 되버린그녀는 그 고독과 처절함을 밷어낼수 없는 모래알처럼 머금고, 진주 조개 속의 진주가 자라듯 고통을 참으며 더 영롱한 작품을 잉태하였을 꺼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오는길목에 그녀의 무덤이 고느적하게 대숲가에 있었다. "우리는 땅에서 왔고, 땅으로 돌아가야만해"라던 '대지'의 마지막 귀절대로 땅에 묻힌 그녀의 중국 사랑은 거기서도 볼 수 있엇다. 그녀의 묘비 위에 펄 벅이라는 영어가 아닌 한자로 보석 보자와 진주 '賽珍珠'라는 석자가 씌여 있었다. 묘석의 발치에는 노란 수선화들이 마치 그녀가 보살피던 어린아이들 처럼 조랑조랑 서서는 봄을 찬양 하는 나팔을 불고 있는듯 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노라니 대숲에로 지나가는 바람의 얘기가 귓전을 스친다.
"무섭지 않았나요?"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지."
"그런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어요?"
"절망했기 때문이야."
그녀가 쓴 책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에서 "용기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이라고 하던 얘기이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게 죽음을 눈 앞에 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남편이나 타인에 의지하려 하지말고, 스스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용기를 가진 여인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녀의 말인지 나의 생각인지 분간이 안되는 충고다.
김희자 Wheiza Kim/화가
이화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한 후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 결혼 후 10여년 동안 붓을 꺾고 있다가, 30대 중반을 넘기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1997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SUNY) 방문 초청작가로 와서 한국현대미술을 가르쳤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전을 시작으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0 여회의 그룹전과 22회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롱아일랜드 끝자락 노스포크 사운드에 거주하며,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