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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2015.06.17 13:38

백건우씨 줄리아드 석사 맞나?

조회 수 17565 댓글 10

"줄리아드 예비학교와 학부에서 공부한 줄리아드 동창이다. 1972년 (학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


 백건우와 어술라 오픈스의 기이한 인연 <하>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씨에게 궁금한 것들

The Questions That I've Always Wanted to Ask Pianist Kun Woo Paik

  -줄리아드음대 대학원 졸업과 프란츠리스트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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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유튜브에서 백건우씨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 8번 다단조 Op.13 '비창(悲愴) 2악장(Beethoven Pathetique Sonata-II-Kun Woo Paik)'을 듣고 있다. 2013년 통영의 사랑도에서 열렸던 섬마을 콘서트 MBC 비디오다. 풍광을 배경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건반 위의 구도자'의 연주가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조금 슬프다.


부조니 콩쿠르 금메달을 올림픽 금메달처럼 1위로 둔갑시켰던지, 착각했던지, 오역했던지 알 수는 없지만 1969년 부조니는 뜬금없는 금메달을 만들어서 혼선을 빚었다. 우승자 어술라 오픈스의 위키피디아(Wikipedia)에 금메달 수상, 부조니 웹사이트에는 폴 크로슬리 금메달 수상, 백건우씨 금메달 수상 프로필. 


하지만, 그해 금메달이 1위/우승은 아니라 4위에 해당되며 1위/우승은 어술라 오픈스임이 투명해졌다. 

금메달이 우승이 아니라는 것은 백건우씨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웹사이트 바이오(*2009년 현재 폐쇄)에 아티스트 바이오가 잘못되었다면, 가장 먼저 나서서 고쳐야하겠지만 '건반 위의 구도자'는 컴퓨터를 하고, 일일이 신문을 챙겨볼 시간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매니저나 어씨스턴트라도 정정(correction)을 했어야 한다. 


홈페이지 폐쇄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잘못된 정보가 여전히 남아서 혼선을 빚고 있다. 한국의 위대한 연주자의 바이오는 정확하게 남겨져야할 필요가 있다. 만일, 줄리아드 학적부가 잘못되었다면, 그곳에 정정을 요구해야할 일이다.


*뉴욕 스토리 <102> 1969년 부조니 콩쿠르 미스테리




nyt-paik-1971-naumberg-winner-lee-finalists.jpg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백건우씨 나움버그 콩쿠르 공동 우승 기사



1971년 나움버그 콩쿠르 공동 우승



어술라 오픈스 교수를 만난 후 부조니 미스테리가 풀렸다. 하지만, 백건우의 경력이니만큼 확인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한가지가 윤색되었다면, 다른 수상 경력이나 학력, 연주 경력도 과장되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느껴졌다. 


부조니 2년 후에 열린 1971년 나움버그 콩쿠르 우승은 사실일까? 

뉴욕의 월터 W. 나움버그재단(Walter W. Naumburg Foundation)이 여는 나움버그 콩쿠르는 1925년부터 시작됐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백건우씨는 졸라 숄리스(Zola Shaulis)와 공동으로 우승했다. 뉴욕타임스(위)도 백건우씨의 공동 우승과 함께 상금(5000달러)와 리사이틀 혹은 레코딩 기회가 주어진다고 보도했다. 2010년엔 이소연씨가 1등, 우승을 차지했다.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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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리스트                                                                      조셉 레빈과 로지나 레빈

  


조셉레빈상과 프란츠리스트훈장



백건우씨의 영문한글 바이오, 호암상 프로필 등 바이오에는 부조니 금상/우승과 함께 조셉 레빈상(Joseph Lhevinne Award, 1970-71), 프란츠 리스트 훈장(Franz Liszt Award/Medal, 1982)이 등장한다.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조셉 레빈(1874-1944)은 백씨가 사사한 로지나 레빈 교수의 남편이다. 그렇다면, 그를 기리며 피아니스트에게 주는 상으로 추청된다. 그런데, 조셉 레빈상은 찾을 수 없었다. 단, 어술라 오픈스 교수가 줄리아드 음대 입학 때 1966년 조셉 레빈 장학금(Josef Lhévinne Scholarship)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백씨가 받은 조셉 레빈 상은 정확이 말하면, 조셉 레빈 장학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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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스트협회 수상자 명단에는 백건우씨 이름이 없다. http://www.americanlisztsociety.net



한편, 프란츠 리스트 이름을 딴 프란츠리스트훈장을 리서치해보니 뉴욕의 리스트협회에서 수여하는 미리스트협회 메달(American Liszt Society Medal)이 있었다. 협회는 1964년 창립됐지만, 메달(훈장)은 1984년 수여하기 시작했는데, 백씨의 이름은 수상자 리스트에 보이지 않는다. 백씨의 호암상 바이오에는 1982년 프란츠 리스트 훈장(한글/영문)을 받은 것으로 나왔다. 


미프란츠리스트메달 주요 수상자들은 피아니트스 알프레드 브렌델(1995), 지휘자 제임스 콘론(2008), 지휘자/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2014)이 있다. 그러면, 백씨의 프란츠리스트상은 다른 단체에서 수여한 상일까? 혹시 유럽? 프랑스나 헝가리의 단체일까? 시상 주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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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센터, 카네기홀, 위그모어홀(런던), 베를린필하모닉홀


다음은 그의 콘서트 경력이었다. 

백건우씨는 1971년 링컨센터 앨리스털리홀에서 '라벨' 전곡 연주로 찬사를 받았으며, 1972년 제임스 콘론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1974년 런던의 위그모어홀에서 3차례 리사이틀을 했고,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연주했다고 소개되어 왔다. 링컨센터, 카네기홀, 위그모어홀, 그리고 베를린필에 확인 요청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변이 왔다. 모두 연주한 기록이 확인됐다. OK.


그의 확인된 경력은 실로 화려했다.

백씨는 1965년 코스모폴리탄영피플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카네기홀에 데뷔했고, 이후 69년, 71년, 72년 메인홀에서 연주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후 1974년 4월 런던의 위그모어홀에서 전년에 사망한 헝가리 출신 스승 일로나 카보스( Ilona Kabos, 1893-73)를 추모하는 콘서트를 3일 연속 열었다. 이듬해 9월 베를린필하모닉 홀에서 라벨의 연주회를 열며 유럽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베를린필의 홍보실은 디테일하게 자료를 보내주었다. 이 콘서트들은 모두 확인된 사실이다.


사실을 확인해 주니 진심으로 기뻤다. 한국 출신 청년 백건우씨는 당시 정말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OK



뉴욕 타임스의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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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백건우씨의 카네기홀 연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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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지휘자 제임스 콘론과 카네기홀 연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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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앨리스털리홀 라벨 전곡 콘서트 리뷰



백건우씨의 재능과 실력은 뉴욕타임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서 Kun Woo Paik을 검색하면 42건의 기사가 뜬다. 뉴욕타임스는 백건우씨의 연주 활동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다. 


1965년 18세에 카네기홀에서 코스모폴리탄 영피플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슈만의 피아노 콘체르토 연주로 주목을 끌었다. 

1972년 4월엔 카네기홀에서 젊은 지휘자 제임스 콘론이 이끄는 내셔널 오케스트럴 어쏘시에이션과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를 협연하며 대서특필됐다. 

또한 같은 해 나움버그 콩쿠르 우승의 부상으로 주어진 앨리스털리홀 리사이틀은 어술라 오픈스도 기억하는 라벨 전곡 연주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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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나 레빈 교수 사망기사. 제자로 반 클라이번, 한동일씨와 백건우씨 등이 언급됐다. 


그리고, 1976년 줄리아드의 로지나 레빈 교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백건우씨의 이름이 나왔다. 로지나 레빈의 유명한 제자들로 반 클라이번, 제임스 리바인, 개릭 올슨, 존 윌리엄스, 한동일씨와 함께 백건우씨의 이름을 거론했다. 어술라 오픈스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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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드 대학원 졸업? OR 학부 중퇴?                    



다음은 학력 부분이었다. 신정아 게이트가 심어준 유산이다. 

로지나 레빈 교수를 사사하며, 줄리아드음대(1968)와 줄리아드 대학원(1971)을 졸업했다는 경력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2009년 11월 줄리아드음대(Juilliard School)의 홍보실에 이메일을 보냈더니 자넷 케씬 홍보국장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백건우씨는 1965∼68년 디플로마 피아노 과정에서 수학했고, 68∼71년 학사(B.M.)과정에 등록했다가 71∼72년 다시 디플로마 과정으로 돌아갔지만, 학위는 받지 못했다.”


디플로마 코스는 영문학이나 역사 과목을 배우는 학사 과정과는 달리 연주 공부만 하는 3년 코스라고 한다. 따라서 줄리아드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백씨는 줄리아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학사 과정도 중단한 것이 된다. 


IMG_6773 (2).jpg Photo: Sukie Park


2009년 11월 12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백건우씨 카네기홀 리사이틀 기자회견에 갔다. 

궁금한 점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부조니 콩쿠르 우승과 금메달 수상 여부, 줄리아드 대학원 졸업(석사학위) 여부를 알고 싶었다. 저널리즘을 전공하면서 '기자는 무엇이든 물어볼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배웠다.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무례'라고 호통치지 마시기를.


기자가 부조니 콩쿠르 우승 여부에 대해 질문했다. 백씨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답변했다.


"금상을 받았으며, 우승은 아니다. 

한국에서 금메달 번역을 잘못해서 우승자로 알려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금메달 오역이' 부조니 콩쿠르 1위/우승자로 굳혀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2008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직접 부조니 우승에 대해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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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 기자 백건우 인터뷰] 서울신문 2008.12. 1 



1969년 부조니 콩쿠르의 우승자는 줄리아드음대에서 함께 공부했고,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 리사이틀을 여는 CUNY의 어술라 오픈스 교수인데... 어술라 오픈스와 만나고 싶어할까? 


또 하나, 늘 줄리아드 대학원 학력이 나왔기에, 줄리아드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것이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뒷줄에 앉아 있던 아내이자 배우인 윤정희씨가 흥분하면서 "메르드!(Merde!), 메르드!"라고 외쳤다. 과연 그녀는 '프랑스 배우'다웠다. 프랑스말을 잘 모르지만, 영화에서 종종 들었던 단어다. 사전을 찾아보니 영어로는 fuck, damn, shit, crap, poop의 뜻. 그중 무엇이었을까?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불쾌한 불어다. 전설적인 배우 윤정희씨인지 평범한 아주머니 손미자(본명)씨인지, 현실과 영화가 헷갈렸다.


싸늘해진 기자회견장에서 백씨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느릿느릿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줄리아드 대학원을 끝내고, 클래식 음악의 고향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줄리아드 학적부에서 백건우씨에 대해 잘못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망연자실해진 순간 전설의 트로이카 여배우님께서 기자의 뒤통수에 대고 "어디서 왔어요?"하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뉴욕중앙일보인데요"했더니 바로 쏘아붙였다. "내가 홍회장님에게 연락해야겠군!"  갑자기 악역을 맡은 프랑스 여우가 떠올랐다. 잔느 모로? 카트린느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가 화가나면 저럴까? 갑자기 영화와 현실이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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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뉴욕한국문화원 기자회견에서 백건우, 윤정희씨 부부와 송수근 한국문화원장, 이순희 한국음악재단 회장.

 Photo: Sukie Park



What if?


만일 그때 윤정희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면? 윤정희씨는 충무로가 자랑스러워하는 제 1호 석사 배우'였으며, 파리대학원 석사이니 말이다. 

윤정희씨의 학력에는 1972년 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졸업(예술학 석사)와 프랑스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졸업 (예술학 석사, ?년)이 나온다. 한국 '보그(Vogue)'지 인터뷰 (여전히 아름다운 윤정희)에는 대학부터 다녀 석사학위를 받는데 십몇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무척 학구적인 배우로 존경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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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연극영화과 석사, 파리 제 3대학교 석사 윤정희씨와 줄리아드 석사로 알려진 백건우씨



충무로 황금시대의 스타 윤정희씨는 1967년 데뷔한 이후 7년간 280편에 출연했다고 말해왔다. 촬영이 많을 때는 하루에 3편을 동시에 찍었으며, 신성일씨의 상대역으로 무려 99편에 함께 출연했다고 회고했다.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윤정희씨 페이지에는 그의 출연작품 243편이 소개되어 있다. 

1967년 '안개' 등 13편, 68년 '장군의 수염' 등 45편, 69년 '흑산도 아가씨' 등 46편, 70년 '기러기 아빠'등 40편, 71년 '분례기' 등 42편, 72년 '무녀'  등 27편, 73년 '여대생 또순이' 등 13편, 74년 '꽃상여' 등 2편, 75년 '태백산맥' 등 4편, 77년 '야행', 78년 '화려한 외출', 79년 '여수' 등 4편, 그리고 뜸하다가 81년 '자유부인 81', 82년 '삐에로와 국화', 87년 '위기의 여자', 88년 '시로의 섬', 92년 '눈꽃', 94년 '만무방' 그리고 15년만에 컴백한 이창동 감독의 '시'까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화려한 경력을 보유한 배우다.


배우로 데뷔한 1967년부터 석사학위를 받기(1972년 2월) 전 해까지 5년간 약 104편에 출연하면서 논문 '한국 여배우 연구'를 써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니 천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974년 프랑스로 유학가서는 파리 제3대학교 대학원에서 '월하의 맹세'의 이월하부터 최은희까지. 한국 영화의 계보도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 유사한 주제의 논문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고 한다. 나 역시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면서 여배우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기에 기회가 되면 배우의 시각에서 쓴 그 논문들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떻게 연기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석사학위 논문까지 썼는지 비결이 궁금하다.


하지만, 그날의 기자회견은 백건우씨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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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인물정보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건반위의 순례자’ 백건우/ 서울신문 <2008.12.1>



회사에 돌아가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봤다. 

기사를 쓰고 내가 해고된다/기사도 못쓰고 해고된다/나뿐만 아니라 윗분들이 다친다/나도 윗분들도 고생한다...

막강한 커넥션을 갖고 있는 파워커플, 예술계의 권력이므로. 한국에서는 외딴 섬같은 뉴욕의 동포신문의 기자는 '허리케인 속의 촛불'일 터이다. 내가 아무리 컹컹 짖는다 할지라도 이곳 신문은 변방,  '에스프레쏘 잔 속의 폭풍'에 불과하겠지. 

 

영화를 전공하면서 많이 본탓에 필름 누아르와 힛맨(hitman) 영화도 떠올랐다. 레옹(Leon)이 나를 찾아온다면? 소리소문없이 내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종된 후 허드슨강에 시체로 부웅 떠오를 수도 있는 일이다. 유서를 써놓아야 할까? 영화를 많이 보면 상상력이 풍부해져서 겁도 났다. 


생각해보면, 6년 전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회사에서 잘리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술라 오픈스와 부조니 콩쿠르에 관한 긴 기사를 썼지만, 지면 상 짧게, 그리고 순화되었다. 그나마 취재한 보람이 있게 게재됐지만, 며칠 후 인터넷에서는 내려야 했다. 지금은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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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book.org



6년 전 취재수첩을 펼치다 


하지만 나의 취재수첩은 남아 있다.


2007년 신정아 게이트 이후로 허위학력을 고백하거나 프로필을 수정한 유명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백건우(Kun Woo Paik)을 검색해보면, 음악전문 웹사이트(영문/한글)에는 이후 '줄리아드에 입학해서 로지나 레빈을 사사했고, 부조니 콩쿠르에서 입상/금상''으로 두리뭉실하게 나온다. 


하지만, 과거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됐던 부조니 우승과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 졸업 경력은 언론사, 포털사이트와 그가 수상한 화려한 상(호암상 등) 홈페이지 수상자 이력에는 남아 있다. 공룡의 화석처럼.


백건우씨는 호암재단이 시상하는 상도 받았다. 2000년 '학술, 예술, 인류 복지증진에 공헌한 인사들을 위한' 호암상을 수상했다. 최근 표절논란을 일으킨 소설가 신경숙씨는 2003년에 호암상을 받았다. 백건우씨의 수상자 한글 페이지에는 부조니 금상이지만, 영문 페이지엔 부조니 콩쿠르 1위(First Prize)로 나와 있다. 이것도 번역의 실수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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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호암상 수상자 백건우씨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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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호암상 수상자 영문 프로필



왜 정정이 필요한가?


2015년 나는 적어도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상사들이 다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는 자유인, 블로거다. 

메르스의 공포 속에서 신정아씨의 복귀, 수학천재 김정윤양 학력위조, 그리고 문단파워 신경숙씨의 표절의혹 뉴스는 집단적, 정신적인 황폐함으로 이끌고 있는듯 하다. 


문득 6년간 묻어두었던 백건우씨 취재기록를 펼쳐보면서 아직도 답글 박스가 비어있는 고! 클래식의 질문자에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그는 10년만에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 동포는 회원가입 인증 절차(*나의 셀폰 회사가 AT&T)가 까다로워 답글을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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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0일 다시 줄리아드스쿨에 연락해봤다. 혹시 다른 대답이 나올 지 재확인하고 싶었다. 2009년의 자넷 케씬 홍보국장은 지난해로 그만 두었고, 동창회 홍보 매니저 에밀리 원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백건우씨는 줄리아드 예비학교와 학부에서 공부한 줄리아드 동창이다. 

로지나 레빈 교수를 사사했으며, 1972년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


 "I can confirm Kun Woo Paik is a Juilliard alumni, both in the Pre-College and College Divisions, and he left in 1972 without a degree. Yes, he studied with Rosina Lhevinne."


 Emily Werne  

 Manager, Alumni Relations | Development & Public Affairs

 The Juilliard School


6년 전 자넷 케씬의 답장과 설명은 틀리지만, 내용은 같았다. 

백건우씨는 1962년부터 72년까지 줄리아드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학부를 중퇴하고 유럽으로 간 것이다. 그러니, 학사 학위는 물론, 석사학위도 받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만일 줄리아드의 기록에 오류가 있다면, 서둘러 바로 잡아야할 일이다. 


이와 함께 60-80년대 줄리아드에서 유학하고 리벤트리트, 부조니 콩쿠르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들의 학력도 요청했다. 다음은 답장이다.


-한동일 Tong-il Han (M.S. ’69, B.S. ’65, Diploma ’63, piano)

-이대욱 Dai Uk Lee (M.M. ’74, B.M. ’73, piano)

-서혜경 Hai-Kyung Suh (M.M. ’84, B.M. ’83,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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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움버그 콩쿠르 우승. 뉴욕타임스의 찬사, 카네기홀, 앨리스털리홀, 위그모어홀, 베를린필하모닉... 그토록 화려한 경력을 쌓은 피아니스트에게 왜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 졸업 경력이 필요했을까? 부조니 금메달은 어떻게 우승으로 둔갑했을까?

대중에게 '건반 위의 구도자'로 각인시키는데, 부조니 우승과 줄리아드 석사가 영향을 주었을까?


알프레드 히치콕과 오손 웰즈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들 중의 2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천재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씬은 콩쿠르에 나가지 않았다. 미츠코 우치다도 콩쿠르에서 고배를 마셨다. 어술라 오픈스는 부조니에서 우승했지만,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선 백건우씨에게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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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백건우씨의 음반은 하나도 없지만, 유튜브에 올라 있는 비디오로 여러 곡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에게 화가 나는 대신 그가 서서히 좋아졌다. 15살 때 혈혈단신 뉴욕으로 유학 와서 외롭고, 힘든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연습, 연습, 연습'으로 카네기홀에 갔고, 권위있는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그의 연주는 영롱하다. 감동을 준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임권택, 김기덕... 학위를 따서 성공한 이들이 아니다. 백건우씨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데 부조니 콩쿠르 우승과 줄리아드 석사는 액세서리에 불과했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은 집단적인 명문대와 학벌 숭배의 히스테리, 예술계의 권력과 옹호의 고질병이다. 백건우씨는 한국의 위대한 연주자이며, 그의 공식 기록은 정확하게, 영원히 남아야 할 것이다. 예술가는 시치미를 떼서는 안될 것이며, 인생은 연기가 아니다.


'건반 위의 순례자'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들으며 수다만리 속풀이를 마칠까 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하기 마련이다. 

영화 '라쇼몽(Rashomon, 1950)'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

-구로사와 아키라(黒澤 明, 1910-1998)-



*뉴욕 스토리 <102> 1969년 부조니 콩쿠르 미스테리

*뉴욕 스토리 <78> 1천만불 짜리 앵커 브라이언 윌리엄스의 거짓말 서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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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15.06.22 15:02
    무엇보다 윤정희씨의 그 반응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읍니다.
    또한 박숙희씨의 그 용기있는 질문에 박수가 쳐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겼읍니다. 물론 언급을 했읍니다만.....
    백건우씨가 뉴욕 줄리아드에서 공부를 도중하차 하고 윤정희와 사귐이 있었던 그 당시 뉴욕의 많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백건우씨의 도중하차건이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림이 없었읍니다.
    어떻게 해서, 누구에 의해서 이렇게, 위조학력으로 번지는 일이 생겼나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입으로 시작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신문 기자들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추측기사 내지 아부기사로 시작되는 경우를 종종 보와왔읍니다. 결국 모든 비난은 인터뷰를 응한 사람에게 돌아가지요.

    저도 한국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기때문에 신문의 생리를 조금은 알고 있읍니다. 최근 뉴욕의 유명 일간지(햇수에 입각한 유명)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야말로 학력위조와 직업위조가 실렸읍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서 여기저기서 저에게 전화가 왔더군요. 이분 역시 뉴욕사회의 한 공인입니다. 절대 본인이 허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이야기 할 분이 아니죠.

    그리고 한번 나간 기사가 정정되는것 별로 보질 못했네요. 여기서 저는 신문기자들이 좀더 철저하게 신실되고 정직한 보도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독자 J(*E-mail을 옮긴 것임)-
  • sukie 2015.06.23 02:16
    줄리아드 중단한 걸 아시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어떻게 학력위조로 번졌을까요?
    제 추측으로는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자신의 경력을 과장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유혹이지요. 그런데, 2007년 신정아씨 학력위조 파문으로 공식 바이오 페이지를 폐쇄한 것은 참으로 수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2009년 본인이 뉴욕 기자회견에서 "줄리아드 대학원 마치고..."라고 이야기했고, 신정아 게이트 이듬해인 2008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부조니 우승'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을 보면, 기자보다 본인의 책임이 크지 않은가 싶어요.

    또한, 기자들도 종종 인터뷰 대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일일이 fact check할 시간도 없고, 또한 기사를 반들반들하게 보이려고요.

    국가 대표급 예술가들이 학력 위조나 소설 표절을 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지요. 그것을 비호해주는 사회는 더 깊은 슬픔이구요.
  • .. 2015.06.26 18:32
    잘 읽었습니다. 학력위조라뇨 매우 치졸하고 부끄러운 행동이지요. 부디 오류가 있다면 확실히 정정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연주는 존경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읽는 동안 기사에 비유적 표현과 통일되지 못한 폰트, 썩 적절하지 못한 줄바꿈들..? 때문에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을 못받았습니다. 가독성도 떠ㄹ어졌구요. 혹 조금 수정을 하신다면 조금 더 원활히 읽힐 것 같습니다. ㅎㅎ
  • sukie 2015.06.26 18:35
    감사합니다. 백 선생님이 Great Performer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기사로 쓴 것이 아니라 블로그에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칼럼으로 썼다는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컴퓨터 화면과 아이폰 레이아웃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다른 모바일폰 레이아웃에서 에러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시정이 가능한지 알아보겠습니다.
  • jfkim 2015.10.23 16:56
    개인적으로 업무관련 기자와 인터뷰해본적이 몇번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말을 토씨하나 안틀리고 기사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전달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단어를 일부 수정하는 것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제가 볼땐 본인이 속인것이 아니라 기사화과정에서 기자가 단어 선정을 자의적으로(물론 그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해서겠지요) 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라는 말같은 경우에는 수료라도 본인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편안한 인터뷰자리에서 그렇게까지 단어 하나하나에 정확성이나 오해가능성을 염두해두며 말할까요?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료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대학원을 마친건 마친거죠. 다만 학위없이 마친것이긴 하지만... 제 주변에도 그냥 수료임에도(서로 이미 알고있으면서도) 대화할때 "대학원 끝내고"라고 말하는 사람 많이 봤습니다. 솔직히 굳이 수료하고 라는 말은 일상 대화체에서 그다지 쓰이지 않을 것 같고요. 그냥 대학원 마치고 또는 끝내고 또는 나오고 라는 말을 쓰겠지요.
  • sukie 2015.10.23 19:02
    포인트는 '마치고'가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입니다. 줄리아드 홍보실에선 백건우 선생님이 학부를 중퇴했다고 하는데, 백 선생님은 '대학원'을 마치고'라고 기자회견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 jfkim 2015.10.23 17:09
    그리고 전반적으로 좋은 정보를 얻게되어 참 감사한 느낌입니다만, 아키라의 말을 인용한 글의 마무리가 결국 백건우씨가 거짓으로 속이고 있지 않을까라는 인상을 살짝 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균형잡힌 글이라는 인상은 못받았어요. 민감할 수도 있는, 그러나 사실확인이 어려운, 또는 조사가 미흡한 사안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균형이 중요할 테니까는요. 본인 고의 또는 실수, 또는 무관심, 또는 오해인지 확실히 밝혀진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받는 인상은 다를 수는 있습니다만...벌써 댓글에도 학력위조라는 단정적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까?

    주제넘게 참견해 봤습니다.
  • sukie 2015.10.23 19:0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말은 백 선생님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균형없이 편견으로 가득한 글을 쓸 계획이었다면, 뉴욕타임스 대서특필 기사, 나움버그 콩쿠르 우승, 링컨센터/카네기홀/베를린필하모닉홀 연주 사실도 모두 생략했겠지요. 저는 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변방에서이지만 30년간 저널리스트의 자세로 객관적이며 공정한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데 노력해왔습니다.

    *'사실 확인 어렵다' :
    백 선생님, 본인이 공개적으로 해명하면 끝입니다.
    본인의 입으로 기자회견에서 '줄리아드 대학원을 끝내고'라고 하셨는데, 왜 줄리아드에서는 두번에 걸쳐 문의했을 때 학부를 중퇴했다고 답변했는지. 오류라면, 백 선생님이 줄리아드 학적부에 수정 요청을 하셔야지요. 그리고 뉴욕컬처비트의 기사에 오류가 있거나 훼손된 명예가 있으면, 줄리아드와 뉴욕컬처비트/필자를 고소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조사가 미흡하다':
    저는 저널리스트로서 최대한 취재를 했습니다. 이것도 백 선생님이 답변하시면 끝입니다.
    미흡한 조사라면, 최근 백 선생님께 직접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을 '다시' 묻지 않은 것이겠지요.

    제가 궁금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1. 줄리아드 대학원에 다녔나?
    2. 부조니 콩쿠르 1위였나?
    3. 프란츠 리스트 훈장을 정말 받았나? (1984년부터 시상했는데, 1982년 받은 것이 사실인가?)
    4. 조셉 레빈 상은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이었나?

    이 칼럼은 한 예술가의 정직성에 대해 묻는 글입니다.
    아울러 학력이나 정직성과 상관없이 본인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 건반마왕 2019.02.03 01:45
    그렇게 재능 있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보릿고개가 여전하던 전 국민이 굶주리던 시절 있는 집 아들내미로 태어나 어찌어찌해서 줄리어드에 들어가긴 했는데 입학보다 졸업이 어려운 미국대학 시스템을 통과하지 못한 것만 봐도 그저그런 범재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고 그만한 커리어로 딱히 돈방석에 앉았을 이유도 없어보이는데 당대 최고 여배우랑 결혼해서 사는 걸 보면 그야말로 레알 금수저였다는 것.
  • sukie 2019.02.03 13:41
    백건우님의 줄리아드 시절 친했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카메라를 들고 사진 촬영하러 열심히 다니셨다고 하네요. 그 시절 영어도 잘 안되고, 학부 공부가 무척 어려웠을 것 같아요. 줄리아드 졸업장보다 사진예술에 대한 열정이 피아노 연주에 더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문화의 메카' 뉴욕에 오면, 전공 외에도 다른 예술의 창이 열리니까요.

    그 선생님은 제게 학력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득시키려 하셨지만, 저는 저널리스트이며, 학력 위조는 바로 잡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백건우 선생님은 당대 최고 배우 윤정희님과 존경받는 예술가 커플이지만, 경력에 거짓이 있었음을 언젠가 인정하시는 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참 모습일 것 같네요.

    하지만, 이제까지 부조니 콩쿠르 우승과 줄리아드 음대 석사학위라는 의심스러운 경력을 바탕으로 이룬 수많은 연주회와 빛나는 수상을 하신 분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 학위가 거짓이었다고 인정하기는 힘들겠지요? 더구나 대부분의 주요 언론에서 침묵이나 비호를 하고 있다면요. 뉴욕이라는 변방에서 한 블로거가 아무리 외쳐보아야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요.

    Fact는 줄리아드에 두번 문의한 결과, 백건우님은 줄리아드 학부 중퇴이며, 석사학위 취득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