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영화제 (4)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
NYFF 2018 <4> The Other Side of the Wind
48년만에 부활한 오손 웰스, 할리우드에 바친다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
오손 웰즈, 피터 보그다노비치, 그리고 존 휴스턴. The Other Side of the Wind by Orson Wells
오손 웰스(Orson Welles, 1915–1985) 감독은 파블로 피카소처럼 '오테르(auteur, 작가)'로서 다루어진다. 피카소 회화처럼 웰스의 영화도 걸작이든, 졸작이든, 미완성이든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는 수많은 프로젝트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할리우드와 등진 오손 웰스가 말년에 만들었던 미완성 영화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가 48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8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후 뉴욕 영화제에 특별상영회 프로그램에 초청됐다.
'바람의 저편'은 허구의 다큐멘터리, 모큐멘터리(mocumentary)다. 할리우드 아웃사이더가 된 오손 웰스가 할리우드에 바치는 스튜디오의 비하인드 스토리다. 관객이 일반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허구의 매끈한 완성품이지만, 영화 제작 과정은 롤러코스터 타기처럼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절대지존의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은 알고보면, 술주정뱅이에 바람꾼이며,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이크 하나포드 감독이 찍는 영화 속의 영화는 와이드 스크린의 컬러 세상이며, 롱 테이크에 대사가 없다.
The Other Side of the Wind by Orson Wells
감독과 스탭, 기자들이 등장하는 스크린 밖의 세계는 대부분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스탠다드 화면의 흑백영상이다. 컬러 영화는 다비드같은 남자 배우의 오토바이로 대표되는 액션/폭력과 현대판 '밀로의 비너스' 오자 코다로 상징되는 섹스, 즉 폭력과 성으로 포장된 세계다. 남자 배우 대신 사용하는 마네킹들은 영화가 허구임을 상기시킨다. 미셸 르그랑의 멜란콜리한 트럼펫 솔로와 존 휴스턴 감독의 관악기 바쑨같은 목소리는 모큐멘터리를 더 극적으로 만든다.
웰스가 묘사하는 할리우드의 실체는 추악하고, 지리멸렬하며, 위선적이며, 속물이며, 난장판이다. 오손 웰스 자신의 체험이 녹아난 영화일 것이다. '신의 목소리' 존 휴스턴이 분한 하나포드 감독은 존 포드 감독와 헤밍웨이를 혼합한듯한 캐릭터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성 성기같은 거대한 물체가 쓰러지는 장면은 마초 감독 하나포드 감독과 할리우드의 거세를 의미심장하게 은유하고 있다.
결국 '바람의 저편'은 할리우드에 상처받았던 오손 웰스가 당대 할리우드에 던지는 통쾌한 복수극이 될 수도 있었다. '바람의 저편'의 100시간 촬영분이 122분짜리 영화로 완성될 때까지 2세대가 걸린 것이다.
The Other Side of the Wind by Orson Wells
'바람의 저편'을 이해하려면 영화 천재 오손 웰스와 할리우드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손 웰스가 약관 25세에 세계 영화사상 전무후무의 걸작 #1으로 꼽히는 '시민 케인(Citizen kane)'을 만든 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배우 오손 웰즈는 평생 할리우드와 애증의 관계였다. '시민 케인'도당대엔 비평과 흥행에서 실패작이었다.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을 모델로 한 '시민 케인' 상영을 금지시키려했고, 결국 개봉되자 허스트 소유 신문들이 혹평을 쏟아낸 것.
시대를 앞서간 영화천재 웰스는 '위대한 앰버슨 가'(1942),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를 연출했지만, 할리우드의 횡포에 상처를 받게 된다. 1948년 리퍼블릭 픽쳐 제작으로 혁신적인 '맥베스' 연출했지만, 제작사는 스카티시 액센트에 반감을 갖고 개봉을 1년 가까이 미루었다. 게다가 '라이프'지는 "상스럽게 살육한 셰익스피어"라고 악평을 했다. 이에 웰스는 1948년 유럽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게 된다.
The Other Side of the Wind by Orson Wells
이후 유럽에 머물면서 영화 '오텔로'(1952 )와 TV물을 만들었고, 1956년 할리우드로 복귀해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을 연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다시 웰스에게 칼을 들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영화를 재편집하고, 재촬영했다. 타협을 거부하는 웰스는 다시 유럽으로 갔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 최고의 걸작이라 간주하는 '카프카의 심판'(1962)과 '한밤중의 차임(Chimes at Midnight, 1965)'를 연출한다. '심판'을 촬영하면서 만난 크로아티아 출신 배우 오자 코다(Ojar Kodar)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70년 오손 웰스는 유럽생활 10여년만에 할리우드로 돌아온다. 당시 미국은 안으로는 인권운동, 밖으로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미해 있었고, '꿈의 공장' 할리우드는 공허한 희망 대신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풍미했다.
이때 55세의 오손 웰스는 새 영화를 구상했다. 그것은 할리우드에 관한 모큐멘터리였다. 마지막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비를 구하려는 노장 감독의 이야기. 오야 코다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그녀를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으로, 존 휴스턴 감독(아프리카 여왕, 모비 딕,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을 제이크 하나포드 감독 역으로, 비평가이자 감독 피터 보그다노비치를 그의 수제자로 캐스팅해 할리우드 영화계를 풍자한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의 시작이었다. 제작비를 이란에서 지원받았는데, 이란 왕이 폐위되면서 재정난으로 찔끔찔끔 찍어서 1976년에서야 총 100시간 분을 촬영했다. 웰스는 1979년까지 편집을 끌다가 40분 편집만 끝낸 상태로 창고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오손 웰스는 1985년 70세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미완성 작품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The Other Side of the Wind by Orson Wells
2004년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은 '바람의 저편'을 완성하겠다고 발표했고, 부 프로듀서 프랭크 마샬과 웰스의 딸 베아트리스 웰스도 이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된다. 지난해 넷플릭스(Netflix)가 배급권을 매입하면서 오리지널 필름이 LA 편집실로 들어갔고, 조각난 필름 100시간의 편집과 후반작업이 시작된다. 2014년 캐슬린 비겔로우 감독의 '허트 로커(The Hurt Locker)'로 오스카상 편집상을 수상한 밥 무라브스키(Bob Murawski)의 손으로 122분으로 짜맞추었다. 영화 속 카메오도 흥미진진하다. 데니스 호퍼, 폴 마주르스키, 클로드 샤브롤에서 최근 #MeToo 폭로로 사임한 CBS-TV CEO 레슬리 문베스까지 화려하다. 122분. https://www.filmlinc.org/nyff2018/films/the-other-side-of-the-wind
*PS1: 1996년 어느날 링컨센터 인근 반즈앤노블 서점에서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This is Orson Welles'의 사인회를 열었다. 그때 책을 사서 사인을 받았던 것이 아마도 뉴욕에서 유명인사와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영어 독해력도 안될 터인데 굳이 책을 살만큼 열정이 있던 젊은 날의 초상. 보그다노비치는 비평가 출신 영화감독이라 지성적으로 보였다.
*PS2: 90년대말 LA로 여행갔을 때 오손 웰스가 즐겨 찾던 핫도그 집 핑크스(PInks)에 가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18개까지 먹었다는 웰스는 1960년대부터 비만이었다.
뉴욕 영화제: 9월 29일 오후 2시 15분(프랭크 마샬, 피터 보그다노비치 등과의 대화), 10월 10일 오후 3시@앨리스털리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