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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붓놀림의 서정성

북한미술의 거장들 <3> 김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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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화백과 운봉(雲峯) 김기만(金基萬, 1929-2004) 화백은 분단의 비극을 안고서 남과 북에 각각 떨어져서 반세기 이상을 살다간 형제 화가다. 


기만은 맏형 김기창보다 열여섯살 아래인 동생. 그는 어릴 적 큰형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다가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 기창은 남한에 남아 청각장애를 딛고 화단의 거목이 되었고, 인민의용군으로 입대한 아우 기만은 월북해 공헌화가가 됐다.



0.jpg 운보, 운봉 형제의 조우


이들이 재회하기까지는 50년이 흐른다. 2000년 12월 1일 병상의 기창은 기만과 반세기만에 해후했다. 이산가족 상봉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한 기만은 중풍으로 삼성의료원에 입원해있던 청각장애 큰형 김기창 화백과 '무언의 애닯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한달 후 운보는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운봉은 4년 후인 2004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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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만 화백은 1929년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맏형 기창은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열린 운동회 때 장티푸스에 걸려 그만 청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한윤명은 기창에게 일본어 대신 한글을 가르쳤고, 목수로 키우려했던 아버지의 고집을 거부하며 고종의 화가였던 김은호 선생을 사사하게했다. 사사받은 지 6개월 후 기창은 널뛰기 장면을 그린 '판상도무'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다. 1931년 5월 기만이 두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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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머니는 기만이 4살 때 세상을 떠나고 기창이 가장 노릇을 하게됐다. 선전 입선 후 연달아 수상한 기창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시작한 기만도 화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만 화백은 교동공립보통학교와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기공립고등중학교를 다니며 이순종, 길진섭의 지도를 받았다. 서울시립미술연구소의 연구생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 1951년 의용군으로 북한군에 입대 후 월북한다. 


이후 김 화백은 평양 미술대학교 조선화 학부에 입학했으며, 1960년부터 6년간 모교의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김 화백은 동식물을 담백한 붓놀림으로 서정적으로 묘사하며 조선화의 거장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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