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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ystery of Po Kim's Abstract Painting at a Manhattan Thrift Shop

김포 화백 추상화 스리프트 숍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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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순의 일이다. 미국인 친구가 맨해튼 그래머시파크의 스리프트숍(중고가게)에서 좋은 그림 한점을 보았다고 말했다.

추상화가 '포 김(Po Kim)'을 아느냐고 물었다. 375달러로 무척 싸다고 구입할까 한다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필자는 Paul Kim으로 알아듣고 흘려버렸다. 나중에 친구가 구글 검색해서 보내준 영문 기사를 보니 Po Kim, 김포(김보현, 1917-2014)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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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뉴욕컬처비트를 준비하면서 3시간 가량 허심탄회하게 인터뷰했던 분이었다. 필자의 가방이 무겁다고 들어주셨던 선생님, 실비아 월드와 함께 사라피나에서 식사했던 일, 갤러리 오프닝 리셉션에 쓰신다고 아스터 와인숍에서 와인을 고르시던 인자하신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그림을 보고 싶었다.

 

다음날 오후 늦게 3애브뉴의 빈티지 스리프트(Vintage Thrift)로 갔다. 중고 의류들로 가득한 숍이었다. 이스트사이드의 유대인위원회연합 기금 마련을 위한 비영리 빈티지 숍이라고 한다. 빈티지 스피프트 숍의 벽에 걸려있었다는 그림은 사라졌다. 젊은 직원이 '팔렸어요'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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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쳐버린 김포 선생님의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소용돌이쳤다. 언제 작품이며, 누가 소유했었고, 왜 스리프트숍까지 나왔을까? 그리고, 누가 사갔을까? 한인일까? 지금은 어디에 걸려있나? 60년대 초로 추정되는 김포 선생님 그림의 여정에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다.

 

 

김포 화백과의 대화 중에서

 

김포 선생님은 1955년 일리노이주립대를 거쳐 2년 후 뉴욕에 정착하셨다. 불법체류 신분이었던 선생님은 그때부터 60년대 초까지 추상표현주의 스타일로 그리셨다.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 뉴욕 정착 초기의 이야기를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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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일리노이에서 뉴욕으로 오셨나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이 무서웠어요. 경찰을 봐도 겁나고… 한국에선 항상 소화가 잘 안돼서 항상 약을 먹어야 했지요. 여기 와선 그게 없어졌어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봐요.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니까요. 도피하러 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했지요. 뉴욕은 생동감 있는 도시였어요. 일리노이는 학술적이었지만, 뉴욕은 맥박이 뛰는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한국에서 올 때 수중에 300불이 있었어요. 1년 연구원으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바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지요. 그래서 뉴욕에 온 뒤 소호의 넥타이 공장에 나갔어요. 넥타이에 인쇄된 선을 따라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는 일이었는데, 시간당 1불 받고 일했지요. 하루에 넥타이 1200여개 이상 하다가 그만 두니 다른 한국 화가를 소개해달라고 하더군요. 한국 사람 다 잘하는 줄 알고. 이 후엔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도 했지요.”

 

 -신분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백화점에서 일할 때 어느 날 이민국 형사가 잡으러 왔어요. 그때 인사과장이 ‘절대 필요한 사람이니 잡아가지 말라’고 하더래요. 형사가 그러면 ’자수하라’고 권해서 자수하러 갔더니, 서류가 준비되어 있더라구요. 담당자가 나보고 ‘You are very lucky!’하더군요. 전 해에 법이 바뀌어 교환비자 소지자는 무조건 나가야 했는데, 나는 이미 그 전부터 불법체류자라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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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 Kim, 추상 146 (1960-61)

 

 

-당시 뉴욕 미술가들과 교류하셨나요. 

 “친하지는 않았지만, 드 쿠닝은 몇 번 봤어요. 내가 왔을 땐 벌써 유명한 사람이 됐지요. 그도 유명해지기 전엔 페인트 칠을 했고, 마크 디 수베로도 페인트공으로 일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깐 살기 위해서 아무거나 해야 했어요. 후엔 뉴욕대학교에서 동양미술사와 수채화를 가르쳤지만, 강사 월급은 별로 좋지 않았지요. 고생 많이 했어요. ” 

 

1978년부터 김보현 화백이 살고 있는 맨해튼 아스터플레이스 인근은 1950년대 미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즐겨찾던 지역이다. 유니버시티플레이스의 술집 ‘시다 태번(Cedar Tavern)’엔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등 유명 화가들과 시인 앨런 긴스버그, 소설가 잭 쿠리악 등 뉴욕의 예술가들의 단골이었다.

 

 -이 동네가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다고요.

 “그 시절 추상표현주의 미술활동이 전부 여기서 다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드 쿠닝, 라우셴버그 등 유명한 사람은 이 부근에서 살았어요. 당시 ‘10th St. Galleries’라고 집집마다 화랑들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들고, 모두 여기서 활동했어요.”

 

 -선생님도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하셨어요.

“억압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과거에서 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고, 당시 내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 추상표현주의였지요. 인습과 전통에 반대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한국에서 좌우익 대립에 시달려 죽음의 위기까지 갔던 김 화백은 미국에서 자유를 찾았고, 뉴욕에서 무한한 자유의 캔버스를 발견한다. 가난과 이념과 고문과 폭력이라는 악몽을 모두 쏟아냈다. 하지만, 뉴욕에서 그는 다시 ‘아웃사이더’였다. 가난과 영어라는 장애물이 있어도 캔버스는 그에게 위안이 됐다. 그는 전신을 움직이며 일필휘지식의 서예기법과 액션 페인팅의 스타일로 ‘김 포’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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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 화백: 화가에게 은퇴는 없다

*김포 화백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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