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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이영주: 몬태나 목장에서의 발렌타인
뉴욕 촌뜨기의 일기 (52)
몬태나 목장에서의 발렌타인
예년처럼 이번 겨울도 저는 몬태나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오는 보즈맨이지만, 오고 또 와도 마냥즐겁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막내 친구들의 정다움, 둘러싸고 있는 경이로운 풍광들이 늘 새로워서 올 때마다 새로운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리처드의 Ranch도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여름 그의 랜치에서 바베큐하면서 랜치 뒤의 높은 산과 드넓은 목장 풍치에 매료되었던 터라 그의 발렌타인 디너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양목장은 막내네 집에서 30분 걸립니다. 보즈맨 시내를 벗어나서 차를 달리면 우선 높은 건물이 없어서 시야가 시원해집니다. 그런 야트막한 집들도 지나면 그 다음엔 360도로 광대한 하늘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광대한 하늘엔 시시각각 그름이 그리는 눈부시게 신묘한 추상화의 세계가 열립니다. 왜 몬태나가 ‘빅 스카이’라고 불리는지 저절로 체득되는 순간입니다. 하늘이 끝간 데 없이 크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사실 그 크기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몬태나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의 사이즈가 인간의 잣대로는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거인임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디너는 애피타이저가 다양했습니다. Steamed Artichoke, Jamón ibérico, Caprese with Bratta, Salami, 치즈와 바게트 였습니다. 햄과 살라미가 맛있었는데, 아티초크를 이렇게 쪄서 잎사귀를 빨아먹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의외로 맛이 담백하고 묘한 매력이 있어서 잎을 한 장씩 뜯어 밑둥을 빨아먹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건 늘 기분을 업! 시켜줍니다.
메인 요리는 Lamb Chop, 내가 좋아하는 양갈비였습니다. 리처드는 미리 허브와 마늘로 양념한 양갈비를 반은 바비큐로, 반은 수비드 sous-vide 방식의 두 가지로 요리했습니다. 이미 밀봉한 수비드는 용기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온에서 4시간을 익힌 후에 아주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한 면을 15초씩 노릇노릇하고 바삭할 때까지 구워주어야 하니 손이 많이갑니다.
먹어보고 저는 곧 수비드에 반했습니다. 양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면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양갈비가 입 안에서 그냥 녹았습니다. 바비큐도 맛있기는 하나 약간 진한 맛의 바비큐 보다 순하고 부드러운 수비드가 딱 제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릴에 구운 아스파라가스와 버섯을 곁들여 먹는 양고기는 양질의 스무스한 레드와인과 함께 사장되었던 제 미각을 환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식사 후에 따뜻한 차와 과일로 입가심하고 나니 양고기의 디너가 전혀 무겁지 않고 산뜻해졌습니다. 황홀하기 그지없는 화려한 발렌타인 만찬이었습니다.
랜치에서 자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흰 세상이 꿈처럼 몽롱했습니다. 밤새 눈이 와서 나무가지에 앉았던 눈들이 미풍에 날리며 뿌리는 눈 루가 착시 현상을 만들어 뿌우연 안개 속의 설국처럼 세상이 신비로웠습니다. 눈밭을 통과해 양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2주 후에 털을 깎을 예정이라는 양들은 털북숭이로 둥글둥글 했고, 임신한 녀석은 마치 궁둥이로 걸어다니는 것처럼 궁둥이가 엄청 컸습니다.
두 마리의 흰 개가 양들과 함께 지내면서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양치기 목동이 아니라 ‘양치기 견공’입니다. 한 놈은 몸무게가 100파운드, 한 놈은 130 파운드라고 합니다. 얼굴이 너무 순하게 생기고, 미인이라서, 이런 ‘보디가드’라면 저도 갖고 싶을 정도입니다. 양들은 보디가드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이합집산을 합니다. 그들을 보고 있는 동안에 하늘이 파란 색을 머금기 시작하고, 그렇게 파랗게 물드는 하늘은 설산과 눈 덮인 평원에서 쉬지 않고 신비로운 풍경을 생산합니다. 몽환적인 자연의 예술이 정점찍기를 반복하며 사람의 가슴을 쥐락펴락 합니다.
가슴에서 생명의 용트림이 솟구칩니다. 자연의 일부인 아주 작은 나. 영겁의 자연과 유한한 인간. 그런 자연의 순리에서 자연으로 돌아갈 인간.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발렌타인을 양목장에서 보내고 나니 저도 모르게 사고가 철학적 경계로 비약합니다. 이것도 발렌타인의 기적일른지요.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